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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보고, 직접 걸으며 만난 문화유산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 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번지
§ 국가유산: 사적 경기전 / 국보 조선 태조 어진(御眞, 임금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나 사진) / 보물 경기전 정전 / 보물 조경묘 정묘 등
§ 탐방일: 2025년 8월 1일

 경기전으로 모여드는 세계 각국의 발걸음
경기전으로 모여드는 세계 각국의 발걸음 ⓒ 박배민

아흔의 외할머니는 더는 홀로 걸을 수 없어 보행기에 몸을 의지하신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힘들다는 말은 없었다. 묵묵히 따라오시는 모습에서, 나는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 새삼 깨닫곤 한다. 할머니의 육신은 예전 같지 않지만, 기운 만큼은 나 못지 않다.

 외부에서 경기전 내부를 들여다 본 모습. 시야가 홍살문을 넘어 정전까지 가닿는다.
외부에서 경기전 내부를 들여다 본 모습. 시야가 홍살문을 넘어 정전까지 가닿는다. ⓒ 박배민

할머니는 전라도 함평 들판에서 젊은 날을 보내고, 지금은 광주에서 지내신다. 그런데도 아직 전주 땅을 밟아본 적은 없다. 광주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닿을 거리인데도, 조선의 뿌리가 숨 쉬는 도시이자 한옥마을과 경기전으로 이름난 그곳을 한 번도 찾지 못하셨다.

 매표소를 지나 경기전 외신문으로 향하는 탐방객
매표소를 지나 경기전 외신문으로 향하는 탐방객 ⓒ 박배민

휴가가 다가오자 우리 가족은 마음을 모았다. 어머니와 삼촌, 사촌 누나와 동생, 이모까지 온 가족이 함께 전주로 향했다. 가족 중 누군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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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은 경기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전주에 있는 거지?"

순간 피식 웃고 말았다. 얼핏 그럴 듯한 질문이다. 이 답은 글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하자.

뜻밖의 낮춤 계단

차를 대고 경기전으로 걸어가다 보면 사실 경기전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붉은 벽돌로 지은 전동성당이다. 수직을 향해 솟아오르는 서양식 성당과, 수평으로 길게 뻗은 한옥의 경기전은 마주 보며 묘한 조화를 이룬다.

 현재 경기전의 정문이자 매표소. '신분을 떠나 이 곳에서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가 보인다. 사실 필자는 하마비보다 정문 앞에 자리 잡은 나무를 베지 않았음에 더 눈길이 갔다.
현재 경기전의 정문이자 매표소. '신분을 떠나 이 곳에서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가 보인다. 사실 필자는 하마비보다 정문 앞에 자리 잡은 나무를 베지 않았음에 더 눈길이 갔다. ⓒ 박배민

매표소를 지나 홍살문 앞에 섰을 때, 조금 의아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을 몇 칸 내려가야 홍살문을 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 진전(眞殿)이나 사당은 그 격을 높이려는 듯 계단을 오르게 마련인데, 이곳은 오히려 반대로 내려가야 했다.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흔치 않은 경우라 낯설었지만,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경기전 내부에서 출입문을 바라 본 모습. 문 너머가 외부다. 즉, 출입문을 지나서 태조 이성계 어진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계단을 5칸 내려와야 한다.
경기전 내부에서 출입문을 바라 본 모습. 문 너머가 외부다. 즉, 출입문을 지나서 태조 이성계 어진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계단을 5칸 내려와야 한다. ⓒ 박배민

후에 알아 보니, 주변 개발 과정에서 이런 현상이 생긴 듯하다. 경기전이 자리한 지표의 높이는 그대로지만, 한옥마을 일대가 도로를 덮거나 터를 다지는 과정에서 주변 지표가 점점 높아진 것이다. 실제로 1920년에 작성된 <경기전의(慶基殿儀)>를 보면, 당시에는 정전 앞에 내신문과 외신문까지만 있었고, 가장 바깥 담장은 외신문과 바로 이어져 있었다. 현재 매표소로 활용되는 정문과 담장은 현대에 와서 새로 세워진 구조물인 것이다.

