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0 10:06최종 업데이트 23.02.10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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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이 7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에서 열린 51차 전체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연합뉴스


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발표한 삼청교육대 피해 진상은 이 문제를 알리고 국가폭력 위험성을 경고한다는 측면에서 의의는 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 활동 방식에 내포된 문제점에도 주목하게 만든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이번 조사의 핵심 성과로 제시한 학생 삼청교육대 부분이 그런 점을 보여준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배포한 보도자료는 '학생들까지 삼청교육대 입소··· 학생 삼청교육대 실체 확인'이라는 소제목 하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이번 2차 진실규명에서는 학생들까지 입소시킨 '학생 삼청교육대'의 존재와 인권침해 사례가 드러났다. 학생 삼청교육은 계엄사령부의 1980년 9월 19일 2단계 순화교육 입소 계획에 따라 '학생 불량자' 600여 명에 대해 1980년 9월 20일부터 10월 18일까지 제11공수여단에서 실시됐다."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 정리법) 제4조는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 9명을 대통령이 지명하는 1명과 국회가 선출하는 8명으로 구성하도록 했다. 입법부와 행정부의 합력으로 진실화해위원회를 구성하게 한 것은 이 위원회가 대한민국을 대표해 진실 규명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화해위원회는 종전에 대한민국 국가기관에 의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사안에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여타 국가기관들에 의해 충분히 규명된 사안에 역량을 집중한다면, 굳이 진실화해위원회를 별도로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많이 규명된 사안에 역량을 대거 투입하면, 다른 사안들에 대한 조사가 지장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사 정리법 제1조는 "이 법은 항일독립운동,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진상규명 대상으로 지정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 국가권력에 의해 인권침해를 당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승만·박정희 같은 독재정권 치하에서 고난을 겪은 수많은 사람들과 그 유족들이 아직까지 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과거사 정리법 제1조는 그런 이들에 대해 균형 있는 배려를 요구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 시기의 대표적 인권침해사건인 삼청교육대 문제와 관련해서도 추가적인 진상규명과 더불어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이 당연히 필요하다. 이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규명 노력은 당연히 계속돼야 한다.

과거 언론보도에서 이미 다뤄져

하지만 이번 발표를 보면 진실화해위원회가 이미 충분히 알려진 부분에까지 조사 역량을 투입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위 보도자료에 나오는 "학생 삼청교육대 실체 확인", "학생들까지 입소시킨 학생 삼청교육대의 존재와 인권침해 사례가 드러났다" 같은 표현을 접하게 되면, 이에 관한 국가기관 차원의 조사가 이번에 처음 이뤄진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6월항쟁 이듬해인 1988년에는 그해 2월에 퇴임한 전두환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폭발하고 3월부터 그의 친인척들인 전경환·전기환·전우환·홍순두 등이 잇달아 구속됐다. 친인척 8명이 감옥에 들어간 상태에서 그해 11월 23일 전두환·이순자 부부가 설악산 백담사로 올라갔다.

그런 분위기에서 삼청교육대에 대한 국가기관들의 조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학생 삼청교육대에 대한 조사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10월 21일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문교부는 20일 전국 시·도 교위를 통해 고교생 삼청교육 이수자를 조사한 결과, 지방 학생이 1백 13명으로 확인됐고, 서울은 지난 19일 국정감사에서 20여 명으로 밝혀져 전국적으로는 모두 1백 30여 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 기사에서는 학생 삼청교육대 피해자가 130여 명으로 언급됐다. 위의 진실화해위원회 보도자료에서는 600여 명으로 언급됐다. 이런 숫자 차이를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성과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 1988년에 위 <조선일보> 보도가 나온 뒤 학생 삼청교육대 피해 사례가 추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해 12월 21일자 <동아일보>는 지금의 경찰청인 치안본부의 조사 결과를 이렇게 소개했다.

"계엄하인 지난 80년 8월 4일부터 81년 1월 24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실시된 '사회악 사범 일제 검거' 때 검거돼 삼청교육대에 넘겨진 3만 9천 7백 86명의 입소자 중에는 고교생 9백 80명을 비롯, 교원(교수 포함) 13명, 언론인 35명, 약사 및 의사 10명, 공무원 32명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문교부나 치안본부의 조사 결과 외에, 국방부에 의한 조사 결과도 보도됐다. 10대 피해자들의 삼청교육대 입소를 보도한 그해 10월 8일자 <한겨레>에는 국방부 조사 결과가 소개됐다.

이번에 진실화해위원회가 제시한 학생 삼청교육대의 구체적 실상도 당시 언론보도에서 다뤄졌다. 학생 삼청교육이 군부대에서 이뤄졌으며, 이런 사실을 숨기고자 학교 출석부를 조작한 사실도 보도됐다. 학생 피해자 130여 명에 관해 보도한 위의 <조선일보> 기사는 "12명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고 나머지는 삼청교육 기간이 수업 일수로 인정돼 졸업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지금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야 할 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과거사를 정리하는 기관이지 과거 조사를 재정리하는 기관이 아니다. 위원회가 내놓은 보도자료보다 훨씬 상세한 내용이 1988년에 이미 보도된 상황에서, 위원회가 이번 조사 결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이 국가배상을 받도록 지원하는 일은 마땅히 필요하지만, 진상규명 기관의 조사 역량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일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그런 역량의 효율적 배분에서 문제를 겪을 수 있다는 점은 김광동 위원장의 행보에서도 감지된다. 일제 식민지배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고 제주 4·3이나 광주 5·18 등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김광동 위원장은 인민군에 의한 것보다 미군과 국군에 의한 것이 더 많았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균형 잡힌 시각을 갖지 못하고 있다.

2007년 11월호 <북한>에 수록된 '6·25 전쟁 중 북한군과 좌익의 양민 학살'이라는 기고문에서 그는 미군과 국군에 의한 학살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작전'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인민군에 의한 학살로 시선을 끌었다. 지난 1일 취임 이후 첫 현장 행보로 인민군에 의한 충남 기독교회 학살 현장을 방문한 것은 앞으로 그가 어떤 행보를 걸을지 예고하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군에 의한 기독교 학살을 규명하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전체적으로 조명하는 것도 중요하다. 김광동 위원장이 이끌 진실화해위원회의 향후 조사에 대해 우려를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과거사 정리법 제1조에 명기됐듯이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해야 할 것들은 산처럼 수두둑하다. 김광동 위원장이 근대화됐다고 인식하는 식민지배기간에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제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당했다. 정부수립 이후의 독재정권 하에서도 인권침해가 비일비재했다. 이런 사건들 중에는 삼청교육대보다 훨씬 덜 알려진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지금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충분히 알려진 사안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다. 꼭 규명해야 할 여타 현안들에 대해서도 조사 역량을 균형 있게 배분하는 일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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