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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5일 진도 벽파진에서 만난 박신영씨. 박씨는 지난 11월 25일부터 12월 25일까지 경남 진주에서 진도까지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로 따라 500여㎞를 걸었다.
12월 25일 진도 벽파진에서 만난 박신영씨. 박씨는 지난 11월 25일부터 12월 25일까지 경남 진주에서 진도까지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로 따라 500여㎞를 걸었다. ⓒ 이돈삼

"500여㎞ 걸었다고 제 삶이 바뀌진 않을 겁니다. 저의 역사일 뿐입니다. 이것이 켜켜이 쌓여 제 마음이 두터워지고 더욱 강인해지겠죠.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도 실감한 시간이었습니다. 전라도 백성의 헌신과 희생을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박신영(42, 경기도 용인)씨의 말이다. 박씨는 지난 11월 25일부터 12월 25일까지 경상남도 진주에서 전라남도 진도까지 500여㎞를 걸었다. 이 길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사를 모으고 병참물자와 군량미를 확보한, 이른바 조선수군을 재건하면서 명량대첩을 하러 가는 노정이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1597년 8월 3일(음력)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을 다시 받고 진주에서 하동을 거쳐 구례, 곡성, 순천, 보성, 장흥 등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확보하며 일본군과 건곤일척의 전투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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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구례와 곡성에서 병사를 모으고 순천에선 무기와 대포, 화약, 화살을 구했다. 보성에선 군량미를 다량 확보했다. 조정의 수군 철폐령에 맞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는 내용의 장계를 쓴 곳도 보성이었다. 장흥에선 함대 12척을 회수했다.

이순신은 이렇게 재건한 조선수군으로 그해 9월 16일 울돌목에서 명량대첩을 일궈냈다. 조정의 지원은커녕 수군 철폐령까지 내려지는 등 온갖 악조건을 이겨내며 전라도에서, 전라도 백성들의 지원을 받아 조선수군 재건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장흥 회령진 역사공원과 회진포구 전경.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배설로부터 12척의 조선함대를 인수받은 곳이다. 조선수군 재건로를 따라 걸은 박신영씨가 깊은 인상을 받은 곳이다.
장흥 회령진 역사공원과 회진포구 전경.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배설로부터 12척의 조선함대를 인수받은 곳이다. 조선수군 재건로를 따라 걸은 박신영씨가 깊은 인상을 받은 곳이다. ⓒ 이돈삼

 해남 우수영에 있는 명량대첩 기념관 전시물을 둘러보는 박신영씨. 울돌목 일대는 11월 25일 시작한 박씨의 조선수군 재건로 마지막 답사지다.
해남 우수영에 있는 명량대첩 기념관 전시물을 둘러보는 박신영씨. 울돌목 일대는 11월 25일 시작한 박씨의 조선수군 재건로 마지막 답사지다. ⓒ 이돈삼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데, '개고생'을 사서 한 박신영씨다. 40대 초반의 젊은이가, 그것도 수도권에 살고 있는데, 특별한 연고도 없는 남도를 걸었다고? 박씨한테 관심이 간 이유다. 박신영씨를 지난 25일 명량대첩의 현장 울돌목에서 만났다.

- 걷는 길은 전국에 많은데, 조선수군 재건로를 택한 이유는?

"1년 전에 서울에서 진주까지 이순신 백의종군로를 걸었습니다. 제 삶을 되돌아보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으려고요. 구례, 순천을 걸으면서 조선수군 재건로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백의종군로를 걷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바로 골절상을 입었어요. 몇 달 움직이질 못했습니다. 생활이 느슨해지고, 음주가 잦고, 삶이 나태해졌어요. 삶이 힘들 때마다 떠올린 이순신 장군이 생각났습니다. 조선수군 재건으로 전쟁 판도를 바꾸며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을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 걷는 날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준비는 어떻게?

"백의종군로를 걸으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준비없이 무모하게 시작했거든요. 이번엔 사전 준비를 조금 했어요. 검색해서 알게 된 책 <남도 명량의 기억을 걷다>를 몇 번 정독하고, 유튜브 '명량으로 가는 길'도 다 봤습니다. 배낭도 실속있게 꾸렸습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바로 진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루 20~25㎞씩, 3주 정도 걸으면 되겠다 생각했죠. 백의종군로는 날마다 35~40㎞를 걷고, 밤까지 걷기도 했거든요."