 1920년대 기록에는 현재 우리가 정문(매표소)으로 사용하는 건물 자체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1920년대 기록에는 현재 우리가 정문(매표소)으로 사용하는 건물 자체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 디지털장서각 캡쳐 후 디자인 작업(박배민)

외신문을 지나 내신문, 정전에 이르기까지, 내 시선은 다름 아닌 처마 밑으로 향했다. 건물의 수평부재 전체에 화려한 무늬가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를 단청 종류 중에서도 '금단청'이라 부른다. 쉽게 말해, 건물 부재에 여백 없이 문양을 가득 채워 그리는 채색 방식이다. 녹색 계열 안료가 유독 많이 사용되어, 건축물이 주변 나무들과 하나처럼 어우려져 보였다.

 내신문 부재에 가득 채워진 금모로 단청.
내신문 부재에 가득 채워진 금모로 단청. ⓒ 박배민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출입문과 태조 어진이 모셔진 정전의 단청은 화려한 금단청이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낮은 모로단청이었다. 부재의 한가운데는 비워 두고, 양끝에만 화려한 무늬를 넣은 것. 그게 바로 모로단청이다. 왜 그랬을까? 아마 정전에서 가장 돋보여야 할 것은 단청이 아니라 어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단청의 격을 낮춰 그림의 위엄을 살린 게 아닐까 싶다.

 창덕궁 인정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모로단청
창덕궁 인정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모로단청 ⓒ 세종학당재단(공공누리, 박배민 가공)

검소 속의 위엄

내신문 문턱을 넘자 정전이 눈앞에 나타났다. 생각보다 소박했다. 담장은 높지 않았고, 건물도 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답답하다는 느낌보다는 포근하게 감싸는 기운이 먼저 다가왔다. 어쩐지 창덕궁 선원전이 떠올랐다.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은 'T'자형으로 정자각과 닮아 있었고, 지붕은 단정한 맞배지붕이었다. 지붕 아래 비취빛 단청이 둘러져 있어 어둡게 가라앉을 법한 공간이 오히려 환하고 단정하게 느껴졌다. 전주의 한옥 지붕들 사이에서 이 정전은 화려함보다는 절제와 검소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선이 추구한 유교적 가치를 이 작은 건물에서 느낄 수 있었다.

 진전. 바라 본 것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진입해, 왼쪽으로 퇴장한다.
진전. 바라 본 것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진입해, 왼쪽으로 퇴장한다. ⓒ 박배민

내신문에서 정전으로 이어진 일직선 길은 전돌로 곱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은 참배객을 위한 신도(神道)라서 일반 관람객은 걸을 수 없었다. 우리는 대신 오른쪽 길로 들어가 정전을 둘러본 뒤 왼쪽 길로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마치 조선의 왕릉에서 참배 동선을 따라 걷는 것과 닮아 있었다.

경기전은 태조의 어진이 처음 봉안된 1410년에 세워졌다. 당시 이름은 '어용전(御容殿)'. 세월이 흘러 세종 24년(1442), 전주의 땅이 조선 왕실의 본향이라는 이유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기전(慶基殿)', 말 그대로 '경사스러운 터가 마련된 집'이라는 뜻이다. 정전 앞에 서니, 왜 이곳이 그런 이름을 얻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정전 속 태조 이성계 어진. 본 어진은 1999년 권오창 화백이 모사했다.
정전 속 태조 이성계 어진. 본 어진은 1999년 권오창 화백이 모사했다. ⓒ 박배민

정전 안으로 시선을 들이밀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역시 태조의 어진이었지만, 그 주변도 찬찬히 살펴보고 싶었다. 어진은 감실 안에 모셔져 있었고, 그 감실은 단단한 돌 기단 위에 놓여 있었다. 양옆에는 완자무늬 창호가 대칭을 이루고 있었고, 그 앞에는 가칠한 나무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마 제향 때 향이나 제기를 올리던 자리였을 것이다. 탁자 옆으로는 무인을 상징하는 큰 칼 두 자루가 꼿꼿이 세워져 있어, 창업 군주의 위엄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감실을 떠받치고 있는 돌 기단. 최소한으로 조각하고, 잡다하게 장식하지 않았다.
감실을 떠받치고 있는 돌 기단. 최소한으로 조각하고, 잡다하게 장식하지 않았다. ⓒ 박배민

