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손글씨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학생이 괴발개발 '그린' 글씨를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어 뭐라고 적었는지 물어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천재는 대체로 악필이지만, 모든 악필이 천재는 아니다"라고 아이에게 농을 건네곤 하죠.
손글씨를 예쁘게 쓰지 못하는 것은 흠이 아니니 그렇다 치고, 요즘 아이들은 한글 맞춤법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여 '우리말 퀴즈'를 마련해 풀어보게 하였습니다. 사전에 ①스마트 기기 사용 불가 ②짝꿍과 상의 등 부정행위 금지 ③3분 안에 응답 완료 등 3가지 규칙을 지켜달라고 안내하였습니다.
우리말 퀴즈는 국립국어원 누리집의 '온라인가나다' 상담 사례, 2010년 <새국어생활>에 실린 글 '취재 기자가 가장 많이 틀리는 우리말(이재경 전 경향신문 교열팀장)' 등의 자료를 참조하였고, 표준국어대사전에 일일이 해당 낱말을 입력하는 등 확인 과정을 거쳐 만들었음을 밝힙니다.
채점 결과를 공개하기 전에 독자님들께도 '우리말 감수성'을 알아볼 기회를 드릴게요. 전체 25문항 중 학생들의 오답률이 높은 10가지를 소개합니다. 한 번 도전해 보세요. 각 문항의 끝 괄호 안에 표시된 숫자는 학생들의 정답률입니다.

▲헷갈리는 한글 맞춤법 한글날을 앞두고 고등학생들에게 우리말 퀴즈를 풀게 했더니, 입에 붙은 말과 맞춤법에 들어맞는 말이 달라 헷갈린다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 신정섭
무난하게 정답을 찾으셨나요? 아마도 긴가민가한 문항이 많았을 텐데, 평소에 입에 붙은 말이 한글 맞춤법에 들어맞는지 잘 몰라 헷갈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올바른 표현은 1~10번 문항 모두 앞에 나온 낱말입니다('놀래고', '걸맞은' 등). 물론, 학생들이 본 '우리말 퀴즈'에서는 제시어 순서를 달리하였습니다.
책을 가까이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풀었을까요. 제가 가르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 4개 학급 총 81명이 우리말 퀴즈에 답했는데요. 81명의 응답자 중 80점(25문항 중 20개) 이상은 딱 네 명(4.9%)에 불과했습니다. 평균 점수는 58.4점에 그쳤어요.
학생들은 점수를 확인하고 몹시 당황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제게 다가와 "사람을 '놀래킨다'고 하지 누가 '놀랜다'고 말해요?" 이렇게 따졌습니다. 저는 "입에 붙은 말이 그렇게 무서운 거란다"라고 말했습니다. 표본이 워낙 작아서 성급하게 일반화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쯤 되면 우리 아이들의 말글살이가 걱정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추석 명절 인사 펼침막 대전시 서구 내동네거리에 국회의원, 구청장, 구의원의 이름이 새겨진 ‘행복한(풍성한) 한가위 기원’ 펼침막이 내걸려 있습니다. ⓒ 신정섭
어른들은 다를까요? 대체로 글을 읽거나 쓸 기회가 적으니 점수가 더 낮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정치인들이 내건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펼침막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보내세요' 또는 '쇠세요'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죠. 어떻게 생략된 주어인 '당신'이 행복한 한가위가 "된다"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 돼 국립국어원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문의하신 내용은 개인의 언어적 직관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가능성이 있어 명확한 답변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라면서도, "다만, '되다'의 구조상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와 같은 표현을 쓰는 것보다는 말씀하신 대로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라는 답변이 올라왔습니다. 비문(非文)이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어문 규정에는 맞지 않는 어색한 화법이라는 뜻입니다.
별걸 다 트집 잡는다고 여기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솔직히, 달걀의 개수를 '갯수'라고 잘못 쓴다고 해서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한글 프로그램으로 문서를 작성할 때 '맞춤법 도우미'를 켜놓으면 잘못 쓴 낱말이나 띄어쓰기를 자동으로 고쳐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거나, 또는 입말로는 '놀래키고'라고 해도 글말로는 '놀래고'라고 쓰면 될 일이니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언어는 지켜내야 할 '민족의 얼'
하지만, 입말은 흘러가고 글말은 오래 남습니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맞춤법을 제대로 모르거나, 혹은 컴퓨터에 의존하는 글살이에 익숙해지면 우리 민족 고유의 언어인 한글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주시경 선생은 "언어와 민족과 국가는 겉으로는 셋이나 속으로는 하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억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민족의 '얼'을 유지하는 방법으로는 모국어의 보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어와 영어를 비교해 보면 맛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위에 언급한 마지막 문장, "그분은 말씀하시는 품이 천생 선생이에요"를 영어로 옮기면, "The way he speaks shows he's a born teacher" 정도가 될 텐데요. 우리말에 비해 영어 표현은 무미건조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영어에는 존칭이 없고, '품'에 꼭 들어맞는 표현도 마땅치 않으며, 'born'이란 단어가 '천생'의 맛을 살리지도 못하니까요. 이렇게 맛이 풍부한 한글을 홀대해서야 되겠습니까.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는 "언어는 존재의 집(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이라고 말했습니다.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로 여기지 않고, 존재가 드러나고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근본적인 공간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한글이 오염되고 순우리말이 사라지면 한국인이라는 민족의 정체성도 위협받지 않을까요.
한글날 '기념'에 그쳐선 안 돼
한글날은 대한민국의 5대 국경일입니다. 정부는 올해도 어김없이 제579돌 한글날 기념식을 개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는 '2025 한글 한마당' 행사를 엽니다. 각 지방자치단체와 교육청 등에서도 축제와 연계하거나 공모전을 개최하는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일회성 행사에 그쳐 아쉽습니다. 사람들은 한글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대신, 긴 추석 연휴 중 하루로 인식하기 일쑤입니다.
더 늦기 전에, 국가적 차원에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국어기본법 제6조에 따라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하여 5년마다 '국어 발전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만, 피부에 와 닿는 실질적 대책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학술적인 연구도 중요하지만, 해마다 학생과 성인의 문해력이 어느 정도인지 체계적으로 평가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수조사가 어렵다면 표본조사라도 벌여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문해력 향상 대책을 세우는 한편,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보존하는 방법을 찾는 구체적인 노력이 절실히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