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가(남강정사,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65-1), 원내 장태수 지사 ⓒ 국가보훈부
1910년 11월 27일 장태수(張泰秀) 지사가 순국했다. 1841년 12월 24일 전북 김제군 금구면에서 출생했으니 향년 69세였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내가 두 가지 죄를 지었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니 불충이요, 이름이 적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 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를 욕되게 하였으니 불효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 같은 두 가지의 죄를 지었으니 죽는 것이 이미 늦었다." - 순국 당시 선생의 유언 중에서
그의 자정 순국은 당대 선비들이 국가 위기를 맞아 실천한 세 가지 행로 중 한 길이었다.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거의(擧義), 현직을 버리고 살아가는 거수(去守), 목숨을 던져 저항하는 치명(致命) 중 세 번째 도(道)였다.
거의를 택한 선비들은 의병항쟁의 길을 걸었다. 거수를 택한 선비들은 민족교육운동으로 나아갔다. 치명을 택한 선비들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을 독립운동 방략으로 삼았다. 자신의 죽음이 민족 모두의 의로운 정신을 북돋우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기를 그들은 소망했다.
스스로 목숨을 던져 항일의지를 불태운 선비들
경술국치 직후 일제의 한국 병탄에 반대해 자결 순국한 지사들 중에서 이준, 민영환, 황현, 홍범식, 김도현, 이만도, 송병순 등의 지사들이 특히 유명하다. 그 중 한 분이 바로 장태수 지사이다.
그는 20세이던 1861년 과거에 급제했고,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과 장령, 예조 정랑 등 이른바 중앙정부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맑을 청, 중요한 요, 직책 직으로 이루어진 청요직은 이름 그대로 입신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불과 26세이던 1867년 양산군수가 되었다. 이때 나라의 앞날을 염려해 군사를 양성했다. 또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조영규(趙英珪) 양산군수의 제단을 다시 쌓아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일에도 힘썼다.
망해가는 나라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후 다시 중앙관직으로 돌아와 병조참의 등 요직을 맡아 분골쇄신했지만 망해가는 나라를 혼자 힘으로 되살릴 수는 없었다. 청일전쟁 승전국 일본은 마침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했고, 이는 고종의 단발령 선포로 이어졌다.
그는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내려와 "남강거사"라 자칭하며 은거했다. 그러던 중 러일전쟁을 다시 승리로 이끈 일제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다시 관계로 나아갔다. 국망 상황을 막아내는 데 어떻게든 힘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1905년 11월, 매국 대신들에 의해 끝내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는 "적신들이 나라를 망치는 일이 예로부터 많았지만 어찌 오늘날과 같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통탄하면서 '을사5적'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개와 말까지도 능히 주인의 은덕을 생각하는데, 역적 신하들은 어찌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 수가 있는가!(犬馬猶能懷主德 賊臣何忍賣君欺)"
경술국치 후 그는 낙향해 다시 은둔했다. 의관을 제대로 정제하지 않고 사람을 만나 말하고 웃는 일도 없이 지냈다. 일제가 작위와 돈을 받으라고 회유했지만, "나라가 망하는 것도 차마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원수의 돈을 어떻게 받겠는가. 나는 죽어도 받을 수 없다"고 호통하며 쫓아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회유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지사는 나라와 자신에 대한 지조를 지키고, 국민의 의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곡기를 끊고 단식 24일째, 마침내 그의 숨이 끊어졌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선비의 면모를 죽음으로 보여준 장태수 지사의 순국 자정일을 맞아 그의 삶을 짧게나마 돌이켜보았다. 명복을 빌면서, 그가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면서 분단조국의 통일과 진정한 민주화를 빌어주시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 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