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주민들이 시위하고 있다. 당시 차량에 탄 청년들은 "청와대로 가자"고 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건 이후 광주대단지는 가난과 폭동의 도시로 세간에 알려지게 됐으며 수도권특수선교위원회는 이해학 전도사를 광주대단지에 파송했다. ⓒ 미상
지난 6월 2일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대선 마지막 기자회견을 성남 주민교회에서 진행했다. 유력 후보로서 대통령 당선을 목전에 둔 이 후보가 22일 간의 선거운동 마지막 여정으로 주민교회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민교회 원로목사이자 성남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이해학 목사를 만났다.
수도권특수선교위원회, 광주대단지에 이해학 전도사 파송
이해학은 한신대 재학중이던 1973년 1월 수도권특수선교위원회 제안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위치한 광주대단지에 파송됐다. '광주대단지'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1960~1970년대 한국의 도시화 과정에서 탄생한 국가 주도의 도시빈민 이주정착지이자 1971년 8월 10일 박정희 정권 최대의 도시봉기인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주민 3만에서 6만 명이 참여했다고 알려진 이 사건은 정부가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6시간 만에 끝이 났다. 사건은 언론에 대서특필됐고 배가 고파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전해지게 됐다. 1973년 5월, 행정구역상 '성남시'로 승격되며 광주대단지라는 명칭은 사라졌다.
가난과 굶주림만이 가득했던 그곳에서 이해학은 아이들과 놀며 지역주민들과 관계를 맺었고, '폐품 수집 운동'으로 독서회와 공동체 활동을 시작했다. "책을 읽자" 했지만 읽을 책이 없었기에 "폐품 모아 책 살 돈을 마련하자" 한 것이 지역 자치활동의 출발이었다.
주민교회, 예배공간이자 주민 쉼터
그는 파송 2개월 뒤인 3월 1일 교인 12명으로 창립예배를 드리고 주민교회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광주대단지 사건을 통해 일회적으로 나타났던 도시빈민들의 항의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이고 지속성을 가진 도시빈민운동으로 성장해갔다. 교회는 예배 공간이자 주민들의 쉼터이자 구호활동의 중심이 됐고 철거민, 어린이, 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교회의 돌봄도 확대돼갔다.
1973년 9월 중앙정보부 불법구금, 1974년 4월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15년형 선고, 이해학 개인에 대한 국가의 탄압이 강해질수록 주민들은 더욱 단단하게 교회를 지켰고 그 과정에서 민주화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은 기독인이 아니라도 주민교회를 피난처로, 의지처로 삼게 됐다.
주민생협, 주민신협이 설립돼 주민들의 자활과 자립을 도왔고 1981년 출범한 성남YMCA는 교파를 초월한 기독청년들의 연합 플랫폼이자 성남 사회운동가들의 사랑방이 됐다. 1987년에는 박종철 추모예배 개최, 4·13 호헌조치 반대 삭발단식의 주도로 주민교회가 6·10항쟁의 출발점이 됐다. 학생들은 화염병을 만들어 교회에 쌓아뒀고 교인들은 거리로 나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성남인권위원회, 성남민주화운동연합회 설립을 주도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지역공동체운동, 생명평화운동에 앞장섰다. 1970년대 도시빈민의 생존권운동에서 1980년대 청년-노동-학생의 삼각 운동, 1990년대 통일운동과 2000년대 생명평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성남시 사회운동의 시작과 끝에는 이해학 목사와 주민교회가 있었다.
지난 9월 17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겨레살림공동체 사무실에서 이해학 목사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1974년 4월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구속되는 이해학 목사. ⓒ 이해학
가난한 자의 마을에 교회를 세우다
- 광주대단지에 도착해서 주민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습니까?
"처음 도착했을 때는 추운 겨울이라 길바닥은 갈라지고, 낙엽과 쓰레기 더미가 쌓였으며, 노동자들은 일거리를 찾지 못해 솥단지까지 팔아 연명하는 지경이었습니다. 얼굴빛은 누렇게 뜨고 굶주림이 가득했습니다. 먼저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욕하고 싸움질하던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동화를 들려주고, 널빤지로 탁구대를 만들어 같이 놀았습니다.
아이들 입에서 책을 읽고 싶다는 소리가 나오자 폐품 수집으로 도서관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아이들은 소주병을 모아 팔고, 택시 기사와 다방을 돌며 모금운동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52권의 책으로 작은 도서관이 시작됐습니다.
