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송정역 전경. 송정역은 사람과 물류가 모이는 광주의 가온누리다. 1980년 당시에도 그랬고, 고속열차가 다니는 지금도 매한가지다. ⓒ 이돈삼
역은 만나고 헤어지는 공간이었다. 만난 사람들은 반가움을 나눴다. 떠나고, 떠나 보내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달랬다. 사람들이 모이는 역은 늘 북새통이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분주하고, 물건 파는 행상의 목소리도 컸다. 열차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도 끊이지 않았다.
역 광장은 집회장으로 맞춤이었다. 선거 때면 유세장으로 활용됐다. 오가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 역광장에서 군악대 연주가 펼쳐지기도 했다. 높은 사람이 방문하는 날이었다. 전국대회 우승컵을 들고 오는 운동선수단 환영식도 역광장에서 열렸다.
남도의 가온누리, 광주송정역

▲광주와 송정을 잇는 광-송간 도로. 광주와 송정리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생활권이다. ⓒ 이돈삼

▲광주송정역. 예나 지금이나 사람과 물류가 모이는 빛고을 광주의 가온누리다. ⓒ 이돈삼
송정리역은 1913년 호남선 개통과 궤를 같이한다. 광주의 관문이었다. 광주에서 서울로 가려면, 송정리역에서 기차를 갈아탔다. 1977년까지 그랬다. 광주와 송정리를 잇는 '광-송'간 도로가 뚫린 이유다. 1922년 광주역이 생긴 뒤에도 그랬다. 송정리와 광주는 같은 생활권이었다. 시내버스도 수시로 오갔다.
남도 사람들 애환이 송정리역에 많이 서려 있다. 저마다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송정리역은 사람과 물류가 모이는 남도의 가온누리였다. 고속 열차가 다니는 지금도 매한가지다. 소재지가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광주광역시 광산구로, 역이름이 송정리역에서 '광주송정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난 20일, 역 일대를 찾았다.

▲열차 대기 승객을 대상으로 한 1913송정역시장. 광주송정역 앞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광주공항 앞 도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가로수로 줄지어 서 있다. ⓒ 이돈삼
1980년 5월 21일 새벽, 20사단 61연대가 송정리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광주와 목포로 가는 열차는 그날 밤부터 멈췄다. 하행선은 전북 이리까지만 운행됐다.
오후 1시, 비무장 시민을 향한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살상이 자행됐다. 송정리역 앞에 나타난 시위대가 광주 참상을 알렸다. 시위대는 광주 인근 시군의 예비군 무기고를 찾아 무장을 시작했다. 도심에서 변두리로 물러난 계엄군은 광주 봉쇄 작전에 들어갔다.
5월 22일, 시민들이 송정리역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전날 밤, 광주-남평 간 도로가 계엄군에 의해 차단돼 광주로 들어가지 못한 시위대였다. 광산, 나주, 함평, 영광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표정은 무거웠다. 시민들은 계엄군 만행을 성토하며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총을 쏘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시위대가 광주로 방향을 틀었다. 광주공항 앞에서 계엄군이 가로막았다. 앞줄의 시민이 계엄군 설득에 나섰다. 계엄군 요구를 수용한 일부 시민이 차량과 총기를 반납하고 저지선을 통과했다. 시위 차량은 무기를 들고 광주로 들어가겠다며 대열에서 벗어났다. 시위 차량은 비아, 나주 방면으로 향했다. 당시 송정리에서 광주로 들어가는 길은 광-송간 도로 뿐이었다. 아니면, 농로나 강변길을 이용해야 했다. 시위대가 줄어들자, 탱크와 장갑차가 움직였다. 계엄군은 송정리 일대에서 위력 시위를 하며 시민을 해산시켰다.

