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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면 텃밭에서 작물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비닐하우스가 없는 노지에서 생산되는 소량의 채소를 먹기에 가을이 지나면 꼼짝없이 식재료를 사 먹어야 한다. 장 볼 때마다 나오는 플라스틱 포장이 싫어서 텃밭 신세를 지는 우리 가족으로서는 겨울 쇼핑이 은근히 스트레스다. 그렇다고 무소유와 비소비를 실천하는 금욕주의자는 못 되는 성격이라 어떻게든 친환경 장보기와 타협점을 찾는다. 

우리가 제일 흔하게 써먹는 수법은 '용기내 소비'가 가능한 상점과 안면을 트는 것이다. 개인용기를 가져가서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은 대부분 소규모 자영업 매장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은 정교한 매뉴얼에 따라 운영되기에 기포장된 상품이 많고, 오너가 아닌 점원 분이 재량껏 대처하기가 힘들다.

내가 만든 '용기내상점' 지도
 
포장용기에 담아 온 슈톨렌(통 옆의 랩에 싸인 하얀 덩어리)과 에그타르트 그리고 롤케이크
 포장용기에 담아 온 슈톨렌(통 옆의 랩에 싸인 하얀 덩어리)과 에그타르트 그리고 롤케이크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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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나름의 '용기내 상점 지도'를 가지고 있다. 가령 아이들이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슈톨렌은 아파트 단지 앞 예약제 베이커리에서 가져왔다. 사장님이 지역 카페에 판매 게시글을 올리면 덧글로 구매 의사를 남긴 후 수령하는 방식의 가게인데 좋은 재료를 쓰고 매우 맛있다. 

예약제 구매방식의 좋은 점은 미리 문자나 채팅으로 '개인용기 구입'이 가능한지 의사를 물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용기내 프로젝트를 꺼리는 주요한 이유는 기껏 힘들게 챙겨간 개별 용기를 거부당하거나, 판매자를 당황하게 만들어 관계가 어색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약제로 구매를 하면 비대면 상태에서 사전 조율이 가능하므로 편리하다. 

사장님 입장에서도 크게 손해 볼 것은 없다. 사적인 사정으로 맺어진 관계는 일반적인 손님 주인 관계보다 더 끈끈하고 오래가기 마련이다. 우리만 해도 한 번 거래를 터서 괜찮은 가게라고 인식되면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단골로 이용한다.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가게를 찾는 것이 귀찮을 뿐더러 마인드가 좋은 사장님의 가게를 키워주고 싶다는 응원 심리도 묘하게 작용해서 좀처럼 단골 가게를 바꾸지 않는다. 

작은 가게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면 아이들에게도 멋진 교육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유치원 무렵부터 반찬통에 에그 타르트를 담아 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큰아이는 능숙하게 "여기 담아주세요" 하고 말할 줄 안다. 원래 통에 받아오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그런지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고 담담하다. 사장님도 자주 드나들며 인사를 나눈 사이라 반가워하신다. 가끔은 아이들 이름을 기억하셔서 말도 붙여 주시고, 서비스로 요구르트를 건네주기도 한다. 

마을이 아이를 키운다는 말들을 하지만 아파트 촌에 사는 우리 가족으로서는 옛 시골 같은 마을을 기대할 수 없기에, 친밀함을 공유하는 마을 네트워크를 조금씩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마을이 아무리 커도 아이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무용지물 아닌가. 

용기내 프로젝트의 미덕은 가게 주인과 손님이 최소한의 대화라도 하면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이다. 김밥집 아저씨와 눈인사를 하고, 빵집 아주머니와 안부를 묻는 정도만 되어도 왠지 가까운 이웃이 된 기분이 들므로 쇼핑이 한결 편안해진다.

나는 처음에 포장지를 줄여보고 싶다는 환경적인 염려에서 개인용기를 챙겨 다녔지만 뜻밖에도 '사장님과의 좋은 관계'라는 수확을 얻었다. "단순히 자주 이용하니까 주인이 좋아하는 거 아니야?"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무인 매장 혹은 이미 포장된 제품을 얼른 계산하고 나오는 구매 방식이 보편화된 시대에서 나는 약간의 인간적인 대화가 오가는 짧은 시간이 따듯하고 의미 있게 느껴진다. 

"저기 죄송한데요, 환경오염이 신경 쓰여서 그런데 큰 반찬통 같은 걸 가져가서 받아와도 되나요?"

이렇게 물었을 때, 내가 단골 가게로 마음을 열게 되는 곳의 사장님들은 한결 같이 반겨주신다. 

"너무 좋은 생각이세요. 안 그래도 내가 장사를 하긴 하지만 너무 포장하면서 계속 마음 쓰였거든요."

