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르신들께 연주해줬던 정선생님샛강의 피아노는 행복입니다. ⓒ 강고운
요즘 샛강지기들에게 초미의 관심사는 피아노입니다. 과연 피아노를 지킬 수 있을지, 또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노래하며 어울릴 수 있을지, 걱정하느라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유명해진 문장들입니다. 1980년 5월 광주라는 국가폭력을 알게 되면서 한강의 마음 속에 맴돌던 문장들이죠. 12.3 계엄을 막아내고 민주주의를 지킨 국민들을 보면 확실히 과거가 현재를 도왔습니다. 저는 요즘 이 문장을 빗대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피아노가 샛강을 구할 수 있을까?
피아노가 수달을 도울 수 있을까?
샛강에 흐르는 피아노
낡은 피아노 한 대가 샛강에 오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샛강에서 종종 자원봉사를 하는 여의도 주민께서 아들이 쓰던 피아노를 샛강에 기증하고 싶은데 필요하겠냐고 물었습니다. 2년 전의 일입니다. 샛강센터 로비에 두면 오가는 이들이 치기도 하고 쓸모가 있겠다 싶어 받기로 합니다. 한동안 피아노는 그냥 풍경처럼 놓여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샛강센터에 와서 매일같이 쉬고 가는 할머니 두 분이 있었습니다. 좀더 연로하신 분을 위해서는 요양보호사로 보이는 분이 동행합니다. 하루는 인근에 사시는 정 선생님이 오셔서 피아노를 쳤습니다. 짧은 연주를 마치자 어르신들이 박수를 짝짝 칩니다. 이어 할머니 한 분이 아리랑을 쳐줄 수 있는지 묻습니다. 금새 아리랑 연주에 맞춰 노래가 울려퍼지고, 이내 옛 노래들이 정겹게 이어집니다.
주말이면 곧잘 피아노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때로는 봉사자들을 위하여, 때로는 인문학 강의에 참여한 시민들을 위하여, 때로는 그냥 놀러온 시민들을 위하여 즉석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한 번은 어디선가 젊은 여성이 홀연히 나타나 한참 연주를 하다 가기도 했습니다. 워낙 실력이 뛰어나 어떻게 왔냐고 물으니, 블로그에서 이곳에 오면 피아노를 칠 수 있다고 보게 되어 왔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찾아오기도 하는구나 싶어 신기했습니다.
낡은 피아노 한 대는 마술처럼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피아노의 강'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샛강의 자연 속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하기도 하고,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올 봄에는 새로이 '여울소리'라는 합창단도 만들어졌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중년의 친구들이, 동네 주민들이 스스럼없이 모여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룹니다.
시민도, 피아노도 나가라는 서울시

▲서울시 미래한강본부 공고문여의샛강생태체험관 공고문 ⓒ 강고운
지난 3월 서울시는 샛강 한강 생태공원 운영권을 기존 민간 위탁업체 대신 신규 위탁업체에 넘겼습니다. 서울시 미래한강본부와 신규 위탁업체는 줄곧 일관된 입장입니다. 시민들도 나가고 물건들도 치우라는 겁니다.
샛강에서 활동해온 시민들은 위탁업체가 바뀌는 과정에서 샛강이 망가지고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하여 자발적으로 여러 모임들을 꾸리고 생태 및 인문 프로그램들을 활발히 운영했습니다. 6월에 샛강시민위원회를 결성하고 330명이 넘는 회원들이 자원봉사를 하거나 생태모니터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합창 모임 여울소리, 기악 앙상블 동감, 샛강숲길을걷는사람들, 재봉틀 모임 드르륵 짠, 문학의 숲, 여의도 생태가드닝 같은 모임들이 매일같이 재미있는 활동을 하다 보니 지역 주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나와서 참여하지요.
그런데 이런 활동이 서울시나 위탁업체에게는 혼란스러운가 봅니다. 위탁업체의 정규 활동이 없는 시간대에만 한다거나, 비어 있는 공간에서 하겠다거나, 같이 협조하여 활동하겠다거나, 시민들이 쓰는 물품을 전부 기증하겠다거나 해도 요지부동입니다. 일단 다 나가고 물건을 치운 다음 가을께 공모를 할 테니 그 때 공모와 대관 절차를 통해 들어오라고 합니다.
공모지원비도 필요 없고, 공모를 통과하리란 보장도 없고, 공모서류를 꾸미거나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중장년이나 노인들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그냥 지금처럼 비어 있는 공간에서 활동만 하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서울시는 8월 18일 안전공사를 이유로 샛강센터를 폐쇄합니다. 그리고 지난 28일에 '공유재산 (여의도샛강생태체험관) 내 물품 처리 및 반출(회수) 공고'문을 붙였습니다. 이제 샛강시민위원회 샛강지기들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피아노를 기한 내 반출하지 않으면 서울시는 폐기할까? 피아노를 지금처럼 그대로 두면 안 되는 것일까? 피아노를 기증할 테니 일정 시간에만이라도 쓰게 해달라고 할 수는 없을까?
피아노가 샛강을 구할 수 있을까?

▲드르륵 짠재봉틀로 줍깅백 만들기 ⓒ 김명숙
샛강의 피아노는 단순한 피아노가 아닙니다. 그동안 동네 주민들에게, 오가는 시민들에게, 자원봉사자들에게 행복을 선물했지요. 한여름이나 한겨울 힘들게 생태봉사를 한 청년들에게 헌정 연주를 해줬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게 고마운지 또 봉사하러 옵니다. 그들의 수고를 알아주니까요.
피아노는 샛강의 자연을 지키는 사람들과 위로가 필요한 이웃들에게 건네는 선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연주에 맞춰 함께 노래하며 샛강을 사랑하는 마음이 싹텄습니다. 샛강에 피아노도 없고 노래도 없고 시민들도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서울시 미래한강본부나 위탁업체가 바라는 대로 '생태프로그램 체험자'들만 온다면 어떨까요?
수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의 손길로 생태교란종과 쓰레기를 치워 가꾼 샛강숲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이 탐조를 하고, 발달장애인들이 탐방로에 꽃을 심고, 아이들이 모내기를 하는 곳이었죠. 시민들은 샛강을 즐기거나 체험하는 수혜자만이 아니라 수달을 지켜주고 새집을 지어주며 자연을 지키는 기여자였습니다. 그들을 끈끈한 정으로 연결하고 환대하는 문화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이 피아노가 시민들과 함께 쫓겨나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요? 피아노가 남아 샛강을 구해줄 수는 없을까요? 시민의 간청을 외면하고 피아노가 들려주는 노래를 듣지 않으려는 공무원들이 갑갑합니다.

▲고운과 세연 그리고 피아노피아노는 행복입니다. ⓒ 김명숙

▲피아노의 강 연주회샛강시민들이 만든 연주회 ⓒ 강고운

▲여울소리 참여자들피아노가 있는 샛강 ⓒ 강고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뉴스레터 한강편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