▲공군전투비행단. 80년 5월 계엄사의 비밀 지휘본부로 쓰인 곳이다. ⓒ 이돈삼

▲광주공항. 지금도 제1전투비행단의 군공항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군공항 이전 문제가 광주시의 현안이 된 지 오래다. ⓒ 이돈삼
송정리역 가까이 있던 공군전투비행단은 계엄사의 비밀 지휘본부로 쓰였다. 공식 계엄분소는 상무대에 설치됐다. 공군비행장은 광주로 내려오는 계엄군의 전진기지였다. 공군비행단은 20사단과 특전사가 머무는 숙영지로도 활용됐다. 정호용 공수특전단장이 상주하며 지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21일 헬기를 타고 내려왔다는 증언도 있다. 광주공항은 지금도 제1전투비행단의 군공항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5.18 당시 여성들이 갇힌 옛 광산경찰서 자리. 광산경찰서는 2005년 옮겨가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다. ⓒ 이돈삼

▲80년 5월 가두방송을 하고 광산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전옥주 묘. 국립 5.18민주묘지에 있다. ⓒ 이돈삼
광산경찰서는 5.18기간 계엄군에 붙잡힌 여성 30여 명이 갇힌 곳이다. 이들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상무대 헌병대를 오가며 조사 받았다. 조아라, 전옥주, 이애신, 정현애, 차명숙, 박영순, 김선옥 등이 그들이다. 구금과 수사 과정에서 갖은 폭력과 고문이 자행됐다.
"저는 매일 누워서 살았어요. 하혈을 하니까. 척추를 맞아가지고, 제가 하혈을 1년간 했습니다. 경찰 한 분이 나를 데리고 양민의원에 통근 치료를 했습니다. 아침 10시면 나를 지프차로 데리고 가갖고 치료를 하면은, 우리 어머니는 자식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치료비 계산하고. 나를 다시 광산경찰서로 데려가고, 오후 되면 데리고 나와서 조서를 받고 했죠."
광산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고 전옥주 씨의 생전 증언이다. 증언은 '그녀들의 가슴에 묻어둔 5.18이야기'를 부제로 한 <광주, 여성>에 실려있다. 광산경찰서는 2005년 운수동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엔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장성과 광주 중간지점에 자리한 비아 시가지. 비아는 80년 당시 광주 취재를 위해 온 외신기자들이 목숨 걸고 지난 길이다. ⓒ 이돈삼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비아-광주 간 도로도 시위대가 많이 오갔다. 계엄군의 광주 외곽 봉쇄로 남평과 송정리 방면에서 광주로 들어가지 못한 시위대의 우회로였다. 비아는 광주 취재를 위해 온 외신기자들이 목숨 걸고 지난 길이기도 하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알려진 독일인 위르겐 힌츠페터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광산군 동곡면 하산교는 나주에서 광주로 가던 시위대가 참변을 당한 곳이다. 차량이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추락해 김영두 등 2명이 숨졌다.

▲윤상원이 나고 자란 생가.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마을에 있다. ⓒ 이돈삼

▲윤상원과 박기순 묘.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다. ⓒ 이돈삼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에 윤상원 생가도 있다. 윤상원은 시민군(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을 지냈다. 윤상원은 5월 26일 브래들리 마틴, 테리 앤더슨 등 내외신 기자 10여 명 앞에 섰다.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탱크를 동원해 진압하겠다면 우리는 어차피 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강경 진압이 오늘의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1982년 2월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망월묘역에서 열렸다. 윤상원은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총격에, 박기순은 1978년 12월 26일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가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민국을 만든 노래들’ 특별전. 광복 80주년과 5.18민주화운동 45주년 기획전이다. ⓒ 이돈삼
천동마을에 윤상원기념관도 있다. 기념관에선 <민국(民國)을 만든 노래들>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기념관으로 가는 길이 '윤상원민주로'와 '윤상원길'로 이름 붙여졌다. '윤상원민주로'는 진곡 교차로에서 임곡동 행정복지센터까지 5.7km에 이른다. '윤상원길'은 천동마을길 329m를 일컫는다.
광주광역시 광산구는 송정리역과 광산경찰서 옛터의 5.18사적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광주시 내에는 옛 전남도청과 민주광장 등 동구 15곳을 비롯 서구 6곳, 북구 5곳, 남구 3곳 등 모두 29곳(32개 지점)이 5·18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윤상원 열사를 기리는 윤상원기념관. 열사의 태 자리인 광산구 천동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매일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