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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촬영된 조선어학회 해방 기념 사진.
 1945년 촬영된 조선어학회 해방 기념 사진.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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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호는 반도흥업사를 운영하면서부터 은밀히 조선어학회에 기금을 댔다.

한글학자가 아니어서 연구 분야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운영위원으로 활동한 것이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동안 연희전문에 1500원, 보성전문에 500원의 장학금을 내고, 1939년 5월 신윤국·김양수·박창서 등과 조선흥업(주)을 창설하면서 자본을 대고, 1940년 낙성간이학교 설립에는 기성회장을 맡아 출자했다. 

그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된 것은 1943년 3월 6일이다. 이중화·장지영·이극로·최현배·한징·이윤재·이희승·정인승·김윤경·권승욱·이석린 등은 한 해 전인 1942년 10월 1일 검거되고 서민호와 김도연은 뒤늦게 체포되었다.

구속된 사람이 모두 29명인데, 그 중에 이극로·정인승·권승옥 등 3사람은 함흥경찰서에서 20일 동안 취조를 받다가 경찰서로 옮기고, 이인은 끝끝내 혼자 함흥경찰에 구검되었으며, 그 나머지 26사람은 애당초부터 홍원경찰서로 잡히어 가서 유치장에 있으면서 물 먹이기, 공중에 달고 치기, 비행기 태우기, 메어 치기, 난장질 하기, 불로 지지기, 개처럼 사지로 서기, 뺨치기, 얼굴에 먹으로 악마 그리기, 동지끼리 서로 치게 하기 등 갖은 악형을 다 당하였다. (주석 2)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주시해오던 총독부는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회원,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 회원을 검거하는 한편,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여 언제든지 독립운동가와 민족사상가를 검거할 수 있는 '덫'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42년 4월 원고의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인쇄를 하던 중 함흥에서 한 여학생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조선말로 대화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취조를 받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총독부 경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서울에서 사전편찬을 하고 있던 정태진을 연행하여 심한 고문 끝에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억지자백을 받아냈다.
 
조선어학회 사건(1942) 당시 함경남도 함흥경찰서, 홍원경찰서로 피검돼 고초를 겪었던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동지회 모임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
사진 촬영 당시 이극로 선생은 북쪽에 있었기에 사진 속엔 없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선생의 얼굴이 보인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민세 안재홍 선생은 9번 째 투옥이었다.
▲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동지회 기념사진(1949년 6월) 조선어학회 사건(1942) 당시 함경남도 함흥경찰서, 홍원경찰서로 피검돼 고초를 겪었던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동지회 모임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 사진 촬영 당시 이극로 선생은 북쪽에 있었기에 사진 속엔 없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선생의 얼굴이 보인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민세 안재홍 선생은 9번 째 투옥이었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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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은 이렇게 발단되어 10월 1일 최현배·이중화·장지영 등 11명이 검거된 것을 필두로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어 야만적인 수사와 고문을 당하였다. 

일제는 33명 외에도 증인·기타 연루자 48명까지 검거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조선어학회 회원과 사전편찬에 협력한 인사 모두를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걸어 기소하였다. 함흥재판소는 이들에게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 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라는 예심종결의 결정문에 따라 내란죄를 적용하고, 조사과정에서 가혹한 고문으로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주석 3)

서민호는 구속되었다가 9월 18일 김윤경 등 12명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7개월여 동안 함흥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함께 옥고를 치렀던 이희승의 증언이다. 

저들의 표현에 의하면 고문에는 육전(陸戰), 해전(海戰), 공전(空戰) 이렇게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육전이란 각목이나 목총이나,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집어 아무데나 마구 후려치는 것이다. 목총이 뎅겅뎅겅 부러져 달아나고 머리가 터져 피가 흘러내리는데, 처음 몇 대를 맞을 땐 견디지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나중에는 별 감각이 없어진다. 그러면 그들은 해전이나 공전으로 들어간다. 

길다란 나무 판대기 걸상에 반듯하게 뉘고 묶은 뒤에 커다란 주전자로 콧구멍에 물을 붓는 것이 이른바 해전이다. 콧구멍으로 들어간 물은 기관을 따라 폐부에 스며들고 입으로 들어간 물은 위로 들어가 삽시간에 만삭의 여자처럼 배가 불러진다. 그러면 누구든 기절을 하고 마는데, 저들은 기절한 사람을 감방에다 처넣고 주사를 주고 약을 먹여 정신이 들게 한다.  그러면 공전에 내보낸다.

두 팔을 뒤로 묶어 팔 사이에 작대기를 지르고는 양쪽 끝을 밧줄로 묶어 천장에 달아맨다. 처음에는 짚단을 발 밑에 괴어주지만 저들이 지어낸 물음에 "모른다"고 대답하면 짚단을 빼버린다. 그러고는 달아맨 두 줄을 마치 그넷줄 꼬듯 한참 꼬았다간 풀어놓는다. 팔이 떨어져나갈 듯한 고통과 심한 어지러움으로 누구든 10분도 못 되어 혀를 빼물고 기절하고 만다. (주석 4)


주석
2> <한글학회>, <한글학회 50년사>, 14쪽, 1971. 
3> 김삼웅, 앞의 책, 74쪽. 
4> 이희승,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143쪽, 창비, 1996.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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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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