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6 05:06최종 업데이트 23.03.1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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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편집자말]
 

소셜 코리아는 지난 8일 오후 이정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협의회 부대표를 만났다. 인터뷰는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됐다. ⓒ 소셜 코리아

 
딸은 유난히 독립심이 강했다. 간섭받는 것을 싫어했다. 힘든 시기를 잘 못 느끼고 키웠던 아들과 달리 중학교 시절 사춘기도 찐하게 겪었다. 사춘기인 줄 모르고 혼내기만 했던 당시의 기억이, 남겨진 아버지에겐 가슴 한 편에 멍울로 남았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61) 부대표의 딸 고 주영(사망 당시 28세) 씨는 2주간의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 친구와 함께 결혼 준비차 외출했다가 변을 당했다. 3년 전 디자인 회사를 나와 캐릭터 사업을 한다고 숱한 고생을 하다가 교보문고에 입점하는 등 사업 성과도 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딸의 사무실을 정리한다고 갔더니, 제작 주문한 캐릭터 상품이 담긴 택배 상자들로 가득했어요. 여러 계약처에서 입점 의뢰도 많이 들어오는 상황이어서 사업으로도 분수령이 아니었나 싶었죠. 만들었던 제품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 끝에 잘 포장하여 딸 장례에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보냈습니다. 딸과 인연이 있는 분들에게 보내드리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대표 부부는 한동안 딸아이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유가족들과의 모임에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유대감을 경험한 뒤부터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부부는 동생을 제 몸처럼 아꼈던 아들과 함께 시간 날 때마다 딸을 회상하는 대화를 나눴다. 격한 슬픔은 조금씩 차분해졌지만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분노는 더 치솟았다. 

이 부대표는 이종철 대표와 함께 유가족협의회를 이끌고 있다. 지난 2월 4일 서울 시청광장의 합동 분향소 설치를 주도하고 각종 언론 인터뷰에도 적극 임하고 있다. 유가족을 대표하는 일을 맡게 된 이면엔 "무조건 맡아야 한다"는 아내의 독려가 있었다.

진상 규명에 소극적인 정부의 태도나 보수단체의 가해와 위협 등으로 인해 좌절감을 느끼고 그만두겠다 결심했을 때는 아들이 거들었다. "후회는 없어야 한다"는 아들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참사 이후 기르기 시작했다는 수염에선 결기가 느껴졌다. 

"핵심 목격자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아"
 

고 이주영 씨가 남긴 캐릭터 문구 상품들 ⓒ 소셜 코리아

     
사고 당일 이태원엔 1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관련 기관들의 대응은 오히려 예년만 못 했다. 인파 관리 필요성을 경찰 당국 내에서도 제기했으나 실제 대응은 마약 등 범죄 예방에 쏠렸다. 정부의 부실 대응에 대해 책임론이 제기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정부·여당 내에선 당시 인근의 시위대 책임론, 어처구니없는 마약 투여 의혹 제기, 피해자 가족에 대한 막말 등 있을 수 없는 책임 회피와 전가가 잇따랐다. 

"사고 신고가 접수된 시점부터 본격적인 인력 투입이 이뤄지는 11시 30분까지 50분간 쓰러진 아이들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었죠. 당시 현장엔 마약 수사관 50명도 배치돼 있었는데, 핵심 목격자인 이들에 대해선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경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됐고, 국정조사까지 마무리됐지만 유가족 협의회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까지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입장이다. 추모 시설 설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서울시와의 줄다리기도 이들에겐 버거운 짐이다. 

책임져야 할 이들의 회피, 어쩔 수 없는 자기 방어기제라 치부할 수 있겠다. 그러나 노골적인 보수단체의 위협과 2차 가해 그리고 이들의 행동을 부추기는 제도권 정치세력, 그들의 사회적 폭력을 사실상 방조하는 공권력의 행태는 더 할 말을 잃게 한다. 오죽하면 이종철 대표가 "살고 싶은데 손을 내미는 이가 없다"고 했을까.

유가족에게 정말 상처를 주는 건, 보수단체의 위협보다 공권력이 이들을 방조하거나 지원하는 듯 느껴질 때라고 이 부대표는 말한다. 국민의힘에선 거짓 의혹 제기도 잇따랐다. 지난해 12월 11일 송언석 의원은 본회의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참사 현장에서 300m나 떨어진 곳에 시신이 있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제기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 빈축을 샀다. 

"정치권의 막말과 모욕적인 발언이 보수단체와 유튜버들에게 암시를 줘서 더 거친 막말로 비화하며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공격을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를 만끽하려 했을 뿐인 젊은이 159명이, 어처구니없는 안전망 부재로 인해 생때같은 생명을 잃었다. 그곳에 '국가'는 없었다. 아니, 그 이후에도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공직자의 엄중한 책무는 보이지 않는데, 권력을 누리고 기득권을 키우려는 정치꾼들은 넘쳐난다. 자유를 누구보다 강조하고 '민중의 노래'를 애창하는 윤석열 대통령 치하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건축업에 종사한 이 부대표는 부산에서 나고 자라 1990년대에 수도권에 정착했다. 건축 설계에서 시작해 외도 없이 평생 한길을 걸었던 그는 퇴직 후 개인 사업을 준비 중이었다. 유가족 협의회가 '진보 진영'을 대변하느냐 물으니 이런 답변이 돌아온다.  

"결이 다르죠. 우리가 막연하게 정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정부가 잘못한 부분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진보 정부 하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들에게도 똑같은 요구를 하겠죠. 저는 정치적으로 중도 성향입니다. 보수든 진보든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련기사] 추모를 암매장... 세월호 때처럼 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https://omn.kr/232sp)
 

김중배 / 소셜 코리아 책임편집위원 ⓒ 김중배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중배는 <소셜 코리아>의 책임편집위원을 맡고 있으며, 민간 독립연구소 LAB2050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와 <연합뉴스TV> 기자로 17년간 재직하면서 주로 정치와 국제, 문화, 미디어 영역을 취재했습니다. 정당과 미디어 혁신에 관심이 많습니다. 인터뷰집 <성남 사람들 이야기> 등을 펴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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