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탈취된 무기는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한 명의 군인이자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한 청년의 생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황당하고도 비극적인 2007년의 그 사건이 벌어진 그곳에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군복무를 하다가 자신의 목숨을 바친 젊은이의 숨겨진 희생이 있었다.
 
1월 2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사라진 K2 - 2007 해병대 총기탈취범과의 일주일' 편을 통하여 세간의 주목에 잊혀졌던 2007년 강화도 해병대 총기탈취사건의 진실을 조명했다.
 
사건은 지난 2007년 10월 경기도 이천의 중고차 매장에서 시작된다. 그랜저를 몰고 매장에 등장한 남자는, 차량을 구매하겠다며 시승을 위하여 코란도 차량에 탑승했다가 갑자기 문을 닫아걸더니 직원을 내버려둔 채 차를 몰고 도주했다. 놀란 직원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범인이 매장에 버려두고 간 그랜저를 조사한 결과, 놀랍게도 그 역시 얼마전에 도난 당한 차량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경찰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범인과 차량의 행적은 묘연했다. 이때만 해도 범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이 사건이 더 엄청난 사건의 시발점에 불과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약 두 달 후 도난당한 코란도 차량이 뜻밖에도 강화도에서 발견된다. 코란도는 번호판을 바꾸고 차량 앞부분에는 충돌 효과가 일반범퍼보다 9배나 큰 캥거루 범퍼(철제범퍼)로 개조된 상태였다.
 
차량 절도범의 진짜 목표가 마침내 드러났다. 2007년 12월 6일 오후 강화도 초지리에서 초병 경계근무를 마치고 귀대하던 해병대원 2명이 돌진한 차량에 습격 당하여 총기와 실탄을 탈취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K2 소총 1정과 실탄 75발, 수류탄 1발, 유탄 6발을 탈취하여 달아났다.
 
범인이 확보한 살상무기는 민간인을 상대로 테러라도 저지를 경우, 엄청난 인명피해를 야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군과 경찰은 합동으로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몇 시간 후에는 범행장소에서 90Km 정도 떨어진 경기도 화성에서 코란도 차량이 전소되며 범인과 관련된 증거가 소멸된 채로 발견됐다.
 
군과 경찰은 범인이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했다는 것을 파악하고 행적을 추적했다. 청북톨게이트에서 범인을 목격한 직원이 목격자로 등장했지만 아쉽게도 얼굴을 보지 못 했다. 용의주도한 범인이 차량에 햇빛가리개를 설치하여 CCTV에서도 정확한 인상착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은, 바로 습격 당한 해병대원들이었다. 강화도는 북한과 인접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간첩들이 자주 침투했던 역사가 있었고, 365일 연중무휴로 해병대가 삼엄한 경계근무를 실시하고 있었다.
 
2007년 당시 군에서 복무했던 해병대 소황산 분초대원들이 특별출연하여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당시 송명근 상병과 박정환 병장 등은 "그 사건이 터지고 지옥같은 동네가 됐다", "내가 나갔더라도 그때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동료들이 피습 당했던 그날의 충격적인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습격 당했던 해병대원은 복무 7개월차였던 20세의 박영철 일병과 이 병장이었다. 함께 복무했던 동료들은 박 일병이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입대를 서둘렀을 만큼 지극한 효자였다고 증언했다.
 
사건 당일, 범인은 도로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초병 근무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던 두 병사를 차량으로 뒤에서 습격했다. 박 일병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고, 이 병장은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몸을 가누지 못 하는 상태가 됐다. 이 병장은 이때만 해도 우발적인 교통사고라고만 생각했고, 자신들이 누군가에 공격 당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고.
 
차에서 내린 범인은 두 사람의 상태를 걱정하는 척 말을 걸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돌연 회칼을 꺼내어 무차별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범인이 노린 것은 두 사람이 가진 총기였다. 이 병장은 부상 당한 상태에서도 개머리판으로 범인의 머리를 치며 강하게 저항했다. 그 와중에 범인의 모자가 날아가며 얼굴이 드러났다. 범인은 이 병장을 발로 걷어차 갯벌로 밀어넣었다.
 
범인은 이어 박 일병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의식을 찾은 박 일병이 혼미한 상태에서 총과 실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소총끈을 팔에 감고 끈질기게 버텼다. 흥분한 범인은 다시 수차례 박 일병에게 잔혹하게 칼을 휘둘렀다. 결국 범인은 이 병장의 총기와 박 일병의 탄통을 빼앗아 달아났다.
 
