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시가 이원녕 지사 등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광복사(사당), 광복 의사단(무덤 역할 설치물) ⓒ 국가보훈부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반도 침략을 본격화한 이래, 마침내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을 특사로 파견해 나라의 독립을 지켜내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일이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일제는 중앙정부 각 부서의 차관 자리에 일본인을 앉히는 차관 정치를 실시해 내정의 주권을 아주 침탈하는 한편 한국군 군대를 강제 해산했다.
해산 당한 군인들은 비록 서울에서는 항전 끝에 진압되고 말았지만, 흩어져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에 투신했다. 그 결과 을사의병은 지금까지의 의병보다 전투력이 높아졌다. 일제의 한국군 강제 해산은 "본격적인 의병 전쟁을 유발하는 결과"(국가보훈부,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를 낳았다.
강제 군대해산, 본격적 의병전쟁으로 이어져
경상북도에서는 북부의 이강년 부대, 동부의 신돌석 부대, 남부의 산남의진(정환직· 정용기 부자)이 가장 두드러진 의병진이었다. 상주 사람들 중에도 이들 유명 의병진에 가담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이 많았고, 상주 단위 소규모 의병진을 꾸려 이들과 연계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상주 의병들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이병억은 의병장 경력의 김재성과 함께 경기도 안성과 충북 괴산 등 상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역을 돌며 의병 봉기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제에 붙잡혔다. 일제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은 그에게 1915년 3월 11일 소위 보안법 위반을 적용해 징역 6월을 언도했다.
망국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한 상주 의병들
1932년 11월 28일 타계한 이원녕(李元寧) 지사도 상주 출신 의병이자 독립지사이다. 이 말은 그가 경술국치 이전에 의병 활동을 했고, 경술국치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는 뜻이다.
본적이 경북 상주 화북면 하오리 498번지인 이원녕 지사는 1864년 1월 15일 출생했다. 즉 세상을 떠날 당시 향년 68세였다. 이 지사는 1912년 2월 10일 본인과 마찬가지로 경술국치 이전 의병 활동을 한 이용규·손진형·장남기 등과 모여 거의를 계획한 후 상주 동관음동에서 하늘에 맹세하는 고천제(告天祭)를 지냈다.
군자금이 있어야 활동을 할 수 있으므로 이들은 충남 진잠으로 가서 권호·이창희·남태진 등에게 군자금 70원을 조달했다(당시 70원은 현 시세로 환산할 때 대략 10배가량 되므로 700만 원 정도에 해당한다).
하늘에 맹세하는 고천제 지내고 군자금 모집
그러나 조직이 일제에 포착되면서 '사기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 지사는 7개월여 옥고를 치르다가 1912년 9월 28일 면소되어 석방되었다. 지사는 상주 출신 여덟 분 독립지사들과 함께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산31번지 소재 '광복 의사단'에 모셔져 있다(2000년 12월 25일 건립).
국가보훈부 현충시설 정보서비스의 광복의사단 건립취지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구한말 국권회복과 일제하 독립을 위해 활동한 상주시 화북면 출신 이강년, 이용엽, 이원제, 이성범, 이용회, 이원녕, 김재갑, 홍종흠 등 8인의 공적을 기리고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사당이다.
이강년(1858년~1908년)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한말의 의병장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 탐관오리와 싸웠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유인석의 의병과 합류하여 유격장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양위당하자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의 민긍호와 합세, 충주를 공격했다. 이해 12월 13도 창의군에 가담했고, 그 후 가평·인제·강릉·양양·용소동·갈기동·백담사 등지에서 연승을 거두는 성과를 올렸으나 청풍 금수산 전투에서 피체되어 1908년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성범은 상주에서 출생하여 1919년 4월 8일의 상주 화북면 문장산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운산 이용엽은 이강년 창의군의 좌종사로 활약하면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왜병을 말티재로 유인하고는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순국하였고 가은 이원재는 이강년 창의군의 좌종사로 활약하면서 군수물자의 조달에 헌신하였으며,
화은 이성범, 송사 이용회, 김재갑, 홍종흠은 3.1운동 당시 우리나라의 독립만세를 선도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1년6월씩 옥고를 겪었고, 간산 이원녕은 아우 한영과 함께 공주와 문경 지방에서 창의군의 군자금 조달 등에 헌신하였다.
마지막 문장의 "아우 한영과 함께 공주와 문경 지방에서 창의군과 군자금 조달 등에 헌신하였다"는 대목에 주목,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이원녕 지사의 아우님을 찾아본다. 그러나 없다.
이런 상황과 마주칠 때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현창이 좀 더 세심하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현창 시설에는 성함이 나오는데 공훈록에는 누락되어 있으면 그 사유를 밝혀 놓는 등 보충 설명이 있어야 한다. 유명한 독립지사만 두드러지게 현창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 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