 진도 벽파진에 서 있는 이충무공 전첩비.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구체적으로 구상한 벽파진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조선수군 재건로 답사에 나선 박신영씨의 마지막 방문지다.
진도 벽파진에 서 있는 이충무공 전첩비.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구체적으로 구상한 벽파진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조선수군 재건로 답사에 나선 박신영씨의 마지막 방문지다. ⓒ 이돈삼

 벽파진 전첩비를 떠받들고 있는 거북이가 발톱을 바로 세우고 있다. 물길을 따라 금방이라도 바다를 향해 나아갈 듯하다.
벽파진 전첩비를 떠받들고 있는 거북이가 발톱을 바로 세우고 있다. 물길을 따라 금방이라도 바다를 향해 나아갈 듯하다. ⓒ 이돈삼

- 숙소를 이용하지 않고 야영을 했다고?

"저에게 조선수군 재건로 답사는 여행이 아니고, 수행이라 생각했습니다. 편히 먹고 자면서 결기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은 한뎃잠(노숙)을 자고 거친 밥을 먹으며 싸웠을 텐데. 당시 조선수군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야영을 했습니다."

- 걸으면서 불편하거나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 아니었을 텐데?

"초행길인 데다 국도변 좁은 갓길이 위험했습니다. 자동차가 아주 위협적이었습니다. 가급적 도로를 걷지 않으려 했지만, 수군재건로 특성상 그럴 수도 없었어요. 야영은 번거롭긴 했지만 괜찮았습니다. 바람과 추위를 막아줄 텐트와 침낭이 있었으니까요. 당시 홑겹 단벌에 한뎃잠을 잔 조선수군에 비하면 저는 호텔을 짊어지고 다닌 거죠."

- 재밌는 일이나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은?

"많았습니다. 구례 섬진강변 정자에서 하룻밤 묵었는데, 마을 어르신이 아침밥을 차려주셨습니다. 극구 사양했는데, 계속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황송한 마음으로 밥을 먹고 길을 나서는데, 간식거리와 김치까지 챙겨주셨어요. 순천에선 국궁하는 어르신을 만나 막걸리를 마시며 하룻밤 보냈습니다. 저를 친동생처럼 대해주고 활도 선물로 주셨어요. 이순신 장군처럼 저도 순천에서 활을 구했습니다. 벌교에선 공사판 막일도 해봤어요."

 보성 벌교 '김범우의 집’에서 집수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박신영 씨. 박 씨는 "이순신 장군은 보성에서 군량미를 얻었다는데, 저는 현금을 손에 쥐었다”며 활짝 웃었다.
보성 벌교 '김범우의 집’에서 집수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박신영 씨. 박 씨는 "이순신 장군은 보성에서 군량미를 얻었다는데, 저는 현금을 손에 쥐었다”며 활짝 웃었다. ⓒ 이돈삼

- 공사판 막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이었죠. 12월 3일 벌교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소설 <태백산맥> 배경 무대를 찾았습니다. '김범우의 집'을 기웃거리다가 그곳에서 일하는 목수를 만났는데, 해병대 선배였습니다. 금세 유대감이 형성됐죠. '알바해서 여비라도 챙겨가라'는 선배의 권유로 집수리 일을 며칠 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재밌었어요.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죠. 이순신 장군은 보성에서 군량미를 얻었다는데, 저는 현금을 손에 쥐었습니다."

- 걸으면서 느낀 전라도 이미지는?

"삭막하지 않았습니다. 백로와 청둥오리 노니는 맑은 개천, 고즈넉한 시골 풍경도 좋았습니다. 활기를 느낄 수 없었는데 그건 아쉬웠습니다. 사람들 말투는 다소 퉁명스러웠지만, 잔정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위로와 응원 말씀도 고마웠습니다. 남도땅 어디라도 인상 깊었습니다."

- 걷기 여행의 장점을 꼽는다면?

"자동차 여행은 폭이 좁은데 걸으면 넓어집니다. 산과 들에 눈 맞추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요. 경험할 일이 많다는 게 걷기 여행의 장점입니다. 걷으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몰입할 때가 있습니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점입니다. 건강은 덤으로 따라 오겠죠."

 울돌목을 내려다보고 선 '고뇌하는 이순신상'. 흡사 명량대첩을 앞두고 울돌목의 물길을 유심히 살피는 것 같다.
울돌목을 내려다보고 선 '고뇌하는 이순신상'. 흡사 명량대첩을 앞두고 울돌목의 물길을 유심히 살피는 것 같다. ⓒ 이돈삼




#박신영#조선수군재건로#이순신#명량대첩#울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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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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