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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잘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라면 공포나 증오가 주된 감정일 테고, 내 연배 정도는 그 옛날 '삐라'에서 보던 늑대로 분한 북한 사람을 떠올리거나,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어떤 표상('조선족'인지 '탈북민'인지 잘 구별 못하면서)을 그릴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MZ세대는...

내게 북한 여성이 각인된 계기는, 1995년 베이징 여성 대회에 참가한 북한 여성의 사진을 보면서다. 단박에 북한 여성인 걸 알아본 건 그들이 입은 한복 때문이었다. 세계 189개국의 여성 대표들이 참가한 그 대회를 기록한 사진에 한복 입은 그들이 있었다. 반갑고 신기했다.

그때 비로소 실감했던 것 같다. 그곳에도 여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게다 1995년이라는 시점이 묘했는데, 그때는 이미 북한이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큰 역경을 맞던 때였다. 그 험난한 시절을 뚫고 당당히 서있는 그들의 존재감에 묘한 정동을 느꼈다.

철저히 '타인'이던 북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탈북을 감행한 이들이 남한에 입국하면서부터일 것이다. 게다 이미 '조선족'이라 불리는 여성들이 서비스 업종에 대거 투입되자 북한 말씨를 낯설지 않게 듣게 되면서 '조선족'이나 '탈북민'이 덜 낯설어지긴 했다.

하지만 분명한 선이 있었다. 경계심을 갖거나 무시하거나 혹은 투명인간 취급을 하면서 넘어서지 말라는 경계선을 엄밀히 긋곤 했다. '조선족'이나 '탈북민'이 드라마나 영화 등에도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다양한 삶의 이미지보다 범죄 등에 연루된 부정적인 이미지로 재생산되며 왜곡에 왜곡이 거듭됐다.

그녀들은 용감했다

내가 콘텐츠로 인상 깊게 만난 '탈북민' 여성은 다큐멘터리 <마담B>의 그녀였다. 그녀 역시 '고난의 행군'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가족의 생존을 위해 북한을 탈출했다. 월경까지는 성공하지만 브로커에 속아 중국 남자에게 팔려간다. 가난해 결혼하지 못하는 중국 농부에게 인신매매로 넘겨진 것이다. 탈북한 북한 여성들이 젠더 폭력에 시달리는 현장이 입증된 경우다.

인신매매로 결혼당하기도 하고, 종종 불법체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위장으로 중국인과 결혼하기도 하는데, 돈만 날리고 사기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더 나쁜 경우 인신매매로 유흥업소에 팔려가기도 한다.

인신매매로 강제 결혼을 했으니 매우 불행할 거란 예상과 달리, '마담B'는 매우 활기차고 강단 있게 살아가는 여성이었다. 가난해도 너무 가난한 중국 남편과 그의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그는 브로커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브로커로 번 돈을 북의 가족에 송금하다 마침내 아들들을 남한에 입국시키고 자신도 남한 국적을 얻기 위해 남한행을 감행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누비며 거침없이 살아가는 그에게선 굉장한 삶의 역동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표지 사진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표지 사진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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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북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김성경의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에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어 반가웠다. 북한 여성들에게 큰 관심을 가진 저자는 중국을 드나들며 어렵게 북한 여성들을 만나 인터뷰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 책이 나왔다. 저자는 보통 연구자들이 연구 대상의 인터뷰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것과 달리, 연구와 사실에 기반하되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해 매우 색다르면서도 풍부한 서사를 제공한다. 덕분에 이야기 속 여성들이 생동감 있게 살아났다.

