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원으로 일하면서 가장 긴장될 때는 바로 시재(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를 일컫는 말)를 점검할 때이다. 오차가 0으로 나올 때는 얼마나 기쁜지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편의점에서 일할 때는 시재가 부족하면 사비로 메워야 했기에 현금 계산에 유독 예민했다.
그래서 손님이 계산 중 뒤늦게 잔돈을 내거나, 현금으로 산 상품을 가격이 다른 상품으로 바꾸거나, 잔돈을 한가득 가져와서 지폐로 바꿔달라는 등 각종 변수가 생긴 날이면 퇴근할 때까지 쭉 불안했다. 어떤 손님은 소액이면서 카드를 내서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모르는 말씀이다. 계산원 입장에서는 카드 계산이 몸도 마음도 가장 편하다.
계산대는 보기보다 훨씬 무질서한 곳이다. 한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데 다른 손님이 불쑥 끼어들어 말을 걸고, 계산 중인 손님은 상품을 뺐다 넣었다 반복하거나 카드 결제를 번복하고, 그 와중에 가끔 매장으로 전화가 오면 혼이 쏙 빠진다. 이런 상황을 익히 겪어 봤기에 내가 손님이 되어 물건을 살 때 꼭 영수증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계산원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상황을 못 믿기 때문이다.
며칠 전 편의점에서 2+1 행사 상품을 골라 편의점 전용 어플로 계산하려고 했다. 어플에 등록해놓은 카드에 잔액이 있는지 잘 모르는 상태여서 해보고 안 되면 그냥 가자는 마음이었다. 걱정과는 다르게 계산원이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긴가민가해서 섣불리 계산대를 떠날 수 없었다.
"다 된 거예요?"
"네."
계산원은 다시 한 번 POS기 화면을 바라봤고 나는 혹시 모르는 마음에 되물었다.
"진짜 된 거죠?"
"네, 된 거예요."
이번엔 계산원의 얼굴에 살짝 귀찮은 기색이 드러났다. 내가 확신이 들지 않은 것은 작은 소리긴 해도 POS기에서 "다시 시도해 주십시오"라는 안내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산원은 내가 머뭇거리는 까닭이 할인이나 적립 때문이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는지 부가 설명을 이어갔다.
"이걸로 결제하시면 적립이랑 할인도 자동으로 들어가요. 여기 보세요."
계산대에서 나온 계산원은 손수 가격표를 비교해주면서 이런 표시가 있으면 적립이 더 되고 특정 결제 수단을 쓰면 추가 할인이 된다고까지 알려주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나는 계산원의 수고에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드리고 편의점을 나왔다.
불현듯 떠오른 태국 손님
그날 밤, 뒤가 개운치 않았던 나는 앱으로 카드 결제 내역을 찾아보았다. 역시나 편의점에서 쓴 내역이 없었다. 솔직히, 갈등했다.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 됐다고 했으니까 내 잘못은 아니잖아?'
그리고 그 순간 오래 전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은 비닐봉지 값을 치르는 게 당연한 일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뭘 그런 걸 돈을 받느냐고 성질을 부리는 손님이 흔했다. 그런 손님을 볼 때마다 봉지 값으로 쩨쩨하게 20원이 아니라 2,000원 정도 받았으면 했다.
십 원짜리 잔돈 받기 싫다는 핑계가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비닐봉지가 썪으려면 한오백 년 걸린다는데 겨우 오 분 남짓 편하자고 20원도 내지 않고 비닐을 달라고 우기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매일같이 보며 환경 문제가 괜히 심각해진 게 아니구나 하는 경각심이 들었다.
비닐봉지 값은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정부에서 정한 거라고, 그냥 주면 신고 당한다고 설명하는 게 지겨워지던 어느 날,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외국인 세 명이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내가 "어서 오세요."하고 맞이하자 그들은 어색한 미소로 응답하며 얼른 매대로 향했다. 앳된 얼굴로 봐선 10대 후반쯤 된 것 같았다. 관광객인지 아님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이민자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기들끼리 모국어를 쓰며 열심히 간식을 고르는 모습이 귀여웠다.