현장에 출동한 분초대원들은 참혹하게 피를 흘리며 쓰러진 두 사람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이 병장은 다행히 병원으로 이송되어 목숨을 건졌지만, 7군데나 칼에 찔린 박 일병은 장기손상과 과다출혈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박 병장은 박 일병의 손이 힘없이 추욱 떨어지는 순간을 떠올렸다. 송 상병은 "영철이가 하늘에 먼저 갔다"는 소식을 들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침통한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군경 합동수사본부는 치밀한 사전 준비와 행적을 고려하여 범인을 인근 부대 전역자로 추측했다.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모자와 혈흔 등의 증거를 토대로 몽타주를 작성하고 추적에 나섰다. 하지만 범인의 행적은 묘연했다. 하필 비슷한 시기에 태안 앞바다에서 최악의 원유 유출 사고가 발생하며 총기탈취사건에 대한 세간의 주목도 묻혀버렸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범행의 동기에 대해서도 추측이 분분했다. 당시가 17대 대통령 선거기간과 겹치면서 가장 당선이 유력한 주자였던 이명박 후보를 향한 테러 가능성이 거론되어 긴장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런데 범인의 행적은 의외의 장소와 타이밍에서 드러났다. 사건 발생 5일째 되던 11일, 범인이 놀랍게도 부산에서 경찰에 먼저 자수 의사를 밝히며 선처를 구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은 마치 초등학생이 장난을 친 것처럼 맞춤법이 잘 맞지 않고 어눌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에 군경은 반신반의했으나 편지에 아직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은 내용들이 담겨 있는 것을 보고 진짜 범인의 편지가 맞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군경은 편지에 따라 범인이 무기를 버린 장소라고 고백한 전남 장성군 백양사휴게소 인근에서 탈취된 총기와 실탄 등을 모두 발견하여 회수했다. 또한 편지에 남겨진 지문으로 범인의 신원을 확인하고 거주 지역을 파악했다. 경찰은 잠복수사 끝에 사건 발생 6일째 되던 12월 12일에 범인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드러난 범인의 정체는 국민들에게 충격과 허탈함을 안겨줬다. 범인 조씨는 해병대 전역자도, 간첩이나 특수부대 출신도 아니었다. 금속공예를 전공하고 대학원까지 졸업한 평범한 민간인 보석디자이너에 불과했다. 그는 평소 과대망상적 사고에 깊이 빠져 있었고, 범행동기는 어처구없게도 전 국민이 알 만한 대형사고를 터뜨려서 헤어진 여친에게 충격을 주어 복수하고 싶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전 국민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무고한 목숨까지 앗아간 총기탈취 테러사건의 황당하고 씁쓸한 진상이었다.
 
범행장소를 강화도로 택한 것도 평소 낚시를 자주 다니가다 총을 멘 병사들이 도보로 이동하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범행 후 TV뉴스를 계속 지켜본 조씨는 범인의 DNA가 확보되었다는 보도를 보고 겁이 나서 총기를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씁쓸한 것은 조씨가 총기를 들고 경기 화성에서 전남 장성까지 교통수단을 바꿔가며 이동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검문검색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씨는 자수 편지를 쓸 때도 장갑을 착용하여 왼손으로 편지를 작성하는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였으나, 정작 편지를 보내기 직전에 장갑을 벗고 편지지를 만져서 지문을 남긴 어이없는 실수 한 번으로 꼬리를 밟혔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일주일 사이, 박 일병의 영결식이 열렸다.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부모님은 상복조차 갖춰 입지 못하고 아들을 황망하게 떠나보내야 했다. 12월 8일 진행된 영결식에서 유족들과 해병대원들은 슬픔을 참지 못 하고 오열했다.
 
범인 조씨는 민간인 신분이지만 군인을 해치고 군무기를 탈취하여 군사법정으로 넘겨졌다. 군사법정은 조씨에게 사형을 구형했지만, 항소하여 2심에서는 놀랍게도 징역 15년으로 감형됐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근무장소가 민간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지역이라 피고인이 초병임을 인식하고 공격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 '처음부터 칼을 쓰지 않은만큼 살해의 고의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피고인이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나 병역을 이수했고 전문적인 직업을 가져 교화-개선의 여지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등의 이유를 감형의 근거로 제시했다.
 
어이없는 판결에 유족과 국민들은 분노했지만, 대법원에서 15년형은 최종적으로 확정됐다.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군복무를 하다가 변을 당한 두 병사의 억울한 피해는, 적군과 싸우다가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용히 묻혀버린 측면이 있다.

심지어 유족과 해병대원들의 마음에 더욱 비수가 된 것은 오히려 '군인이 총기를 지키지 못했다'는 일부의 어처구니없는 비난이었다. 박 일병의 유족들은 16년간 재심을 신청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도 차마 하지 못 하고 피해자임에도 죄인처럼 침묵하고 살아야했다.
 
박 일병과 함께 복무했던 동료들은 "힘들고 무서웠을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회상하면서 "이제는 걱정말고 편히 쉬웠으면 좋겠다. 너는 충분히 잘했고 진짜 해병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고 고인을 추모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부친 박종영씨는 요즘도 날씨가 흐리면 아들이 생각난다며 "아들아, 자랑스럽다"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고백했다.
 
박 일병은 사망 이후 일계급 추서되어 상병이 되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 하기 위하여 끝까지 총기를 놓지 않았던 고인만큼의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순간 박 상병은 누구보다 용감한 진정한 군인이었다.
 
군인에게 총기란 국가를 지키기 위한 도구다. 이처럼 우리가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젊은 청춘들의 노고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누구도 그들의 총을, 그들의 국가를 목숨을 걸고 지키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2007년 그날의 이야기를,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꼬꼬무 강화총기탈취사건 해병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