우리 집 아이들도 포장 용기를 들고 갈 때마다 칭찬 비슷한 것을 들으니 강화가 되어 가는지 표정이 밝다. 엄마 아빠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어른이 있어 안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 닭꼬치를 좋아했다.

용돈으로 사 먹을 때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분식집에 전화를 걸어 미리 부탁을 해두면 외상으로 먹고 오는 날도 종종 있었다. 우리 집 부모님은 꽃집을 하셨기에 다른 가게 사장님들이 "그냥 만 원도 안 되니..." 하면서 장미나 프리지어로 가져가시기도 했다. 일종의 물물교환이랄까.

농경 시대에 서로 품앗이를 해주며 잡초도 뽑고, 초가지붕도 함께 올리며 이웃 간 유대감을 쌓듯 현대에도 함께 말을 섞고 의견을 교환할 통로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초등교사인 나는 예전에 학교에서도 '안전 지도'를 제작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은 마음
 
아동안전지킴이집으로 위촉받은 강릉시의 어느 할인 마트
 아동안전지킴이집으로 위촉받은 강릉시의 어느 할인 마트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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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도는 우리 반 학생들이 우리 마을에서 안전하게 등하교할 수 있는 경로를 찾고, 안전지킴이집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만든 것이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를 수 있겠지만, 아동안전지킴이집이라는 곳이 있다. 아동안전지킴이집은 경찰과 지역사회가 연계해 어린이들을 범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운영되는 제도로, 초등학교와 유치원 인근에 있는 문구점, 편의점, 약국, 마트 등이 해당된다. 

안전지도를 만들면서 우리 반 아이들은 마을에 있는 아동안전지킴이집에 얼굴을 한 번씩 내밀었다. 오며 가며 몇 번씩 들러본 가게라고 하더라도, 말을 섞는 것과 안 섞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아이들은 학교 숙제라면서 주인아저씨에게 "범죄 현장을 본 적 있나요?" 하고 물으며 서로 친해졌다.

아이들이 가게 주인과 관계가 생겨서일까, 부모님들도 해당 가게에 더 자주 들르곤 하였다. 안전지도 만들기는 기존의 아동안전지킴이집 위치를 재확인한다는 것 이상의 성과가 있었다. 마을의 재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깨끗한 거리가 친밀한 공동체에서 맺어진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기 집 안방에 침을 뱉지 않듯이 친한 이모네 미용실 앞에서는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기 힘들다. 나도 영세 자영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기에 잘 알고 있다. 옆집 사진관 사장님과 사이가 좋으면 눈이 내렸을 때 우리 가게 입구만 빗자루로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이 치워준다. 음식을 나눠먹어도 그릇째 옮기고, 가게 뒤편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면 잠가주기도 한다. 

나와 긴밀하게 연결된 대상을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은 마음. 이것을 확장하면 환경 전반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함부로 물건을 사용하고, 폐기물을 무단으로 처리하는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와 연결고리가 없다고 느끼는 상황일 때가 많다. 

극지의 북극곰이 죽는다고 했을 때는 심드렁한 사람도 본인이 사랑하는 고양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캣맘을 자처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우연히 시골의 축사 옆을 지나다가 좁은 곳에 갇혀 있는 동물을 보고 고기를 적게 먹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마트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삼겹살 상태로 접하면 식료품에 불과하지만, 불결한 환경에서 살아 꿀꿀거리는 돼지를 만나면 이들도 감정이 있는 인간과 같은 포유류구나 하면서 거리감이 좁혀지는 것이다.

나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아이들과 분리수거를 같이 하고, 가급적 폐기물 수거장까지 함께 가보는 편이다. 눈으로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나오는지 직접 보게 하고, 이것들을 누가 가져가는지, 결국은 어디에 묻히는지 또는 어디서 태워지는지 얘기한다. 가족끼리 차를 타고 가다가 매립지 인근에 다다르면 창문을 열어 역한 냄새를 살짝 맡고, 저기에 우리가 버린 쓰레기가 묻혀 있으며 태워지더라도 대기 중으로 오염물질이 섞여든다고 일러준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주거지와 엄청나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매립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아이들은 다소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한다. 또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이 우리 이웃 중 일부이며, 결국 환경이 더러워지면 피해를 받는 쪽은 우리 모두라는 어떻게 보면 다소 뻔한 이야기를 직접 쓰레기를 정리하면서 나누면 가슴에 잘 담아둔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너무 철학적인 명제 같지만 나는 동네에서 음식을 담아 올 때 개인용기를 지참하는 것만으로도 체감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동네와 내가 사적인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면 영수증조차 함부로 바닥에 버릴 수 없게 된다. 믿을 만한 사람과 상냥한 대화를 나누고 난 뒤 한결 푸근해진 기분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오늘 저녁에는 용기를 내서 빵집에 가보는 건 어떨까?

태그:#환경, #용기내, #개인용기, #아동안전지킴이,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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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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