저자는 전후 재건에 참여하며 고된 삶을 살아낸 앞선 세대의 여성들의 삶을 복구하고, 중국에서 만난 '탈북여성들' 그리고 식민과 분단이 잇대면서 탄생한 자이니치 여성들의 복잡한 삶을 소개한다. 마침내 저자의 시어머니가 식민과 분단의 고리에 연결된 삶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한반도라는 맥락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 현상을 탈식민주의와 젠더라는 키워드로 읽어"내기에 이른다. 식민과 분단은 아주 먼 옛날 이야기거나 "단순히 국가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 정체성,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만난 여성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탈북 여성들이 살아야 할 이유

전쟁 후 분단된 북한에서도 사회 재건을 위해 각 산업분야에 여성들이 투입되었다. 남녀평등에 입각해 여성도 노동현장에 배치됐지만, 습윤된 가부장이 구호만 외친다고 해체되는 건 아니었다. 임신 출산 양육의 무게를 짊어진 채 '노동영웅'이 되는 일은 얼마나 고된 일이었겠는가.

게다 어려운 대로 먹고 살아갈 줄 알았던 삶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맞으며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다. 배급이 끊기고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위기의 삶에 가장 민첩히 움직인 건 여성들이었다. "머리 트인 여자들이 없었더라면 북조선 사람들은 다 죽었을 거"라는 말은 그냥 생긴 말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영리하게 움직였다. 비공식 상업 활동에 뛰어들었다. 개인 농작으로 거둔 여분의 농산물이나 공장 폐자재나 부산물 등으로 만든 소비품이 거래됐고, 중국에서 수입한 옷을 유통하는 등 어려운 가정경제를 타개하기 위해 여성들이 눈부시게 활약했다. 장마당은 이들에 의해 굴러갔다.

원활한 상업 활동을 위해 보안원에게 뇌물을 주는 등 부작용도 상당했지만, 앉아서 굶어죽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 더욱 대담해진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 월경을 시도했고, 돌아오기도,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북한을 떠났지만, 가족해체의 아픔이 시작되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염원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월경했지만 불법 체류자 신분인 탈북여성들이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드물었다. <마담B>의 경우처럼 결혼 시장에 팔려가거나 기껏해야 간병인 정도로 고용되었다. 이렇게 고용되더라도 불법 신분임이 드러날까 운신의 폭이 좁았고, 이를 악용한 노동착취와 신분의 위협도 심했다.

탈북 여성이 주로 향하는 곳은 연변조선 자치구의 주도 연변이다. '조선족'이라 불리는 이들이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곳이니, 우선 말이 통하기 때문이다. 이곳 역시 사는 것이 팍팍해지자 1990년대 이후 더 나은 삶을 위해 남한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처음엔 엄마가 그러다 가족 모두 떠나는 경우도 생기면서 도시가 빠르게 비어갔다. 도시의 정체성도 함께 흐릿해졌다. 아직 떠나지 않은 젊은이들은 부모가 송금한 돈으로 살며 "소비주의와 자본주의가 추동한 욕망과 삶의 형태로 빠르게 동질화"되어갔다. 잠시 머무는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삶이 꿈틀대기는 어렵다. 점차 살아가는 곳으로서의 역동성을 잃어 갔다.

탈북의 행렬이 이어졌지만, 연변 역시 이미 삶의 활기를 잃었고 같은 민족으로서 '탈북민'을 보듬던 손길도 급속히 약화되었다. 각박해지는 민심에 탈북여성들이 발붙일 곳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탈북여성'들은 나름 자기들끼리의 느슨한 공동체를 꾸려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갔고, "아무리 고단한 상황이나 혹독한 운명 앞에서도 나름의 행위 주체성을 발휘"했다. 여성들에게는 살아갈 이유가 있었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돌봐야 할 책임, 언젠가 다시 만나 잘 살겠다는 염원이 있었다.

책에 나오는 많은 여성들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역동적이다. 다만 이들의 힘의 근원이 가족을 건사해야 한다는 가부장이 주조한 여성의 한계 안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들에겐 분명 변화의 주체로서 자신의 운명에 복종하지 않고 기꺼이 맞서려는 에너지가 꿈틀대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나름의 의지대로 삶을 주도해나가려는 그들에게서 독자는 뜻밖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페미니스트인지 모르는 페미니스트의 경이로운 얼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 분단의 나라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김성경 (지은이), 창비(2023)


태그:#<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김성경 북한대학원 교수, #탈북 여성, #식민과 분단, #<마담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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