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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끊었다. 줄인 것이 아니라 끊었다. 한 3주 정도 되었다. 발단은 신경 안정제를 처방받은 일이었다. 나는 만성 소화불량. 내시경으론 이상이 없다 하는 기능성 신경성 소화불량 환자인데 최근 그 증상이 더욱 심해져 병원을 다시 찾은 차였다.

내과에서는 소화제 처방과 심한 경우 안정제 처방까지 고려해 보긴 하지만 안정제 까지는 처방해 주지 않는다고 하셨다. 소화제를 먹으며 먹는 것 조심하시고, 운동하시고,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잘 주무시라고. 쓰앵님.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랍니다.

그래서 신경 정신과에 갔다. 불면증 또한 만성으로 있는 나는 정기적으로 수면제와 상담을 받으러 다닌다. 소화불량에 대해 이야기했다. 거의 읍소에 가까웠다. 이렇게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인데 어떡하냐며, 그랬더니 신경 안정제 처방을 주신다.

정신과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고. 보통 가장 낮은 단계의 용량부터 시작하는데 그다음 단계로 바로 처방해 줄 테니 조절해서 먹으며 관찰해 보라고 하신다.
 
사발커피란 바로 이런 것. 집에서 내린 더치 원액과 우유.
▲ 홈메이드 더치라떼  사발커피란 바로 이런 것. 집에서 내린 더치 원액과 우유.
ⓒ 한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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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닝커피 루틴은 한참 되었다.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생각이 안 나는데 최근 몇 년 간, 그러니까 육아를 하며 굳어진 루틴이다. 집에서 내린 진한 더치 원액에 우유를 부어 한 사발 마시는 사발커피.

오후에는 커피를 잘 마시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사람이 어찌 그렇게 되나, 열받아서 한 잔, 당 떨어져서 한 잔, 친목을 도모하며 한 잔 더 할 수도 있는 일은 무궁무진한 법. 신경 안정제를 처방받고 커피를 보니 창과 방패가 따로 없다. 하나는 온몸을 깨우는 각성제, 하나는 위장을 운동시킬 안정제.

안정제를 먹으며 커피까지 마시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커피를 안 마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보리 커피가 눈에 들어와 구매하였다. 임산부용이라는 설명을 달고 다니는, 보리를 커피 볶듯이 로스팅하여 커피 맛을 흉내낸 보리가루이다. 사람마다 평가는 조금씩 다르지만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리저리 먹어 보았다. 우유에 타 먹어보고, 물에 타 먹어 보고, 역시 깔끔한 더치 라테 못 하다는 생각이 떨쳐지진 않았지만 며칠 보리 가루로 연명해 보니 제일 입에 맞는 레시피를 만나게 되었다.

예전 미국 이모 집에 놀러 갔을 때에 집 앞에 스타벅스가 있었는데, 물을 떠먹는 셀프바에 우유가 있었다. 그것도 저지방, 무지방, 일반우유 이렇게 종류별로 우유병에 담겨있어 원하는 대로 추가해서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우유를 살짝 부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아메리카노의 너무 뜨거움, 진한 쓴 맛을 중화해 주지만 라테보다는 훨씬 가벼운 그 맛을 참 좋아했다. 혹자는 그게 무슨 맛이냐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맛을 참 좋아했다.

보리 가루도 그렇게 먹는 것이 내 입에는 가장 맛있다는 걸 알았다. 뜨거운 물에 가루를 타서 녹인 후 우유나 오트 밀크를 조금 넣어 잘 저어 마신다. 추억은 미국의 맛, 보리가루는 이태리산, 나는 한국에서 그 오묘한 커피를 마시며 추억에 잠기며 아침을 시작한다.
 
오트 밀크로 맛을 낸 보리 커피 한 잔
▲ 보리커피  오트 밀크로 맛을 낸 보리 커피 한 잔
ⓒ 한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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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인 수혈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 자주 있다. 그럴 땐 사탕이나 과자 아이스크림 같은 군것질로 때운다. 주로 단 것이 들어가면 기분도 상태도 조금 나아지기에. 그런데 원래 먹던 더치 라테가 먹고 싶어 오랜만에 커피를 내려 커피를 한 사발 하였다. 바로 엊그제. 그런데 이게 웬일?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흥분과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울렁울렁 두근두근 쿵쿵!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카페인 부작용인가.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려 도무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상태로 하루를 꼬박 지내고 밤까지 새웠다. 아무렇지도 않던 나의 루틴이, 이렇게 극단적인 상태로 나를 몰아넣는 일이었다니. 나는 그동안 내 몸을 학대하고 있었구나. 

임신, 출산, 육아를 겪으며 그렇게 애정하던 술과 매운 음식을 거의 못 먹게 되었는데 이제 커피까지 못 먹게 되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하는 김광석의 노래 가사가 이렇게 사무칠 수가 없다.

오늘도 보리 커피를 마신다. 디카페인도 아닌 무카페인이다. 그러고 보니 신경정신과에 찾아가 읍소할 때에 비하면 나의 위장 상태가 상당 부분 좋아졌음을 느낀다. 안정제의 약 빨인지, 커피를 끊은 생활 습관 덕인지 모르겠지만, 커피를 오랜만에 마셨던 날의 부작용을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나 좋자고 마셔댄 커피가 나를 더 힘들게 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아니, 예전에는 정말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몸도 많이 약해졌고, 예전보다 몸무게도 줄었고, 나이도 더 먹었고, 체력이 전반적으로 안 좋아졌으니 동량의 카페인을 수용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게 되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커피를 줄이는 것도 아닌 끊어버린 사람이 바로 나다. 

만약 커피 줄여야 하는데, 커피 끊어야 하는데 하는 고민을 하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이 이야기가 용기를 드리길 바랍니다. 사발 커피의 대명사였던 저도 끊었는데, 누구나 끊을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커피, #무카페인, #보리커피, #커피 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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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아이 교육과 독서, 집밥, 육아에 관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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