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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속에 겹겹이 쌓인 일상을 되돌아보는 때, 세모(歲暮)가 되어서야 형제의 안부를 깊이 바라본다. 일일이 얼굴보며 얘기하면 좋으련만 요즘 같이 바쁜 세상 전화라도 주고받는 것이 다행이라 한다. 남편의 7형제 중 유일한 딸인 시누이가 20여 년 만에 이사를 하여, 짧지만 하루라도 가족여행지로 광주행을 결정했다. 오고 가는 길에 볼만한 관광지도 계획에 넣었다.

성정이 시어머니를 꼭 닮은 시누이는 오빠인 남편과의 대화에도 날 새는 줄 모를 정도로 애정이 깊다. 둘 다 속 깊은 사람들이어서 대화나 행동에 늘 상대를 배려한다. 남편이 대학 다닐 때 읽고난 시집이나 책들을 집에 놓으면 그 책을 모두 읽은 사람이 시누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남다른 교육관으로 자녀 둘을 대안학교에 입학 졸업시키고 아이들의 개성과 자유를 존중하고 흔들리지 않는 교육관으로 자녀들을 지도한 멋진 시누이다.

김삿갓이 인생의 마지막을 고한 곳
 
2022년 안녕을 고하는 호랑이의 등줄기 같은 절경에 매료되다
▲ 화순적벽둘레길 2022년 안녕을 고하는 호랑이의 등줄기 같은 절경에 매료되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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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광주까지 가는데 이왕이면 관광명소 한두 군데 들렀다 오자고 딸에게 1박 2일의 여행계획을 말했다. 먼저 광주에 가서 가족을 만나 회포를 풀고 둘째 날에는 담양의 소쇄원과 송강정, 죽녹원을 가보자고 했다. 귀경길에 시간이 되면 순창 강천사도 가 볼 예정이었다.

가족이 만나 이런저런 담소 중에, 시누이가 말하길 광주 가까이에 화순과 담양이 있는데 서로 방향이 다르니 화순에 가서 저녁 외식을 하고 다음날 군산 상경길에 담양을 들르면 좋다고 추천했다. 그때 상식이 풍부한 남편에게 떠오른 것이 있었다. "화순에 적벽강이 있고 그곳에서 김삿갓이 방랑을 접고 인생의 마지막을 고했다고 알고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 말 한마디에 가족들의 저녁 일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지난 4월부터 매일 한시를 받으면서 한시를 쓴 시인들의 이름 중 김삿갓(1807~1863)이란 이름을 본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화순의 절경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고향이 영월인 김삿갓이 이곳에서 10년 가까이 머물고 일생의 마지막을 고했는가 싶어서 화순 적벽을 보고 싶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곳을 보고 가야겠다는 나의 의지를 아무도 꺾지 못하고 딸과 함께 길을 나섰다.

화순군 이서면에 있는 적벽강은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으로 유배를 온 신재 최산두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보고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보이는 가을풍경이 담긴 적벽강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사계마다 그 광경이 다를 것이니 때마침 온 겨울눈이 내린 적벽강을 기대했다. 도심을 벗어나 골짜기를 따라 운전하면서 딸과 함께 화순적벽과 김삿갓에 대한 내용도 읽어보고, 김삿갓이 적벽강의 풍광을 노래한 시(1841년)도 읽었다.

무등산이 높다지만 소나무 아래요 (無等山高松下在, 무등산고송하재)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로 흐르는구나 (赤壁江深沙上流, 적벽강심사상류)


아뿔사! 네비게이션이 있었어도 길을 헤매느라 1시간이 넘어 도착한 화순적벽에 출입통제표시가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별도의 셔틀버스가 있고 동절기에는 운행을 하지 않음을 그때야 알았다. 시간이 아까워 서운한 마음을 이내 바꾸어 왔던 길을 돌아나가는 길에 보니 적벽에 버금가는 멋진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내린 눈으로 산줄기마다 희고 검은색의 조화가 마치 호랑이 등의 줄무늬를 연상시켰다.

검은호랑이 해의 마지막 하루를 앞두고 화순을 지켜주던 호랑이가 송년인사를 하고 제 할 일은 다 했다며 지나가는 듯했다. 차를 멈추고 호랑이 산 아래 자리한 마을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내 나름의 의미를 달아서 사진을 친정식구에게 전하며 송구영신을 준비해보자 했더니 바로 밑 남동생의 답글에 웃음이 터졌다.

