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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어느새 40대. 무너진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 살기 위해 운동에 나선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편집자말]
요즘 친구들과 만나면 건강이 주요 화두가 될 때가 많다. 다이어트, 음식, 영양제 그러다가 운동 이야기. 이런저런 운동에 대해 말하다가 그중 누군가는 이젠 '달리기'라도 해야겠다 결심한다. 살을 빼기 위한, 건강을 위한 달리기. 수단으로서의 달리기다.

어디선가 달리기 이야기가 들리면 귀가 쫑긋 선다. 어떤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인다. 난 달리기에 관심이 많다. 나에게 달리기는 수단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목적이다. 달리다 보면 숨이 차고 힘이 들어 멈추고 싶은데도 희한하게 달리는 게 좋다.

마음이 가라앉는 때, 달리기를 합니다

달리고 처음 2~3km 정도는 호흡과 자세에 신경을 쓴다. 몸에 부담을 주지 않는 자세를 찾기 위해 허리의 각도를 조절하고 몸의 중심을 체크한다. 발 딛는 면에 주의를 기울이고 어깨에 힘을 뺀다. 그렇게 하나하나 신경 쓰며 달리다 어느 순간, 호흡이 일정해지는 시기가 온다. 그때 나도 모르게 사유가 찾아온다. 묵혀 두었던 글의 뒷 내용이 떠오를 때도 있고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고민이었던 일들이 정리될 때도, 복잡한 마음이 그냥 풀릴 때도 있다.

난 매년 이맘 때가 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새해의 굳은 의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호기롭게 정한 다짐들은 봄볕에 스르르 녹아버리는 것 같다. 어떤 다짐은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렵고 어떤 다짐은 너무 작아 지켜도 별 변화가 없다.

올해도 여지없이 그런 우울한 마음이 찾아왔다. 그래도 몸을 일으켜 한강을 뛰는데 코스의 반환점을 돌아오는 지점에서 평소엔 그냥 지나쳤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한강 다리 옆의 큰 흙더미. 원랜 다리 옆이 바로 한강 물이었는데 3년 전엔가, 큰비가 오고 난 뒤 흙이 떠밀려와 그곳의 한강 바닥이 넓어졌다.

당시에는 시간이 지나면 또 예전처럼 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흙이 떨어져 나가긴커녕 그곳에 다른 흙이 붙고 또 붙어 면적이 점점 넓어졌다. 몇 달이 지나니 그곳에서 싹이 나고 식물이 자랐다. 처음에 신기하던 그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날은 그곳에 많은 새가 와서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비가 내린 후 흘러 온 흙더미가 점점 넓어지더니 새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 원랜 없었던 한강변의 풍경  큰 비가 내린 후 흘러 온 흙더미가 점점 넓어지더니 새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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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경을 보며 달리는데 나도 모르게 생각이 확장됐다. 내가 매일 쓰는 문장도 이런 게 아닐까. 몇 문장 쓰지 않지만 별 것 아닌 그 문장이 또 다른 문장을 부르고 불러 결국엔 하나의 글을 만들지 않을까. 그렇게 완성된 글이 누군가에게 쉼이 되고 위로가 되는 장면을 상상한다. 나는 한 없이 부족한 사람이고 잘 넘어지지만 그 사유를 붙잡고 또 살아갈 힘을 얻는다.

'공모전 당선'이라는 목표를 품에 안고

얼마 전에는 미세먼지로 한참을 못 뛰다 오랜만에 뛰어 그런지 움직임이 아주 둔하게 느껴졌다. 불필요한 움직임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니 조금씩 힘이 났다. 그렇게 호흡이 익숙해졌을 즈음 갑자기 1월 1일에 했던 목표 체크 및 새해 계획 세우기 이벤트가 생각났다. 비밀 노트에 매년 자신의 목표를 쓰고 그다음 해 1월 1일에 얼마나 목표를 달성했는지 확인하는 가족 이벤트다.

비밀 노트는 일년내내 테이프로 칭칭 감겨있다가 1월 1일에만 조심스럽게 개봉된다. 이번에는 비밀 노트를 연 김에 지난 3년간 정했던 목표를 훑어보았다. 딸은 피아노라면 질색을 하는데 3년 전에는 '소곡집의 18번, 19번을 안 보기 치기' 같은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할 목표가 적혀 있었다. 우린 그 목표를 보며 깔깔 웃었다.

남편은 돈에 관한 목표가 많았다. 얼마를 벌고 어떤 계좌를 만들고 하는 목표들. 나는 안타깝게도 3년 내내 1번 목표가 같았다. 공모전 당선. 남편과 아이는 내 목표를 보고 하하하 웃었다. 다른 목표들도 매년 거의 비슷하다. 운동 관련 목표, 독서에 대한 목표들. 에이, 내 목표는 재미가 없네. 난 시무룩해졌다.

달리며 그 일이 퍼뜩 떠올랐는데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3년 내내, 아니 올해까지 4년째 공모전 당선이라는 목표를 가질 수 있다니. 공모전에 응모할 수 있는 환경이 3년 내내 조성됐다니.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있고 큰 에너지가 들지 않는 벌이(물론 큰돈을 벌진 못한다)가 있고 아이는 거의 손이 가지 않을 정도로 컸다. 아, 이런 내가 감사한 시간을 누리고 있구나.

몇 년 전에 읽은 김금희의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란 소설의 한 부분이 생각났다.
 
"너는 가끔 잊는 것 같아. 너가 되게 운이 좋은 아이라는 것."
"내가 뭐가 운이 좋니? 운이 좋으면 이렇게 몇 년을 임용고시를 못 붙겠어?"
"그러니까 그 못 붙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다는 거야." (33쪽)
 
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날 둘러싼 환경들이 나에게 '조금만 더해!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 주고 있잖아!'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역시 문제는 나 자신이다. 감사가 우울을 덮었다. 올해는 조금 더 해봐야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솟는다.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사유들이 달릴 때 떠오르니,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세먼지로 흐린 날이 계속되던 중 오랜만에 쨍한 일출을 만났다.
▲ 러닝하며 마주한 일출 미세먼지로 흐린 날이 계속되던 중 오랜만에 쨍한 일출을 만났다.
ⓒ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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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매일 사유가 찾아오는 건 아니다. 어떨 때는 아이와 싸운 일, 드라마 내용 등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흘러갈 때도 많다. 그러나 가끔 찾아오는 큰 사유가 내겐 힘이 된다.
 
"장거리 달리기가 궤도에 오를 때마다 생각이 멈추고 사유가 시작되는 시점이 온다. 가끔은 이런 것이 가치가 없지만, 또 가끔은 그렇지 않다. 달리기는 사유가 들어오는 열린 공간이다. 나는 생각을 하려고 달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달릴 때 사유가 들어 온다. 사유는 추가적인 보너스나 대가처럼 달리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유는 달리기, 그것도 진정한 달리기의 일부이다." (<철학자와 달리기> 중에서)

위의 책의 다른 부분에선 이런 내용도 나온다. 성인의 뇌세포가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달리기는 이를 촉진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나이 들어 기억력이 나빠졌다고 한탄만 하지 말고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자. 처음부터 달리기 자체가 목적일 순 없다. 마음과 몸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꾸준히 달린다면 어느새인가 달리기 자체를 좋아하게 된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물론 안 맞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운동과 명상이 동시에 되는 이런 매력적인 운동이라니. 혹하지 않는가.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바쁘게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어느새 40대. 무너진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 살기 위해 운동에 나선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태그:#달리기와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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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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