어진은 성인 남성보다도 커보였다. 태조는 짙푸른 곤룡포를 입고 앉아 있었고, 가슴에는 황금 오조룡(五爪龍)이 수놓인 흉배가 놓여 있었다. 용은 오직 조선 국왕만이 쓸 수 있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사극을 즐겨 보던 독자라면 아마 눈길이 멈췄을 것이다. 곤룡포라면 붉은색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어진 속 태조의 곤룡포는 진청색이다. 왜일까? 해답은은 <숙종실록>(숙종 14년)에 남아 있다.

 경기전 내 어진박물관에 있는 태조 어진 모사본 (2011년 권오창 작품)
경기전 내 어진박물관에 있는 태조 어진 모사본 (2011년 권오창 작품) ⓒ 박배민

"태조 대왕께서 입은 곤의(袞衣) 빛깔이 푸르니, 예복이 아닌 듯하다. 혹시 국초에 복색을 푸른 빛을 숭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속종의 의문에,

영부사(領府事, 정1품 고위 무관) 김수흥은 이렇게 답한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고려에서는 푸른 빛을 숭상하였다'고 하니, 태조조는 고려와 시대가 멀지 않기 때문에 더러는 푸른 빛으로 곤의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무인으로 활약하던 인물이었다. 고려 사람이 새 나라를 세웠으니, 그 초창기에는 고려의 습속이 여전히 남아 있었을 것이다. 청색 곤룡포 역시 그 흔적이 아닐까. 새로운 왕조의 예복이 아직 정리되기 전, 옛 왕조의 기운이 스며든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태조 어진은 조선 초에 제작된 원본이 아니다. 태조의 어진은 여러 버전이 있었지만, 임진왜란(1592), 전주 대화재(1767), 동학농민혁명(1894) 같은 큰 격변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지고 전주 경기전의 어진만이 살아남았다.

현재 어진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것은 1872년, 화원들이 앞선 시대의 어진을 본떠 그린 모사본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고종 대에 이르러 낡아, 결국 다시 모사할 수밖에 없었다.

 현존 태조 어진(임금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된 1872년본
현존 태조 어진(임금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된 1872년본 ⓒ 국가유산포털(공공누리 제1유형)

낡은 원본은 물에 씻어 백자에 담은 뒤 경기전 북쪽 땅에 묻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이어져 온 태조의 어진은 비록 후대의 것이라 하더라도, 조선의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라, 왕조의 전통을 오늘까지 전해 주는 그림인 셈이다.

태조가 전주에 돌아온 까닭

왜 하필 전주에 태조 어진을 모셔졌을까. 전주가 이성계 가문의 본향이자 조선 왕조의 뿌리였기 때문이다. 태조의 5대조 이안사가 이곳 출신이었고, 태종은 그 뿌리를 기리기 위해 전주에 경기전을 세우고 어진을 봉안했다.

 보물 '전주지도'. 읍성 동남쪽에 숲으로 둘러싸인 경기전이 보인다.
보물 '전주지도'. 읍성 동남쪽에 숲으로 둘러싸인 경기전이 보인다. ⓒ 한국학중앙연구원(공공누리, 박배민 가공)

돌아 나오는 길, 다시 햇살이 내리쬐는 전동성당과 마주했다. 붉은 벽돌 성당과 검소한 한옥 건물이 서로를 비추며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역사와 신앙, 전통과 근대가 한 자리에서 만나는 풍경 속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채널(브런치 등)에도 실립니다.*참고문헌

이수미, '경기전 태조 어진의 조형적 특징과 봉안의 의미', 2006


#경기전#이성계#어진#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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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남긴 흔적을 찾아 다닙니다. 관광학을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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