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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철, 보성 벌교 '나철 기념관' 내부
나철, 보성 벌교 '나철 기념관' 내부 ⓒ 국가보훈부

1863년 12월 2일 나철(羅喆) 지사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1916년 8월 15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3세였다. 그의 고향인 보성군 벌교읍에는 '나철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보성 벌교의 지주 집안 둘째아들 나철은 29세에 장원급제하는 등 부모와 가문의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나철은 벼슬살이나 하고 있다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젖어들었다. 그는 강진 출신의 오혁, 부안 출신의 이기 등과 의기투합했다.

"일본과 한국 두 민족이 서로 주권을 존중하면서 공존해야 나란히 번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본인들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야 동양 평화가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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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일본으로 가서 저들의 핵심 지도층을 설득하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 등이 나철 일행을 만나줄 리 없었다. 그제야 나철 등은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주국가 유지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나 세력은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단단히 가지게 되었다.

"맨 먼저 처단해야 할 자들이 바로 을사오적이오. 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등부터 죽입시다."

"권총을 구입하여 총을 쏘는 훈련을 합시다."

나철, 오혁, 김인식, 강상원 등 20여 명은 감사의용단(敢死義勇團, 과감히 목숨을 던질 의롭고 용기있는 지사들의 단체)을 조직했다.

노예 굴레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바치자

단원들은 '2천만 민족의 노예의 굴레를 벗기기 위해 함께 목숨을 바치자'는 동맹서에 서명했고, '나라를 팔아먹은 5적을 민족의 이름으로 응징한다'는 참간장(斬奸狀)에 동의했다.

"5적을 처단할 계획을 세밀하게 수립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연전에 기산도 선생 중심의 자강회가 이근택 처단에 실패한 교훈을 되새겨 볼 일입니다. 자강회가 대의는 좋았으나 치밀하지는 못했습니다."

논의 끝에, 권총을 갖춘 행동부대를 5적의 집 앞마다 배치했다가 저들이 아침에 대문을 열 때 일제히 총격을 가해 처단하기로 작전을 짰다. 거사일은 1906년 2월 13일로 잡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5적의 입궐 시간이 모두 달라 그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선물을 보냅시다."

새로운 계책으로, 5적에게 선물을 보냈다. 폭탄을 넣은 상자가 선물로 위장되어 박제순 등 5적에게 배달되었다.

"선물이 왔다고? 요즘 세상에 대면도 하지 않고 그냥 선물을 보내는 어리석은 자가 어디 있겠느냐? 상자 안에 수상하거나 위험한 물건이 들었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박제순이 경계심을 드러내고는 "이 상자가 나한테만 배달되었을 리가 없지!"라면서, 이완용 등에게 선물상자를 열지 말라고 두루 연락하였다. 그 바람에 만사가 일그러지고 말았다.

을사오적을 하나씩 처단하기로 방침 변경

결국 감사의용단은 논의 끝에 을사오적을 나누어서 각각 저격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단원들은 2월 27일, 3월 2일, 3월 6일 세 차례에 걸쳐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했다. 그러나 계획대로 성사시키지 못하던 차에 이홍래 단원이 붙잡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홍래는 권중현 처단 임무를 맡았었다. 그는 권중현을 향해 발사했지만 부상만 입히는 데 그쳤다. 이홍래는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한 채 사건 관련 인물 18명의 이름을 실토했다.

"이러다간 동지들만 모두 죽을 것이오."

나철은 자신이 주동자라며 자수했다. 동지들의 희생을 줄이려는 고육책이었다. 결국 나철에게는 지도(智島) 10년 유배형이 떨어졌다. 그때가 1907년 7월 3일이었다. 그래도 4개월 뒤 고종의 특사로 오기호, 이기, 강상원 등과 함께 풀려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새로운 투쟁 방안 모색, 동지 규합

나철은 새로운 투쟁을 모색했다. 민족종교를 일으켜 독립운동의 새 전환을 일으키겠노라 생각했다. 기존의 단군교를 더욱 체계화하여 나라를 잃고 실의에 젖어 지내는 민족을 하나같이 일으켜 세우겠노라는 담대한 계획이었다.

나철은 1909년 1월 15일 첫 모임을 서울 재동 취운정에서 열었다. 이날에는 모두 낯익은 얼굴들이 모였다. 나인영(대종교 창시 이전까지의 나철의 이름), 오혁, 이기, 강상원, 김윤식, 유근, 김인식, 오기호, 강우, 정훈모, 김춘식 등이었다.

모두 왔다 싶을 때 나인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국조(國祖)를 받들어 민족정기를 세우고 민족독립을 지키기 위한 나라의 정신으로 삼자!'라고 역설했다. 한얼교 또는 천신교라 불리던 단군교는 1910년 8월 대종교(大倧敎)로 개명되었다.

나라가 일본의 침략 세력에 짓밟힌 이후, 국조를 받들어 민족자존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지사들이 많았다. 민족종교를 민족의식 고취의 방편으로 삼자는 뜻이었다. 대종교의 교세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데에는 그런 시대적 추세도 한몫을 했다.

대종교 교세 폭발하자 일제 불법화 조치

대종교 교인의 헤아릴 수 없는 증가는 독립운동 세력의 놀라운 확대로 이어졌다. 일제가 그런 대종교를 그냥 내버려둘 리 없었다.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 대종교를 불법화했다.

대종교는 존폐 위기에 몰렸고, 분을 참지 못한 나철은 1916년 8월 15일 자결하였다.
나철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단군이 활동한 무대이자 고구려 땅이었던 북간도에 묻혔다. 대종교 본부도 서울에서 북간도로 옮겨졌다.

그후 나철은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1919년 2월 1일 대종교 지도자 서일, 여준 등이 중심이 되어 3 · 1운동보다 빠른 '무오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또 김좌진 등 대종교 회원 중심으로 조직된 북로군정서는 청산리 대첩의 핵심이 되었다.

2500명의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에서 일본군 5만여 명을 상대로 싸워 3000여 명을 전사시켰다. 탄신 161주년을 맞아 나철 지사의 생애를 대략이나마 한번 돌이켜보았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나철#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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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립운동가

정만진 (daeguedu) 내방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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