점차 주민들이 모이고 기도와 찬송이 이어지면서 교회 형태를 갖추게 됐습니다. 3․1절에 창립했고 이름을 '주민교회'라고 한 것도 지역 주민이 주인이 되는 교회를 만들자는 뜻이었습니다. 창립 초기에 아이들이 축구팀을 조직하고, 독후회와 글짓기 대회, 바둑·탁구 모임을 하면서 점차 청년들이 모였고, 교회의 활동 반경은 넓어져 갔습니다."
예수님이 머문 꼴찌공동체
- '꼴찌공동체'라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꼴찌들하고 놀았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시기 전 베다니 마을 마르다·마리아·나사로 남매의 가난한 집에 머물고, 위로받으며 사람들과 교제했습니다. 성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 꼴찌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피곤에 지친 사람들이 마음대로 뛰어노는 열린마당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 마당에서 꼴찌마라톤을 비롯해 꼴찌들 축제를 자주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노래하고, 춤추고, 연극하고, 구호 외치고, 말씀 명상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사에 구경꾼이 아니고 선수로, 주인공으로 뛰고 놀았습니다. 우리는 교회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남한산성에서, 경찰서 앞에서, 국정원 앞에서, 교도소 뒷산에서, 노동자투쟁 현장에서, 때로는 최루탄을 뒤집어 쓰고 눈물 흘리며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습니다."

▲주민교회는 창립일인 3월 1일 매해 3.1절 통일마라톤을 개최했다. ⓒ 이해학
예배시간에 형사들이 들어와 메모
- 감시나 탄압은 없었나요?
"교회가 주민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공간이 되자, 곧바로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감시가 시작됐습니다. 예배시간에도 형사들이 뒤에 앉아 메모를 했습니다. 교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주제가 나왔는지 일일이 기록했습니다.
특히 청년들이 모여 독서회와 토론을 하면 불온서적 여부를 따지며 압수수색을 하기도 했습니다. 주민교회는 아이들을 모아 함께 공부시키고, 부당한 철거에 항의하며 주민대책위를 꾸리는데, 이것을 '반정부 선동'으로 간주했습니다.
당시 교회 주변에는 늘 사복경찰이 배치됐고, 주민들이 드나드는 것도 감시 대상이 됐습니다. 그러나 아이들과 청년들은 이런 감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우리가 교회를 지킨다'며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주민교회는 이렇게 외부 탄압 속에서도 지역 주민들의 신뢰를 얻어갔습니다."
성남 민주화운동의 산실 되다
- 성남시에서 주민교회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주민교회는 단지 종교적 거점이 아니라, 성남이라는 신도시의 태생적 모순에 맞서는 사회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야학을 운영하고, 일용노동자와 노점상을 조직하고 직업상담소을 운영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주민교회는 자연스럽게 성남 민주화운동의 산실이 됐습니다.
교회 내부에서는 예배와 기도를 이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민과 함께 거리 집회를 준비하고, 구청에 진정서를 내고, 법정 싸움에도 나섰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다'는 원칙이 분명했기에, 교회의 이름 그대로 주민과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주민교회는 이후 성남에서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됐고, 훗날 여러 열사와 청년 지도자들이 이 교회를 거쳐가게 됐습니다."
예배시간에 광주학살 증언, 김종태 분신
- 1980년 6월 9일, 5.18 이후 최초로 분신한 김종태 열사가 분신 결행 전 목사님께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목사님과 주민교회는 5.18광주와 관련해 어떤 역할을 했고 김종태 열사에 대한 기억은 어떠했습니까?
"1980년 5월 광주 소식은 직접 현장을 다녀온 정광훈(이후 전국농민협의회 조직), 윤기현(동화작가),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와 전했고, 예배시간에 증언하도록 했습니다. 청년들과 교인들은 큰 충격을 받는 가운데 특히 교회 청년 김종태가 그 이야기를 듣고 큰 분노와 절망을 느꼈습니다.
김종태는 제일실업학교(야간 직업학교)를 다니며 공장에서 일하던 청년 노동자였습니다. 대학생들과 노동자학습모임을 했습니다. 늘 내 서재에 와서 자고 책을 빌려다 보고 나와 토론한 탐구욕이 있고 정직하고, 싱그러운 청년이었습니다. 내가 신학교에서 목사고시를 보던 날, 아내가 창가에서 나를 부르더니 김종태가 나한테 맡긴 봉투를 건넸습니다. 그때는 이미 그가 분신을 한 뒤였습니다."
성남시에선 김종태 이후에도 많은 열사들이 나왔다. 특히 1980년 이후 현재까지 분신한 열사 수가 광주광역시보다 많다. 송광영(1985, 경원대), 최윤범(1988, 고려피혁), 김윤기(1989, 덕진양행), 천세용(1991, 경원대), 진철원(1996, 경원대), 이상희(1996, 경원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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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②] 이재명과 조국이 이해학 목사를 만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