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5 05:10최종 업데이트 23.03.15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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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 있는 헨리 7세 테라코타 흉상. ⓒ 위키미디어 공용

 
15세기 초 영국은 이탈리아 은행의 무거운 부채로 시달리고 있었고, 주요 수출품이라 해봐야 원료인 양모가 고작이었다. 부채를 갚아 나가기 위해 영국은 열심히 양을 길러 털을 깎아 팔아야만 했으니 당시 영국이란 나라는 변변한 제조업 하나 없는 가난한 농업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영국 왕 헨리 7세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에 망명 중이었다. 그곳은 고국에 비해 훨씬 부유하고 풍족했다. 깊은 고민 끝에 그는 영국이 가난하고 부르고뉴가 부유한 이유를 알아냈다. 영국은 양모라는 원료를 채집하는 데 그쳤지만, 부르고뉴는 그 원료를 수입해 모직물을 '제조'하고 있던 것이다.


제조업은 기계를 적용하기 쉬워 제품을 효과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나아가 제조업은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도 있었다. 생산 규모가 커짐에 따라 생산 단가가 오히려 하락하는 마술(!)이 일어난 것이다. 목축업이 레드오션이라면 제조업은 그야말로 블루오션이던 것이었다. 아, 농·목축업이 아니라 제조업이야말로 국부의 원천이로구나!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이제 분명해 보였다. 망명에서 돌아온 헨리 7세는 영국을 제조국으로 재편하는 전략에 돌입했다. 국가는 모직물제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의류 관세를 인상하는 한편 방직 창업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양모 수출도 전면 금지했다. 모직물 산업에 부여되었던 특혜들은 새로운 산업에도 부여되었다.

급기야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영국은 빈곤한 농업국가로부터 자립적인 '세계의 공장'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과 근대화는 '독립된 국민국가'라는 강력한 제도의 산물이며, 그 제도가 주도적으로 수립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산업정책'의 결과였다.

국민국가는 근대화의 핵심 조건
 

미국 사우스다코타주 남서부 블랙힐스에 있는 러슈모어산 화강암에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거대한 두상 조각이 새겨져 있다 ⓒ 위키미디어 공용


국민국가의 주도적 역할은 다른 산업 국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생 공화국 미국은 면화와 노예 사업에서 비교우위를 갖고 있었다. 헨리 7세의 영국처럼 자원기반산업, 곧 비제조업으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전근대적일 뿐 아니라 심지어 수치스러운 나라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미국이 산업화와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미국 경제학자 알렉산더 해밀톤은 국가가 주도해 제조업을 육성할 것을 강력히 제안하였다. 미국 주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벤저민 프랭클린, 에이브러햄 링컨, 앤드루 잭슨, 토머스 제퍼슨 등 미국의 정치가들은 하나같이 미국의 문제가 천연자원 채취산업에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국가의 강력한 산업정책으로 근대화와 자립을 추진하였다. 이 모든 것은 독립전쟁을 거쳐 국민국가가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독일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에 이르러 '역사학파경제학'으로 체계화되어 독일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크게 기여했다. '자유시장원리'에 따라 교역하면 독일경제가 자립해 영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영국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학설'을 단호히 거부하고, 강력한 국가의 산업정책, 곧 국가에 의한 보호무역과 제조업의 육성을 정책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다. 후진적 농업국 독일이 세계적 기술강국으로 등극했다는 사실을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국민국가의 위력이다.

일본의 경제 정책사를 살펴보면 향후 일본 경제의 성격을 규정한 두 가지 중요한 시점이 존재한다. 1868년의 메이지유신과 2차 대전 패전 후 1945년이 그것이다. 두 경우 모두 일본은 '독일경제학파'(도이츠가키)와 '영국경제학파'(에이가쿠) 중 하나를 전략적으로 선택해야 했다. 놀랍게도 두 경우 모두 독일경제학이 승리하였다. 일본 메이지유신 이래 적어도 1945년까지는 국가주도적 모델을 선호하는 '도이츠가키'가 일본 사회 형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

우리가 아는 선진국은 처음엔 모두 별 볼 일 없거나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처한 후진국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국민국가의 강력한 지도로 경제발전과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국민국가 없이 근대화는 없다. 더욱이 그 과정에 외세의 방해도 크게 없었다. 비주류경제학의 한 분파인 '제도경제학'이 근대화를 보는 시각이다.

국민국가 없이 근대화는 무망하다
 

전라북도 정읍시의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 서부원


조선은 어떠했을까? 조선 역시 별 볼 일 없는 전근대적 국가였던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 와중에도 농업 분야에서 '경영형 부농'과 '서민 지주' 등 유럽 근대사에서 등장했던 독립 자영농과 유사한 주체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또, 경강상인 및 개성상인과 같은 거부가 형성되었고, 보따리를 짊어지고 전국을 순회하는 보부상들이 상업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나아가 거래를 중개하고 금융을 조달하는 '객주'도 등장하였다.