'가는 호랑이가 오는 토끼를 잡아먹으면 어떻게 되는겨?'

소쇄원을 들렀다가 집으로 오는 길

다음날 12월 31일,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느라 분주한 세월을 사람이 대신했다. 군산으로의 상경길에 담양의 소쇄원과 송강정에 가야 한다고 서둘렀다. 30여 분 운전하고 도착한 소쇄원의 입구에 사람들이 제법 오고 갔다. 청둥오리들이 대나무 사이를 오고 가며 방문객들을 환영했고, 매표소 마을인들의 친절한 말씀도 듣기 좋았다.

소쇄원을 우람한 정원으로 생각하고 오는 사람들은 정원의 크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실망한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기대심을 반으로 접고 단지 새해 하루를 앞두고 마음이나 정결하게 해보자 하는 심산이었다. 겨울풍경을 즐기는 행보에 불편함을 줄 수는 있어도 눈이 쌓인 풍광은 어딜가나 아름답다. 말 그대로 풍설도 서설이 되는 것이다.
 
전원에 놓인 광풍각(光風閣) 모습
▲ 아름다운 소쇄원 전경 전원에 놓인 광풍각(光風閣) 모습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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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역할의 광풍각 뒤, 게곡을 앞에 두고 소쇄원 내원의 중심인 제월당(사진에서 오른쪽)
▲ 소쇄원의 주인장 양산보가 머문 제월당 사랑방역할의 광풍각 뒤, 게곡을 앞에 두고 소쇄원 내원의 중심인 제월당(사진에서 오른쪽)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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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은 조선시대 학자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의 별서정원이다. 스승인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기묘사화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민간원림이다. 구조는 입구 쪽에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계원(溪園),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특히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와 계류 앞 광풍각(光風閣)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내원(內園)의 중심인 제월당(霽月堂)은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집주인 자신의 방을 뜻하고, 광풍각(光風閣)은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손님을 위한 사랑방이라고 했다.

두 건물 사이에는 복숭아나무를 비롯한 매화, 오동나무, 벽오동, 동백, 산수유, 대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등의 식물들이 있지만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로만 그들을 대하고 다가올 봄부터 소식이나 전해주오, 라며 제월당 마루에 누워 천장에 써있는 한자들과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다행히 사랑방 광풍각(光風閣)은 겨울철 손님들에게도 인정이 넘쳐 푸른 하늘과 흰구름, 적당히 쌓인 설경을 선물해서 머무는 사람마다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그중 세 모자 가족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소쇄원의 유래와 기능을 설명하고 그 어머님의 모습을 경치에 담아주니 처음으로 이렇게 아들들과 사진을 찍었다며 정말 좋아했다. 여행의 묘미는 역시 새로운 누군가와 만나 수다 떠는 재미지, 라며 딸에게 변명했으니 천상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가 보다.
 
송강 정철이 머물렀던 죽록정이 측면에, 정면에 후손들이 세운 송강정이 있다
▲ 송강정 전경(담양군 고서면) 송강 정철이 머물렀던 죽록정이 측면에, 정면에 후손들이 세운 송강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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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 위 월명산 정자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를 기다렸건만... 구름 속에 갇혔다
▲ 2023년 1월 1일 7시 45분 새해 일출을 기다리며 설원 위 월명산 정자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를 기다렸건만... 구름 속에 갇혔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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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정을 들러 사미인곡의 송강 정철의 자취를 느끼고 책방으로 돌아왔다. 세서천역(歲序遷易)이라. 하루 사이에 세월의 차례가 옮겨 바꿔지고 토끼해가 밝았다. 작년이란 말이 어색하지만 하루도 되지 않아 익숙해질 것이다. 책방 뒤 정자에 올라 일출을 기다렸건만 구름에 가려 볼 수 없었다. 어느덧 중천으로 해는 솟아나고 붉은 기운은 회색창공에 숨어버렸다. 그래도 해는 떴다. 분명 오늘의 저 해는 어제의 해와 다르리라. 나도 분명 어제의 나와 다르리라.

주요 지리정보

태그:#전남담양소쇄원, #전남화순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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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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