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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 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 [편집자말]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1989년 1월에 죽었다. 그때 잡지 표지에서 달리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커다란 눈과 뾰족하게 솟은 콧수염이 기괴했다. 우주보다 두 살 많을 때였다. 나의 엄마를 놀래켜줄 생각에 달리의 클로즈업이 담긴 잡지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 엄마의 얼굴 앞에 갑자기 들이댔다. 엄마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나는 이게 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 있냐고 되물으며 달리의 사진을 유심히 봤다. 그러다 보니 내가 더럭 무서워졌다. 그 잡지에는 달리의 입관 사진도 실려 있었다. 꿈에 나왔다. 저승사자처럼 생긴 사람의 죽음. 그것이 내게 달리의 첫 인상이었다.

자라면서 보게 된 달리의 그림은 늘 더욱 매력적이고 기괴했다. 스페인 둘째날의 오전 일정은 스페인 북부 지역 피게레스의 달리 박물관이었다. 우주에게 달리는 어떤 첫 인상을 남길까.

달리의 그림을 아들은 어떻게 볼까?

피게레스를 꼭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린 아이를 데리고 유럽 자유 여행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있었기에, 가능하면 여행 일정 동안 당일, 혹은 반일 가이드 투어를 신청하고자 했다. 바르셀로나 여행 이틀째에는 여행사 사이트에서 피게레스와 지로나를 아우르는 근교 1일 투어가 선택지에 있었다.

아마 그 선택지가 없었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이다. 자유여행은 가고 싶은 곳만 골라서 간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갈 수 있는 곳을 가게 된다. 그리고 갈 수 있는 곳은 그때 그때 다르다. 이번에 우연은 달리를 만날 기회를 열어주었고, 나는 달리와 연결된 기억을 꺼낼 수 있었다.
  
피게레스 달리 박물관 앞에서.
▲ 달리 박물관 피게레스 달리 박물관 앞에서.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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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서는 이번 여행의 첫 미술관 투어였다. 앞으로 봐야할 미술관이 많은데 과연 우주가 흥미를 갖고 버틸 수 있을지 알아볼 수 있는 시험대였다. 마을 회관을 개조해 만들었다는 달리 미술관은 풍요로웠다.

실외에 있던 설치 작품부터 달리의 스케치들, 연작 작업들에 보석 디자인까지, 어제의 가우디에 이어 또 다시 새로운 문에 노크를 하는 기분이었다. 가이드 분이 감상의 맥락을 잡아주니 더욱 흥미로웠다.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볼 수 있다.
▲ 달리박물관 중앙정원의 설치 미술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볼 수 있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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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달리의 그림에 이렇게 에로틱한 모티브가 많았던가. 한 그림 건너 다음 그림마다 가이드의 설명에는 19세 미만 청취 불가의 내용이 나왔다. 이 그림은 여성의 신체.... 으험, 우주야 헤드폰이 잘 되는지 아빠가 한 번 볼까? 저 그림은 남성과 여성의... 우와 우주야 저기 저 그림은 뭘까? 이 그림은 보시다시피 여성의... 으랏차, 아빠가 우리 아들 한 번 안아볼까.

미술을 감상하는 지적인 여행자 행세를 할 여유가 없었다. 우주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돌리는 흐름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했다. 유럽에 오기 전엔 미술 작품을 통해 성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면 좋은 거라고 의연하게 생각했지만 막상 해설에 부딪치니 생각과는 달리 아이 시선을 돌리느라 애교 떠는 아빠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큰 애교를 떨 필요는 없었다. 우주는 어찌 됐든 전시 자체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주에겐 새로운 공간을 개척해 도착했다는 게 중요했지, 그곳에서 볼 무언가가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은 모양이다.

마침 달리 박물관에는 우주 또래나 동생으로 보이는 어린이 단체 관람객도 있었다. 저쪽은 어린이 친화적으로 설명해주겠지? 무리 중 한 아이가 우주가 신기한 듯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우주가 2, 3주간 맹연습한 스페인어로 대답하길 바랐으나 우주는 수줍었는지 슥 시선을 피했다. 부모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괜히 걱정한다. 친근하게 어울리면 좋을텐데.

자녀가 하나인 경우, 아이들은 어른들과 대화하는 걸 오히려 더 편안해 하고 또래와 인사하고 어울리는 걸 어색해 할 때가 많다. 집에서 어른들하고만 있기 때문이다. 나 때는 또래들끼리 더 쉽게 어울리고 어른들을 어색해 했던 것 같은데.... 이 여행이 어떤 식으로든 아들의 세계를 넓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선생님의 모자가 인상적이다.
▲ 달리 박물관의 어린이들 선생님의 모자가 인상적이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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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가 자신과 연인 갈라를 모티브로 해서 그린 천장화를 만났다. 그리고 셀카를 찍는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됐다. 카메라를 셀카모드로 한 후 바닥에 내려놓고 타이머를 이용해 3초 후에 찍는 것이다.

