사건의 시작은 1985년 10월 24일이었다. 만 40년 전의 일이었다. 그날 경기도 포천 승진훈련장에서는 '한미연합훈련'이 실시됐다.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오후 3시 35분경이었다. 훈련에 참가중인 육군 8사단 21연대 소속 이등병의 발 아래로 큰 폭발음이 터진 것이다.
아버지는 사건 직후 부대측 연락을 받고 달려왔지만 장남인 아들은 보지도 못한 채 허름한 여관으로 안내 받았다고 한다. 훈련으로 텅 빈 부대에서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해는 저물었는데 물어봐도 제대로 답을 안 해주는 어느 부사관과 함께 아버지는 막걸리로 밤을 샜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10시경. 다시 부대로 가자는 부사관을 따라가니 마침내 그곳에 장남이 있었다. 그러나 아들은 이미 숨이 떨어져 관 속에 눕혀진 상태였다고 한다.
이때 아버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 하나가 있었다. 현장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장의 목격 증언이다. 그 순간을 사는 동안 잊을 수 없었다고 병장은 증언했다. 폭발로 너덜너덜해진 하반신은 가린 채 상반신만 드러내고 관 안에 누워있는 장남을 본 아버지가 휘청이며 다가가더니 이내 아들의 따귀를 때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은 환갑을 지난 병장이 울먹이며 당시 절규하던 아버지의 외침을 전했다.
"이 불효막심한 놈아. 장남인 네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다니... 어서 일어나거라. 일어나."
훈련중 불발탄 폭사, 진실은?
사건 발생 후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각에 치러진 장례였다. 죄를 짓고 숨진 것도 아닌데, 이런 초라한 장례가 있을 수 있나. 전날 출발한 남편을 따라 뒤늦게 택시를 타고 부대로 도착한 어머니는 숨진 아들을 보고 그대로 기절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등병은 한 줌의 재로 변했다.
당시 군 헌병대의 공식적인 수사 결과는 '불발탄 폭사'였다. 고지 점령 훈련 중인 이등병이 훈련장에 불발된 폭발물을 밟아 터지면서 폭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건은 정리됐다.
하지만 아버지가 대대장에게 들었다는 사건 경위는 완전히 달랐다. 훗날 장성 진급 후 고위급 공무원이 되는 당시 육사 출신의 대대장은 '아들이 자살하기 위해 일부러 지뢰밭으로 기어 들어가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최초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그게 말이 되냐. 왜 내 아들이 자살한다고 거기를 기어가겠냐?"며 강하게 반발하자 이후 자살 이야기는 사라지고 다시 등장한 사건 경위가 '불발탄 폭사'였던 것이다.
한편, 장례식 후에도 이등병의 죽음을 둘러싸고 의혹은 계속 이어졌다. 많은 동료가 사건 현장을 본 기억과 사건 처리 결과가 너무 달랐기에 그러했다. 하지만 아무도 당시에는 말할 수 없었다. 전두환 집권 시기에 의무복무 중인 군인이었고 가족 역시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영원히 모두를' 속일 수는 없었다. 2018년 9월 13일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때 진정접수 기간 만료를 하루 앞둔 2020년 9월 12일, 이 사건에 대한 진정이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사건 발생 후 만 35년 만에 최초로 공정한 사건 재조사가 시작됐다. 이후 착수 3년 만에 드러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이등병의 사인은 자기 실수에 의한 '불발탄 폭사'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대대장에게 들었다는 자살 주장은 더더욱 아니었다. 진실은 1985년 10월 24일 당시, 이 부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신원식 전 국방부장관의 '잘못된 박격포 발사 명령 때문'이었다. 그날 신원식 전 장관은 어떤 명령을 내린 것일까.
이등병의 죽음 부른 신원식의 잘못된 무전 명령

