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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고객을 똑같은 크기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은행에 돈을 빌리러 온 고객은 직접 번호표를 뽑고 대기한다. 은행에 돈을 빌려주러 온 고객은 에스코트를 받는다.

일정 이상 금액을 예치한 VIP는 번호표도 없이 지점장실로 향하고 진짜 VVIP는 은행에 찾아오지도 않는다. 은행원이 직접 집으로 찾아가니까. ··· 2022년 대한민국의 계급은 돈이 정한다. 은행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은행에서 일하는 우리들에게도. 계급이 있다."
 
쉼의 시공간이 다르게 작용해도,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쉼의 시공간이 다르게 작용해도,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 드라마 사랑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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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사랑의 이해>(JTBC)는 은행의 전경을 비추며 시작한다. 그곳을 방문하는 고객,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의 면면을 비춘다. 업무를 보러 오는 방식에 따라 고객의 계급이 나뉘어 있고, 직원들의 명패 색깔과 담당 업무에 따라 계급이 나뉘어 있다.

대개 사랑은 평등한 것으로, 손익을 따지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랑은 결코 동등한 구도 위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경제 사정이나 사회에서의 위계, 문화를 향유하는 방식도 서로 다르다. 이건 단지 다름이 아니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고 또 제한되는가를 좌우한다.
 
과로 사회 속, 쉼의 시공간과 형태 전반에 작용하는 계급

계급은 쉼의 형태, 쉬는 공간, 쉬는 시간까지 좌우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쳇바퀴 굴러가듯 늘 반복되는 삶을 산다.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일하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한다. 부채를 져 미래가 저당 잡혀서든, 오늘 한 끼를 버티기 위해서든, 목돈을 모아 안정적인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든. 살기 위한 발버둥 끝에 쉼의 자리는 없다. 쉼이 왜 불가능한가를 묻는 건 삶의 존엄성을 해치는 원인을 밝히고 쉼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쉼을 회복하기 위한 또 다른 과제가 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쉬지 않고 일하지만, 그 와중에도 누구는 더 잘 쉴 수 있고 누구는 더 잘 쉴 수 없다. 쉼은 불평등하다. 단지 부족한 게 아니다. 불평등하게 부족하다.

계급의 선들은 드라마 주인공들의 관계에 끊임없이 틈입하며, 그들의 마음을 어긋나게 만들기도 하고 이어내기도 한다. 그 많은 순간 중 정종현 청경, 안수영 주임, 하상수 계장, 박미경 대리 네 사람의 서로 다른 쉼의 형태가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출근 전 모닝커피를 마시는 장면이다. 계급의 순서대로 연출된다. 정 청경은 믹스커피를 타고, 안 주임은 핸드드립으로, 하 계장은 캡슐커피로, 박 대리는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신다. 이 장면은 커피를 내리기 위해 갖춘 장비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점차 돈이 많이 드는 장비로 레벨업 되는 것 말이다.

그렇다고 식사 후 믹스커피 한잔의 여유가 가치가 없다거나 그들에게 아무런 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쉼의 형태에도 계급의 선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돈을 많이 쓴다고 해서 더 좋은 쉼이 아니고, 충만한 안정을 줘 나의 존엄성을 지키는 쉼은 돈으로 계산되거나 측정될 수 없다. 하지만 쉼의 불평등은 주관적인 만족감과는 별개로 끊임없이 누군가의 쉼을 불가능하게 하는 객관적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쉼의 공간 또한 대비된다. 저녁에 퇴근하고서 바라보는 도시의 전경은 같지만, 그걸 바라보는 시선이 자리한 공간은 다르다. 누구의 집은 고층 아파트고, 누구의 집은 옥탑방이다. 점심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안 주임은 공원으로 향한다. 박 대리는 에스테틱으로 향한다.
 
더 많아지고, 더욱 열려야 하는 쉼의 자원

왜 누구는 쉬고, 누구는 쉬지 못하는가? 왜 누구는 더 잘 쉴 수 있고 누구는 더 잘 쉬지 못하는가? 더 좋은 쉼을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최근 '쉼이 있는 삶'을 위한 정치를 모색하는 책, <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이승원, 2022, 돌베개)>이 출간됐다. 이승원은 자기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쉼'을 가능하게 하려면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기 결정권과 자원 접근성, 그리고 이를 주장할 때 타인의 그것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의 소유물만이 쉼의 자원인 건 아니다.

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보여주는 쉼의 공간 중 하나가 공원이다. 안 주임과 정 총경이 나란히 앉아 도시의 야경을 보던 공원 벤치, 안 주임이 점심시간에 나와서 도시락을 먹으며 바람을 쐬고 뛰노는 아이들을 보던 놀이터의 테이블 등. 그건 누구의 것도 아니다. 돈을 내고 입장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계급 사다리 아래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에게도 쉼이 가능한 건,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쉼의 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승원은 쉼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경제적 구조를 들춰내기 전에, 우리 곁에 쉼의 자원이 가깝게 붙어 있었던 순간을 회상한다. 마을 입구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느티나무 아래는 누구에게나 열린 쉼의 공간이었다. 그때 그대로 돌아갈 수 없지만, 쉼의 자원을 모두가 평등하게 누렸던 순간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에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모두에게 평등하게 열린 쉼의 자원은 지금도 존재한다. 그런 자원이 더 많아지고 더 사람들의 삶에 가까워져야 한다.

최근 동네 인근에 현수막 하나가 걸려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앞 공원에 공용 화장실을 설치하는 걸 반대한다는 현수막이었다. 공용 화장실을 설치하면 배달 라이더, 택배 기사 등 온갖 사람이 오가며 담배꽁초 등 주변이 더러워지고 밤에는 불량 청소년들이 모여서 분위기가 나빠진다는 게 이유였다.

오히려 그들에겐 쉴 곳이 없다. 배달하다, 택배 나르다 잠시 길가에 오토바이와 차를 대고 잠시 짬을 내서 쉴 수 있을 뿐이다. 어떠한 이유로 집을 나왔거나 학원에 다닐 수 없는 청소년들에겐 안정을 취하고 어울릴 곳이 없다.

그들에게도 안 주임과 정 총경이 찾았던 공원과 같은 장소가 절실하다. 한때 추진되었던 택배·배달 노동자 쉼터 같은 공간 말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건 그런 장소가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타자의 쉼을 침해하지 않도록 평등한 쉼을 보장해야 한다. 서로 다른 쉼의 형태를 존중하면서도, 그 쉼이 자기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쉼이 되도록 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일까. 이야말로 과로 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절실한 질문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선전위원이신 박기형 님이 작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3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노동자_과로, #노동자_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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