잠시 뒤 그들은 쭈뼛대며 상품을 계산대로 가져왔다. 가짓수가 꽤 많아서 "봉지 드릴까요?" 하고 물었는데 멋쩍게 웃으며 내 눈치만 봤다.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상품만 결제하고 카드를 돌려줬는데 갈 생각을 안 했다. 그러다 한 명이 휴대전화를 꺼내 번역기에 뭔가를 입력했다. 그리고 긴장한 얼굴로 내게 화면을 보여줬다. 태국어 문장 밑엔 한국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닐 가방에 담아주세요.'
나는 웃으면서 비닐봉지 한 장을 꺼냈다. 그들은 뜻이 통한 게 뿌듯했는지 처음으로 밝게 웃었다.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펴서 "트웬티 원"이라고 알려줬다. 그러자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영어, 한국어를 번갈아가며 열심히 설명하다가 돈통에서 이십 원을 꺼내 직접 보여주었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자기들끼리 상의까지 했지만 봉지를 돈 주고 산다는 걸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들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자 나는 얼른 봉지에 상품을 담아 웃는 낯으로 건넸다. 그제야 그들은 미소를 되찾았고 나에게 어설픈 목인사를 건네며 돌아갔다.
나는 자투리 동전을 모아둔 통에서 이십 원을 꺼내 봉지 값을 결제하고,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에 한참 눈길을 주었다. 낯선 곳에서 하나하나 알아가는 풋풋함과 설렘을 보고 나니 괜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한국사람에게 편의점은 너무도 익숙한 공간이지만 저들에게는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긴장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편의점에서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뭔지,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미리 알아봤을 지도 모른다. 내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던 그들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데 저 멀리 그들이 뛰어오는 게 아닌가. 그들은 편의점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돈부터 내밀었다. 내 손바닥에 상대의 온기가 오롯이 전해지는 동전 두 개가 놓였다. 이십 원이었다.
"쏘리, 쏘리."
갑작스런 사과에 얼이 빠진 나는 뭐라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그들을 보냈다. 올 때처럼 그들은 뛰어서 돌아갔고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손바닥에 놓인 이십 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쩌다 갑자기 내 말을 이해하게 된 걸까. 이걸 주려고 어디까지 갔다가 돌아온 걸까. 혹시 내가 태국인을 나쁘게 생각할까 봐 걱정했을까.
마땅히 내야 할 돈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의지가 담긴 이십 원은 그 어떤 동전보다 반짝거렸다. 금액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이 새삼 와닿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동전이 다른 동전들과 섞이는 게 아까워 한참 바라보다 돈통에 넣었다.
그때 느꼈던 감동을 다시금 음미하고 나니 잠시나마 삼천 원에 양심을 팔려고 했던 내가 그렇게 못나 보일 수 없었다.
삼천 원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것
다음 날 나는 다시 편의점에 들렀다. 계산원은 간이 의자에 앉아 상품을 진열하고 있었다. 날 알아보고 원망의 눈초리를 보낼까, 화내진 않을까 별 상상을 다했는데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혹시 어제도 근무하셨어요?"라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아니요"였다. 나는 어제처럼 같은 상품을 골라 계산대로 들고 가서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사실 어제도 제가 이걸 샀는데요…."
여기까지만 듣고 계산원은 입을 벌리며 손뼉을 마주쳤다.
"아! 그 분이구나!"
계산원은 POS기 옆에 붙여놓은 영수증을 떼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러고 나선 어제 근무자가 본인 돈으로 계산하셨다고, 어찌나 속상했던지 근무 내내 그 일을 신경 쓰다가 계산 실수까지 해서 시재까지 천 원이 비었다는 얘기까지 해주셨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알기에 잠시라도 양심을 버릴까 고민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이러저러해서 어제 그냥 갔다가 계산이 안 되어 있어서 다시 온 거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그 분이 이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제가 그랬거든요. 이럴 때 다시 오는 손님은 백 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일 거라고."
이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사실 저도 계산원이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역시 안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같은 일을 하니까 다시 와준 거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냥 평범한 손님이 양심을 지킨 걸로 생각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어제 가져간 것까지 제대로 계산을 한 뒤 편의점을 나왔다. 단돈 삼천 원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값진 걸 얻어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