이러면 천장화가 제대로 보이는 인증샷을 찍을 수 있다. 바닥에 드러누워서 보지 않는 이상, 현대인이 화가의 요청대로 천장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때 배운 방법은 여행 내내 쓰였다.
  
달리와 갈라, 바닥 인증샷
▲ 달리 박물관의 천장화 달리와 갈라, 바닥 인증샷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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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만난 노란리본

오후에는 지로나로 이동했다. 지로나는 우리나라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과 미드 <왕좌의 게임>에 나온 도시로 유명하다고 했다.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러운 유럽의 소도시다.

여행 전에는 피게레스도 지로나도 알지도 못했던 도시였다. 이렇게 알게 되어 더욱 좋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가이드의 역사 설명과 사진 스팟들을 따라 예쁘고 작은 도시를 걸었다. 스페인의 중부 지역과는 다른, 동부 카탈루냐 사람들의 언어와 자부심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왕좌의 게임>에 나왔던 대성당이라고 한다.
▲ 지로나의 대성당 <왕좌의 게임>에 나왔던 대성당이라고 한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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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노란 리본을 많이 만났다. 독립운동을 통해 투옥된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했다.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에 대해 잠시 되새겼다. 떠나보내게 되는 일이 생겨나는 비극에 대해서도.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사람들이 돌아오길 기원하는 마음의 상징
▲ 지로나의 노란 리본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사람들이 돌아오길 기원하는 마음의 상징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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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쫑알쫑알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가이드께 보태고 싶어 했다. 담임 선생님에게 손 들고 발표하고 싶은 학생처럼. 주변에 민폐되지 않게, 가이드의 말이 꼬이지 않게, 우주가 실망스럽지 않게 제지하는 것이 나의 주요 임무였다. 가이드 분도 여유로울 때, 혹은 우주가 너무 좌절하지 않게 필요한 만큼 잘 거들어 주었고, 같이 다닌 여행객들도 따뜻한 웃음으로 받아주었다.

어린 아들과 아빠의 여행은 무심한 듯 시크하지 않다. 끊임 없이 아이의 동선과 감정을 체크하고 있어야 하되, 너무 매달리는 느낌도 주지 않아야 한다. 남의 눈 때문이라기 보다는, 효과적인 훈육 관리를 위해서. 쓰다보니 TV나 유튜브에서 이야기하는 반려견 교육 이야기 같기도 한데, 정말 어느 정도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예전 어르신들이 손주를 '우리 강아지'라고 괜히 부르신 게 아니다.

하루를 같이 다닌 분들 중 몇 분이 대화를 걸어주셨다. 아이와 함께 했던, 가족과 함께 했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나눴다. 모두에게 이런 여행은 언제든 다닐 수 있는 게 아니다. 간신히 시기와 사정이 맞아야 한다. 그래서 여행 이야기를 하다보면 누구나 잠시 자기 인생의 타임라인을 전체적으로 되짚는 순한 표정을 하게 된다. 그 표정을 잠시 나누는 느낌이 좋았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고 가이드님께 메시와 메시 아버지가 좋아한다는 고깃집을 소개 받았다. 우주야 너 고기 먹을래? 싫다고 할 턱이 있나. 아이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던, 바 형태인 식당 외관에 잠시 망설였으나, 직원들은 친근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스페인의 저녁 식사 치곤 이른 시간이어서 아직 손님이 없었다(스페인은 점심도 저녁도 주 시간대가 늦는 편이라는 걸 가이드북을 보며 알았다).

메시의 M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우리를 메시의 사인저지 아래로 안내해주었다. 관광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가 여긴가 보구나. 한 종업원은 카운터에 있던 모조 줄리메 컵을 들고 오더니 무릎 꿇고 아들에게 바쳤다. 이건 즉흥적인 서비스였던 것 같다. 줄리메 컵은 크키만 좀 작았지 무게와 디테일과 질감이 매우 훌륭했다.
  
메시의 월드컵 우승을 축하하며
▲ 메시 사인 유니폼과 줄리메 컵 메시의 월드컵 우승을 축하하며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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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의 유니폼에는 '생일 축하해 달리, 사랑을 담아'라고 써 있었다. 마침 달리 박물관에 다녀온 날인데! 아들은 그동안 읽은 메시 관련 동화책과 위인전의 정보들을 내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월드컵에만 반짝 축구팬이 되는 나는 메시에게 지각 입문한 편이어서, 아들의 얘기가 새로웠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도 이런 이야기를 우주가 했던 것 같다. 다만 그때는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쏙쏙 들린다. 메시가 할머니에게 어떤 격려를 받았는지, 키가 자라지 않아 어떤 좌절을 겪었는지. 스페인에서 어떤 애정과 기회를 받았는지.

주위를 돌아보니 FC바르셀로나의 깃발도 걸려있다. 그래, 이 나라는 축구의 나라지. 우주야, 내일은 FC바르셀로나 홈구장을 가볼까? 우주의 얼굴에 햇살 미소가 퍼졌다. 그리고 난 우주와 또 다시 건배를 했다.

태그:#바르셀로나, #스페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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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출합니다. 그리고 이것 저것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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