수공업 역시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1830년대 장시에서 면포(253개소), 명주(46개소), 마포(150개소), 철물(96개소), 유기(81개소), 자기(50개소), 목물(92개소), 지물(47개소), 연초(181개소), 자리(86개소), 신발(13개소)이 활발히 거래되고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전근대 국가에서도 '자본주의의 맹아'가 적지 않게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는 의지도 여느 민족 못지않게 강했다. 조선에도 미국과 독일처럼 혁신적 지식인이 많았다. 1884년 개화파 혁신가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켜 근대화를 이룩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3일천하'로 끝나버렸다고 그 정신과 의지마저 폄하하면 안 된다.

민초도 침묵하지 않았다. 근대화에 대한 민중의 의지는 그 어떤 집단보다도 강력했다. 반봉건과 반외세를 주장하는 동학운동의 '12개조 폐정개혁안'은 근대화된 자주적 민주국가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수만 명이 죽고 수십만 명이 다쳤다.

앞에서 본 갑신정변의 참여자 가운데 '상놈'의 비중은 60~70%로 추산된다고 한다. 1898년 조직, 개최된 만민공동회, 1907년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도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민중의 노력이란 점을 기억하자. 민중이 근대화의 의지를 이토록 분명히 표명한 선진국을 본 적이 있는가?

고종 역시 개화파 혁신가들과 민중의 요구에 화들짝 놀라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고 식산흥업정책을 강화하고자 했고, 1897년 급기야 '대한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열강의 이권 침탈로부터 국내의 산업기반을 보호하는 한편, 기술 인력을 양성하고 기간산업과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하고자 했다.

손 놓고 대책도 없이 무기력하게 앉아있지만 않았으며, 조선에서도 '국가'가 근대화를 위한 강력한 정책을 시도한 것이다. 이 모두는 근대화를 지향하는 근대적 개인과 국민국가의 주체적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근대화를 위한 이 모든 자발적 운동은 결실을 볼 수 없었다.

왜 그런가? 먼저, 열강은 조선의 자립적 근대화 의지를 지속적으로 방해했다. "정부는 화폐개혁과 평양탄광채굴에 사용하기 위해 1901년 4월에 프랑스, 영국, 벨기에 자본으로 구성된 운남신디케이트(대한신디케이트)와 500만원 차관계획을 맺었지만 열강들의 견제와 방해로 차관도입이 무산되었다... 1901년 <화폐조례>를 공포하여 금본위제를 실시하고 중앙은행 역할을 할 대한제국특립제일은행을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차관도입이 무산"되었다.(<한국근대공업사 1876~1945>, 배성준, 2022, 푸른역사).

더욱이, 조선의 근대화와 산업화 의지는 이후 결정타를 맞았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가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와 함께 자립적 근대화의 의지는 결국 관철될 수 없었다.

물론 자본주의의 맹아와 근대화 운동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민족도 그런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맹아가 자생적으로 충분히 익은 후에야 근대화되지 않았다. 미약한 싹을 국가의 정치력과 민중들의 민족적 문화가 의도적으로 키워 주었던 것이다. 근대화를 위해 물적 토대 못지않게 '제도적 조건'과 '주체적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미국, 독일, 일본은 물론 '고전적' 자본주의 영국도 그런 과정을 통해 비로소 근대화를 이루었다. 그들은 어떤 방해를 받지 않았고, 국민국가를 상실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달랐다. 국가라는 가장 핵심적이고 강력한 국민국가를 잃어버렸다.

매국적 식민지근대화론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 대통령실


3.1절 기념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작년 10월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고 한 정진석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같은 시각이다.

그러나 근대화를 이룬 선진국이 모두 물적 토대를 튼튼히 갖춘 적도 없고, 특별히 제대로 된 준비를 한 것도 아니다. 근대의 여명기는 중세의 가을이다. 중세의 가을은 대체로 초라하다. 썩어 문드러지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썩어 문드러진 사회에서도 봄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근대의 여명기 조선에서도 혁신적 지식인과 지도자는 물론 수없이 많은 '상놈'과 농민들이 척박하고 가망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작은 맹아를 믿고, 썩어 문드러진 객관적 조건과 투쟁하면서 미래를 '준비'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다. 외세의 방해에 가로막혀 혁신가와 민중의 의지가 관철될 수 없었고, 최종적으로는 무력에 의해 국민국가를 잃었기 때문이다. 국민국가를 잃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윤석열과 정진석의 주장은 '식민지근대화론'에서 핵심적 교의를 따른다. '무능한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한국은 일본의 침략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나라를 팔아넘긴 자들이 수치심을 감추려 매국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120년 전 이완용도 그랬다.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힘이 없었기 때문이며 당연한 운명과 세계적 대세에 순응키 위한 조선민족의 유일한 활로이기에 단행된 것이다."

윤석열과 정진석은 알아야 한다. 조선은 속으로 썩어 문드러졌기 때문이 아니라, 근대화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제도적 장치인 '국민국가'를 빼앗겼기 때문에 망했다는 것을! 선진국의 역사가 분명히 보여 주듯 외세의 방해와 침략이 없는 조건 속에서, 주체의 의지가 굳건하고 국민국가만 건재하면 스스로 일어선다. 매국노들이 없다면 그 가능성이 더 커질 건 물론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 오히려 목소리가 큰 현실, 통탄할 일이다.


한국 근대 공업사 1876~1945

배성준 (지은이), 푸른역사(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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