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른 풀줄기가 맥없이 부러졌다' 전시 포스터. 한국 현대사의 국가폭력을 다룬 이번 전시는 <반헌법행위자열전> 출간을 기념해 마련됐다. ⓒ 한홍구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이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전시가 문을 열었다.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와 성공회대 민주자료관이 주최하는 <반헌법행위자열전> 출간 기념 전시 '마른 풀줄기가 맥없이 부러졌다'가 오는 17일 오후 5시 서울 온수동 스페이스99에서 개막한다.
이번 전시는 10년 넘게 준비된 <반헌법행위자열전>의 첫 출간을 맞아 기획되었다. 책 출간이 늦어져 '출간 예고전'이 되었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헌법을 유린하고 국가폭력을 자행한 가해자들의 실명을 공개하는 첫 시도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다음은 지난 12일부터 13일까지 한홍구 교수 그리고 주용성 작가와 텔레그램으로 인터뷰 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과거사 진실규명에 가해자가 없다"
전시를 기획한 한홍구 성공회대 석좌교수이자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은 개막사에서 "한국의 과거사 진실규명에는 가해자가 없다"며 이번 프로젝트의 의의를 설명했다.
"각종 보고서를 들여다보면 원자료에 뻔히 이름이 나와있는데도 국가기관의 보고서에는 대부분 OOO으로 되어있다"며 "몰라도 OOO, 알아도 OOO"라고 비판했다. 한 교수는 "내가 왜 죽었는지, 누가 나를 죽였는지에 대해 입을 다문다면 제대로 해원과 위령이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한 교수는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수많은 OOO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작업"이라며 "겨우 300명을 추렸지만, 처음에는 400명을 뽑았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 되어 100명은 풀어줬다"고 털어놓았다.
517차 회의 거쳐 완성된 10년 프로젝트

▲한홍구 교수 ⓒ 한홍구
이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자료가 부족한 가운데 '빌런 중의 빌런' 300여 명을 선별하고 이들의 반헌법행위와 일생을 정리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편찬위원회는 수십 번의 준비모임을 거쳐 매주 정례회의를 517차례나 진행했다.
한홍구 교수는 "우리의 역량이 부족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민간에서 이런 장기간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묵묵히 기다려 주신 후원자님들 덕분"이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희생자 5천 명당 가해자 1명꼴
그러나 300명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한 교수는 "민간인학살 관련자는 60여 명 밖에 안 된다"며 "민간인학살 희생자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만은 될 터인데, 희생자 5천 명당 1명꼴"이라고 설명했다. "동네 뒷산에 2~300명 끌고 가 죽인 책임자는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사회에서 국가폭력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민주주의 이행과정에서 사법적 정의는 실현되지 않은 셈이다. 한 교수는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도 그저 이름을 기록할 뿐이지 무슨 힘이 있다고 뒤늦게 처벌을 시도하겠느냐"면서도 "가해자들을 이대로 둘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 현대사는 그들을 현실의 법정에 세우지 못했지만, 이제 21세기 민주시민들은 그들을 역사의 법정에는 반드시 세워야 한다"며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주요 국가폭력 사건의 수괴와 특급 주요임무 종사자들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는 공소장"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가가 만든 '의심의 구조'를 해부하다

▲주용성 작가 ⓒ 주용성
전시를 직접 구성한 주용성 작가는 평화박물관의 국가폭력 소장자료를 중심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이번 전시는 간첩조작 사건,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일상 속 반공교육이 모두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주 작가는 "국가가 '적'을 만들어내고,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며, 다수의 국민을 의심할 수 없는 존재로 길들이려 했던 폭력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교육과 언론, 국가 행사와 사법 체계까지 총동원된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삶의 기회를 빼앗겼고, 사회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차단당했다.
전시장에는 국가가 주입시킨 반공교육과 활동 자료들이 전시된다. 이 자료들은 어린 시절부터 국민을 특정한 의식 구조 속에 가두려 했던 교육의 실체를 보여준다. 반공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도록 강요하는 도구였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정작 그 의심의 구조 자체에는 의구심을 품지 못하도록 길들여졌다.
권력이 연출한 장면들의 허상
특히 주목할 만한 자료는 과거 CIC 방첩대장 김창룡이 제작한 공안사건 사진첩이다. 권력이 사건을 연출하고 이미지를 통해 적을 구성하며 사회를 통제했던 방식이 응축된 희귀한 사료다.
한국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 관련 사진과 함께, 사건 이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이뤄진 언론보도와 희생자 유해 발굴 과정을 담은 사진도 전시된다. 땅속에서 드러난 유해와 그것을 기록한 사진은 은폐된 폭력이 어떻게 뒤늦게 나마 드러나고 기억의 언어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준다.
1960~80년대 한국사회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도 함께 전시된다. 서울올림픽, 국풍81, 광복절 기념식, 반공대회 등 국가 주도의 대규모 행사를 담은 사진들은 권력이 폭력과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어떻게 '국가적 축제'를 동원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부식되고 희미해진 잔해들

▲주용성 작가 ⓒ 주용성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화려했던 기록과 권력이 연출한 장면들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 축제와 선전의 장면뿐 아니라 간첩조작 사건이나 공안사건의 기록 사진들 역시 깨지고 열화 되어 흐릿하고 거친 입자로만 남아 있다.
주 작가는 "어쩌면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결국 부식되고 희미해진 잔해 뿐일지도 모른다"며 "그 사진의 파편들은 결국 그 허상이 남긴 공허함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말했다.
20년 만에 '추진' 딱지 떼는 평화박물관
이번 전시는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 교수는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진 지도 20년이 넘었다"며 "이번 전시는 평화박물관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붙이고 살아온 '추진'이란 말을 떼어가는 중대한 고비"라고 설명했다.
처음 평화박물관을 꿈꿀 때에 비하면 이제는 평화의 수많은 영역 중 국가폭력 문제로 전시 방향을 좁히게 되었다. 현재 온수동에 마련한 스페이스99는 국가폭력 문제만을 다루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지만,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작지만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절절한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전시공간을 꾸려 나갈 예정이다.
"미래 세대에게 남겨야 할 기억의 장치"

▲한홍구 교수 ⓒ 한홍구
주용성 작가는 "이번 전시는 단순한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직면해야 할 질문이자, 미래 세대에게 남겨야 할 기억의 장치"라고 강조했다. "억압과 은폐의 시간을 넘어, 다시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의 진실을 직시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윤석열의 계엄선포 시도로 한국사회가 다시 한번 국가폭력의 위험성을 실감하는 상황에서, 이번 전시와 <반헌법행위자열전>의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과거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전시는 10월 25일까지 스페이스99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