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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이 2월 7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에서 열린 51차 전체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는 모습.
 김광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이 2월 7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에서 열린 51차 전체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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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인 하미마을 학살(Hà My massacre)을 조사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날 제55차 전원위원회를 열어 해당 사건 조사 개시를 놓고 표결한 결과 7명의 위원 중 4명이 반대 입장을 표명해 '각하'로 결정했다.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다수 위원은 베트남 전쟁 시기 벌어진 외국인에 대한 인권침해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법 제2조 4항에서 규정하는 진실 규명의 범위인 '권위주의 통치 시기'의 인권침해 사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반면에, 진실화해위원회는 '베트남 참전 납북군인·가족 인권침해 사건'을 포함한 총 170건에 대해선 조사를 개시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김광동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이후 25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하미마을 학살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기본법(과거사정리법)'에 규정한 '1945년 8월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 시기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 등으로 인한 인권침해 사건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요청된 것을 받아들였다고 할 때 또다시 외교 통로를 통해 조사돼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냐, 실효성이 있느냐는 문제가 논의됐다"고도 말했다.

1968년 하미마을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은

이번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각하를 결정한 하미마을 학살은 1968년 2월 22일 대한민국 해병대 소속의 청룡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에 위치한 마을에서 벌인 민간인 학살이다. 1968년 2월 25일 새벽 청룡부대 2개 중대가 하미 촌의 따이 마을과 쯩 마을을 포위했고, 마을을 포위한 한국군은 오전 7시 쯤 대략 135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살당한 135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1880년에 태어난 88세 여성이고, 가장 어린 희생자 3명은 1968년에 태어났다. 그 외에도 학살당한 이들 연령대가 2살, 3살, 4살이이라고 한다.

당시 한국군에 의한 학살로 피해를 본 응우옌티탄은 당시 11살이었다. 하미마을 학살 당시 11살이었던 응우옌티탄은 학살의 현장에서 어머니, 남동생, 작은 어머니 그리고 사촌 동생 2명을 잃었고, 그 또한 한국군의 수류탄 공격을 받고 왼쪽 귀와 왼쪽 다리,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참고로 2019년 4월 당시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은 퐁니퐁넛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동명이인)과 함께 대한민국 국회에서 한국 정부에게 진심어린 사과와 배상을 요구한 인물이기도 하다. 
 
2019년 4월, 퐁니·퐁녓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연두색 옷)과 동명의 하미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하늘색 옷)이 한국을 방문하여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피해자·유가족 103인의 청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언젠가부터 응우옌티탄도 학살 피해 증언을 마친 후 응우옌떤런과 비슷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진실인 것을 여러분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
 2019년 4월, 퐁니·퐁녓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연두색 옷)과 동명의 하미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하늘색 옷)이 한국을 방문하여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피해자·유가족 103인의 청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언젠가부터 응우옌티탄도 학살 피해 증언을 마친 후 응우옌떤런과 비슷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진실인 것을 여러분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
ⓒ 한베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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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하미마을에는 위령비가 세워졌으며, 그 위령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1968년 이른 봄, 정월 24일에 청룡부대 병사들이 미친듯이 몰려와 선량한 주민들을 모아놓고 잔인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하미 마을 30가구, 135명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마을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모래와 뼈가 뒤섞이고 불타는 집 기둥에 시신이 엉겨 붙고 개미들이 불에 탄 살점에 몰려들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니 불태풍이 휘몰아친 것보다도 더 참혹했다.
   
다만 한국 정부의 압박·베트남 정부의 지시로 인해 위령비 뒷면의 비문은 현재 연꽃 문양 대리석으로 바뀐 상태라고 한다(관련 기사: 베트남 방문한 문 대통령, 연꽃 비석의 비밀을 아십니까? https://omn.kr/qoej ).
 
베트남 중부 꽝남성 하미마을에 세워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 위령비. 애초 한국군의 학살의 참혹함을 묘사하고 용서의 메시지를 담은 비문이 있었지만 참전군인 단체와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현재는 연꽃 문양 대리석으로 가려진 상태다.
 베트남 중부 꽝남성 하미마을에 세워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 위령비. 애초 한국군의 학살의 참혹함을 묘사하고 용서의 메시지를 담은 비문이 있었지만 참전군인 단체와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현재는 연꽃 문양 대리석으로 가려진 상태다.
ⓒ 한베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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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베평화재단 "명백한 조사대상인데... 법적근거도 없이 각하결정" 반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이 나오자 한베평화재단은 피해자 응우옌티탄을 포함하여 진실화해위 진실신청사건 대리인을 포함하여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 결정을 납득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진실화해위가 전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인 하미학살 사건을 조사조차 개시하지 않고 각하 처분했는데, 이는 진실규명 본분을 망각한 자기부정 결정이고, 법적 의무를 내팽개친 직무유기 결정"이라는 것이다. 한베평화재단은, 진실화해위가 이번 '각하' 결정에서 법을 정면으로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한베평화재단 측은, "과거사정리법에 조사대상에 해당하면 필수적으로 조사를 개시하도록 규정돼 있다. 하미마을 학살은 광복 이후 노태우 정부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하는 권위주의 통치시기에 발생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서 과거사진상규명법(2조1항4호)의 조사 대상에 해당하는 것은 명백하다"며 "(하미마을 사건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서 과거사정리법의 목적 달성을 위해 진실규명이 필요한 사건에도 해당한다(2조1항6호)"고 짚었다. "진실화해위는 법에 따라 반드시 조사개시 결정을 내렸어야 하지만, 법 근거도 없이 각하결정을 내렸다"는 얘기다. 

이에 따르면 진실화해위가 이번 사건 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사진상규명법에도 위반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은 광복 이후 이어져온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이 바로 진실화해위원회가 하는 일이지만, 현재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으려는 직무유기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과거사 아픔을 진상조사하고 밝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 진실화해위원회가 이러한 행위를 보인 것은 실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이며, 우리 사회의 냉정한 비판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정말 과거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인가? 진실화해위는 오히려 국가폭력을 부정함으로써, 피해자들의 상처만 더 크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할 것이다.

태그:#베트남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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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전공자입니다. 사회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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