▲사건 당시 훈련장 상황 설명 자료사건 발생 당시 훈련장의 위치 설명 자료 ⓒ 고상만
사건이 발생한 그날 실시된 한미연합훈련은 실전과 같은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사단장 등 고위급 장성들이 대거 훈련을 참관하러 온 그날, 부대측은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박격포를 쏘고 실탄을 발사하는 가운데 병력이 고지를 점령하는 과정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이 부대의 2대대 5중대장이었던 대위 신원식은 박격포를 담당하는 화기소대장에게 무전으로 발사 명령을 내리고 있었고 이에 따라 포반장이 박격포를 발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화기소대장은 무전을 통해 흘러나온 신원식 중대장의 명령을 듣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몇 미터를 쏘라는 사거리 명령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전해진 명령어는 그저 "멀리 한 방을 쏘라"는 지시였다는 것. 예상 못한 황당한 명령에 화기소대장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신원식 중대장에게 다시 묻는 것이 부담스러워 결국 1.5킬로미터 정도를 쏘라며 포반장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포 사격후 신원식 중대장에게 무전이 들려왔다. 문제는 그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대장 신원식과 함께 있었던 당시 무전병 ㄱ씨의 증언에 따르면, 신원식은 화기소대장에게 "포를 너무 멀리 쏴서 산을 넘어가 버렸다"며 무전에 대고 온갖 욕설을 날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짧게 쏘란 말이야, 짧게"하고 다시 무전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재차 정확한 사거리 대신 짧게 쏘라는 지시만 받은 화기소대장은 1차보다 절반 정도면 될까 싶어 700미터 날아가도록 쏘라며 포반장에게 지시한다. 결국 그렇게 쏜 박격포가 병력간 5미터씩 떨어져 대기중인 이등병의 참호안으로 떨어진 것이다.
한편, 박격포가 엄청난 폭발 굉음을 내며 이등병의 참호 안에서 폭발하자 순간 모든 병력이 땅으로 엎드렸다. 그리고 잠시 후 일어나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확인하던 그때 유일하게 일어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등병이었다. 그 순간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이아무개 병장의 증언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폭발음에 본능적으로 엎드렸다가 일어나 보니 5미터 떨어진 참호에 있던 이등병만 안 일어나는 겁니다. 평소에도 행동이 굼떠서 오늘도 그러나 싶어 '안 일어나고 뭐하냐'며 소리치고 다가가 보니 허리 부근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이등병이 작은 목소리로 엄마...엄마...하면서 말하는 것이 제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지금도 그 책임을 왜곡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지냈으며 직전 국가안보실장을 거친 당시 중대장, 신원식이다. 자신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그는 사건 제보자 등 4명을 2023년 9월경 명예훼손 등 혐의로 고소했다. 특히 박격포를 맞고 이등병이 숨졌다고 하는데, 그는 사건이 발생한 그날 오후 3시 35분에 박격포 사격 자체가 없었다며 강변하고 있다. 과연 사실일까.
1985년 10월 24일 낮 3시 35분, 박격포는 발사됐나?

▲신원식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 2024년 4월 4일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했다. ⓒ 연합뉴스
신원식 당시 중대장의 주장은 오히려 사건의 진실을 밝혀주는 분명한 증거가 되고 있다. 먼저 사건 당시 현장에 같이 있었던 동료 부대원들의 증언이다. 그들은 당시 20대 청년의 나이를 지나 지금은 환갑이 지난 할아버지가 됐다. 그들은 신원식의 주장과 달리 분명 박격포 훈련은 진행중이었으며, 박격포 발사 후 이등병이 사망했고 그 직후 모든 훈련은 중단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중대장 신원식과 함께 있었던 무전병 ㄱ씨 역시 사건 발생 직전 신원식의 박격포 발사 명령을 옆에서 들었다고 증언했다. 증인은 더 많다. 화기소대장 역시 사거리를 알려주지 않는 신원식의 명령에 따라 박격포 발사를 포대장에게 전달했고 포반장이 박격포를 쐈다고 했다. 화기소대장은 그 죄책감으로 평생이 괴로웠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증언을 최소한 7명 이상이 하고 있다. 사건 당시 박격포 발사가 이뤄졌음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신원식은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2024년 어렵게 그때 숨진 이등병의 아버지를 찾아서 만났다. 아버지는 어느덧 80대 후반의 노인이 돼 있었다. 아버지는 사건 전말을 전해 듣고 말했다. 관 속의 아들을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던 아내가 4년 전인 2020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그때 아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장남이 자살한 것으로 알고 세상을 떠났다고. 대대장의 말처럼 "아들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떠났다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쓸쓸히 말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이등병의 죽음.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알리고자 노력해 온 이들을 향해 당시 중대장 신원식은 고소를 남발했지만 2025년 초에 전부 '무혐의'로 종결됐다. 윤석열이 대통령 직위에서 파면되는 시기의 전후였다.
하지만 신원식을 처벌하고자 제기한 '무고 혐의' 맞고소 역시 경찰은 무혐의 처분했다. 도대체 왜 그가 무혐의인지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이 죽었는데, 훈련 중 이등병이 사망했는데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시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40주기 추모, 책임자는 반드시 밝혀져야

▲사건 제보자 조평훈(사건 발생 당시 부대 병장)과 이승남 이등병의 묘비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에 사건을 진정한 조평훈씨가 진상규명 결정문을 가지고 이승남 이등병의 묘에 참배하고 있다 ⓒ 조평훈
스무 살 나이에 의무복무를 위해 입대했던 고 이승남 이등병. 그는 입대 후 고작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사고가 일어나기 3시간 전, 그는 점심 시간에 신병 3명과 함께 불려 나가 고참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입대 전 음악 다방 디제잉를 했다는 그는 노래를 잘 불러 혼자만 3곡을 더 불렀다고 동료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제대 후 가수가 됐을지도 모를 청춘. 그 꿈 많았던 청년이 세상을 떠난 지 오늘로 꼭 40년이 되는 지금, 나는 국가와 국방부를 대신해서 사과하고 싶었다. 30년 가까이 군인권 운동을 해 온 사람으로서 이등병의 사인 진실을 지켜주지 못하는 현실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고 싶다. 그렇기에 남은 진실을 반드시 밝혀 그의 다 풀지 못한 억울함을 위로하리라 약속한다.
진실은 40년이 아니라 '수백 년이 지나도 밝혀져야' 그것이 올바른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등병의 40주기, 그의 죽음을 추모한다.
[관련기사]
나는 왜 국방부 장관에게 고소당했나 https://omn.kr/265h6
[단독] 신원식 중대장 시절 '부대원 사망' 조작 결론 https://omn.kr/25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