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사진은 1980년 1월 23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항소심 2차 공판 당시 사진. ⓒ 연합뉴스
한말 의병장 이강년 선생을 필두로 수많은 의병, 기미년 3·1혁명기에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 해방 후 조봉암 선생 등 수많은 민족·민주인사들의 생명을 빼앗거나 옥고를 치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민족의 수난과 겨레의 양심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김재규 장군은 1980년 5월 24일 오전 7시, "나는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고 갑니다. 나의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직 청청한 나이의 쉰 네 살, 10·26거사를 통해 유신독재자를 제거한 지 6개월 28일 만이다. 이날은 유신독재자의 충직한 후계자 전두환 반란군이 광주에서 민주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던 때였다.
그로부터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미국의 인권운동가이자 목사인 마틴 루터 킹은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비명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라고 말했다. 유신의 심장을 멈추게 하여 민주화의 숨통을 트고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은 '10·26거사'는 독재자의 죽음으로만 인식될 뿐, 거사의 의미와 그 주역은 여전히 '내란목적살인'의 멍에를 벗지 못한 채이다.
유신의 후예들은 '산업화의 아버지', '조국근대화의 선구자'로 추앙하고, 그의 동상을 세웠다. 반면 김재규에 대해서는 '배신자', '테러리스트'등의 욕설이 따른다.
유신독재자의 아류들이 지배하는 사법의 3심보다 역사의 심판인 4심을 믿고, 기꺼이 모든 기득권과 개인적인 인연과 심지어 생명까지 내걸면서 거사에 나섰던 '10·26정신'은 45년의 풍상에도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했다. 알제리아 전쟁이 한참일 때 신학교수 카잘리스는 "폭력에는 자유케하는 폭력과 속박하는 폭력이 있다"고 선언했다. 이에 서구 대표급의 지성인 뒤베르제·도메나 등이 동조했다. 예를 들어, "알제리아전쟁동안 민족해방전선은 프랑스의 식민지 해방운동에서부터 인민을 해방시키는 폭력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폭력은 정죄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 특수한 폭력은 묵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왜곡된 과거사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면서 10.26사건에 대한 유족의 재심이 받아들였다. 재심청구 5년 만이다. "계엄사령부 수사관들이 김재규를 수사하여 수일간 구타와 전기고문 등을 한 점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이유다.
재심사건의 김재규 측 법률대리인들은 "10.26은 내란목적살인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유신체제의 핵심인 박정희를 희생시킬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과 동양의 평화와 국민들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가톨릭신자의 신분으로 일제 침략세력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폭력'을 행사했다. 이를 두고 아직도 일본 일각에서는 암살자·테러리스트 운운한다. 이토의 행위는 '속박하는 폭력'이고 안 의사가 이토를 처단한 것은 '자유케 하는 폭력'이었다.
신라의 고승 원효 대사는 '일살십활론(一殺十活論)'을 폈다. 대사가 길을 가는데 큰 독사가 까치새끼 10마리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대사는 거침없이 지팡이로 독사를 내리쳤다. 제자가 '불살생'의 계율을 물으니 "한 마리 독사를 죽임으로써 열 마리의 죄없는 까치새끼를 살리는 것이 참 불법의 가르침"이라 답했다.
독일 나치시대의 목사 디트로히 본 회퍼는 독일과 유럽 나아가서는 세계평화를 유린하는 히틀러의 제거에 나셨다가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그는 말한다.
"미친 운전사에 희생된 사람의 장례를 치르는 일보다 먼저 미친 운전자로부터 핸들을 빼앗는 것이 진정한 목사의 직분이다."

▲1979년 11월 7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권총을 든 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 80보도사진연감 <한겨레21>
유신독재자의 최측근 차지철이 부마민중항쟁을 보고 "캄보디아에서는 200~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도 반정부 폭도를 그렇게 처단하면 조용해진다"고 했다. 10·26 거사가 아니었으면 이것은 '실제상황'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1980년 5월 광주 이전에 부산이나 서울 또는 다른 지역에서 엄청난 사태가 벌어졌을 지 모른다. 또한 유신체제는 더 연장되고, 민주주의는 고사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독재자 푸틴 러시아 군대의 우크라이나 시민 살상극을 지켜보고 있다.
김재규 장군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제거" 함으로써 엄청난 국민의 유혈참사를 막았다. 본인은 '야수의 심장'이라고 표현을 했으나 실제는 '민주혁명'의 거사였다는 주장이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이토의 심장을 제거한 안중근의 의거와, 대한민국의 정체인 민주공화제를 짓밟은 유신독재자의 심장을 멈추게 한 거사는 격과 결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서양에서는 폭군방벌론이 민주주의의 기본철학으로 되고, 동양에서는 2천년도 더 지난 시기에 맹자의 폭군방벌사상이 나타났다.
"인(仁)과 의(義)를 해치는 자는 이미 군주가 아니라 일개 야인과 다를 바가 없다. 일개 야인인 걸과 주를 죽였다는 말을 들었지만 군주를 반역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김재규 장군의 10·26 거사는 이런 맥락에서 시민저항권사상의 발현이라는 주장이다.
2020년 5월 JTBC가 〈10·26재판 당시 김재규 육성〉을 통해 육성 테이프 53개를 공개했다. 핵심 내용은 군사재판이 법관들의 '법과 양심'에 따라 진행된 것이 아니라, 전두환의 군부실세들이 '쪽지'를 통해 재판에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유족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재판부는 늦장을 부렸다.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김재규는 79년 12월 18일 고등군법회의 법정에서 변호인들과 가족대표 4명만이 방청한 가운데 최후진술을 하였다. '10·26거사'에 관한 장시간의 진술 중 중요한 부분이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혈맹우방으로서의 관계를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 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것 입니다. 다섯 번째는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전두환 신군부의 엄청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김재규를 변론했던 강신옥 변호사의 '10·26 재평가론'이다.
김재규는 "3심 재판에서는 졌지만 4심인 역사의 법정에서는 이길 것"이라고 말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우리는 역사와 진실 앞에 더 솔직해야 한다. 그에게 민주회복의 공로를 인정하고 그의 죽음 앞에 겸허해야 한다. 12·12와 5·17 단죄로 시작된 '역사 바로세우기'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그 시발이 됐던 김재규 사건의 재조명을 빼놓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두환에 대해 광주시민 학살 등 내란 행위를 추궁하면서 김재규 문제에 대해 아무런 역사의 검증과 조치가 없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