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나> 스틸컷

영화 <나나>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접하기 힘든 영화를 만났을 때의 낯선 경험을 좋아한다. 언어, 문화, 사고방식이 다르지만 또 하나의 매력으로 다가와 신선함을 안겨 준다. 오랫동안 대중의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관람에 길들었는지 되돌아보는 기회다. 얼마 전 만난 <나나>도 그런 영화였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의 분위기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정서가 흐른다. 인도네시아의 여성 영화로 주체적인 삶을 살려고 한 나나의 성장과도 이어진다. 깊게는 모르지만 인도네시아의 아픈 상처가 대한민국 역사와도 겹친다. 의외의 경험은 이토록 반갑다.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에 자극제 혹은 피로회복제가 되어준다.
 
인도네시아 여성의 한(恨) 맺힌 정서
  
 영화 <나나> 스틸컷

영화 <나나>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정치적 분투 한가운데에 있는 1960년대 인도네시아 자바의 한마을. 나나(해피 살마)는 위협을 느껴 언니와 젖먹이를 들쳐업고 숲으로 도망치고 있다. 아버지는 죽임을 당했고 남편은 행방이 묘연하다. 그러던 중 아이마저 잃고 연상의 대지주와 재혼했다.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러 번의 유산 끝에 아이를 얻었고 가정을 꾸려왔다. 사모님 소리 들으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는 나나. 과거, 굶주리고 고달픈 삶과는 비교할 수없이 안락하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 속마음은 공허하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허사다.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품고 있고, 과거의 상처도 아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지만 마음은 10년째 썩어가고 있다. 매일 밤 꿈에서나마 채워보려 한다. 꿈에 나온 전 남편은 만지면 달아나 버릴 듯이 안개처럼 주변을 맴돈다.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나, 목이 베이는 아버지를 속수무책 바라보는 게 전부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꿈이지만 반복되고 잦아지는 꿈은 악몽이 되어 잠식한다. 유령처럼 나나 곁을 떠도는 환영은 몽환적인 음악과 기교를 더해간다. 현실도 마치 꿈꾸듯이.
 
독립 후 정치적 격변기와 개인의 삶
  
 영화 <나나> 스틸컷

영화 <나나>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영화는 내전 트라우마와 슬픈 가족 역사를 숨기고 살아가는 '나나'를 통해 인도네시아 여성의 일생을 톺아본다. 나나는 아버지를 잃고 언니 대신 원치 않는 결혼으로 버텨야 했다. 이를 거부한다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평생을 가난에 찌들어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의 여파는 물론이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과부 홀로 생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호의 아내지만 과거를 애써 덮어버리고 중년이 된 나나와 푸줏간에서 일하며 당당히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이노(라우라 바수키)의 우정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치 우리나라의 옛 어머님들 같다. 본처와 후처가 함께 사는 기묘한 가족, 남편이 떠나고 둘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자매, 모녀처럼 보이는 애매한 관계 말이다. 한국 영화 <춘희막이>가 떠오르는 흔치 않은 사이다.
 
나나는 억눌려 왔던 지난날을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내연녀 이노를 통해 해소한다. 좋은 집안 출신도 아니고 재혼이란 이유로 시댁의 눈치와 핀잔을 받아야 했던 나나를 당당하게 앞으로 이끌어 준다. 늘 무대의 뒤에서만 서포터 하던 여성을 무대 위로 불러내 존재감을 각인토록 한다.
 
출생부터 온전히 자기 힘으로 해본 적 없는 여성은 비로소 해방을 맞는다. 치유되지 못한 슬픔을 빽빽한 올림 머릿속에 철저히 감춰두었다가 후반부에는 풀어헤친 머리칼을 뽐내며 고혹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더불어서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 반기를 든다.
 
처음으로 모든 게 자신의 탓이 아님을 깨닫고 의견을 내세운다. 항상 남편이나 시댁 식구의 말을 따르기만 했던 수동적인 입장에서 처음으로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그 선택의 길이 좋을지 나쁠지 비록 알 수 없지만, 선택의 첫걸음을 응원하고 지지할 수 있어 관람 내내 즐거웠다.
 
인도네시아 여성 영화인의 활약
 
 영화 <나나> 스틸컷

영화 <나나>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한편, <나나>는 인도네시아 영화의 품격을 세계에 알렸다. 카밀라 안디니 감독은 데뷔작 <거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이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유니> 등으로 인도네시아와 여성, 문화, 환경 등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
 
<나나>는 올해 열린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분에 상영되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한 라우아 바수키는 최연소 조연상 수상자이며, 기품이 느껴지는 해피 살마는 인도네시아 문화 예술계 대표 인사로 영향력을 떨친 인물이다. 모드는 참여자가 처음이지만 낯섦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즐기는 관객에게 추천하는 영화다. 카밀라 안디니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키노라이츠 매거진과 장혜령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 됩니다.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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