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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그룹 '꽃중년의 글쓰기'는 70년대생 중년 남성들의 사는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기대수명 계산기'란 걸 보았다. 미국의 보험회사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기대수명에 관한 통계 의견이라는데, 호기심이 들어 직접 해보았다. 성별, 사는 지역, 가족의 수명 및 병력, 운동 습관 등 몇 가지 질문에 답을 입력하니 평가 결과가 나왔다. 나의 기대수명은 85세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인생의 절반을 조금 넘게 산 셈이다.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이 점점 늘어나 조만간 100세 시대를 맞이한다는 말이 자주 들리니 허황된 이야기로만은 들리지 않았다.

최근 나의 삶을 돌아보면 그냥 생각 없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그렇다고 마냥 평온하지 않다. 고비마다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간신히 넘고 나면 또 다른 벽이 앞에 나타났다. 눈앞의 장애물에만 신경을 쓰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잘 살아가고 있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제 곧 오십, 지천명인데 하늘의 뜻을 알기는커녕 하루하루 버텨내기에 급급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욜로니 파이어족이니 남들처럼 멋들어진 계획은 없더라도 남은 삶에 비전 정도는 하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비전이라. 20년도 더 된 구닥다리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의 아내가 여자친구였던 시절, 만난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정식으로 부모님에게 인사들 드렸다.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음식점에 들어섰다. 정중히 인사하고 자리를 잡아 앉자마자 여자친구의 아버지, 즉 현재 장인어른께서 질문을 했다.

"자네는 앞으로 비전이 무엇인가?"

그때부터 식은땀이 흐르고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수천 가지 생각이 부유했다. 일종의 중대한 시험처럼 다가왔다. 정확히 어떤 답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주로 직장 생활에 관한 포부와 계획을 정신없이 늘어놓았던 것 같다. 그래도 장인어른은 답이 흡족했는지 무사히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20대 때와는 다른 중년의 새로운 비전
 
앞으로 어떻게 사는 지에 따라 남은 삶이 달라진다.
▲ 삶의 다양한 선택지 앞으로 어떻게 사는 지에 따라 남은 삶이 달라진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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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젊어서 혈기 왕성했다면 어느덧 가릴 것도, 따질 것도 많은 중년이 되었다. 이제는 그때와 다른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비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찬찬히 정리를 해보았더니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가족에 관한 비전이다. 대한민국에서 남편, 아빠, 아들, 사위 등 네 가지 이름으로 살고 있다. 당연히 곁에 있는 존재라 여기며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삶이 바쁘다는 핑계는 저멀리 치워두고, 이제부터라도 전심을 다하고 싶다.

아직 부모님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지만 반면 장인어른은 작년부터 몸이 좋지 못했다. 계실 때 잘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 늘 당신보다 자식 걱정이 우선인 분들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자주 목소리 듣고, 얼굴 보여주는 일이 아닐까.

'111'이란 실천 계획을 수립했다. 양가 부모님께 주 1회 이상 연락하기, 월 1회 이상 찾아뵙기, 연 1회 이상은 가까운 곳에 나들이 혹은 여행 가기이다. 본가는 가깝지만, 처가는 멀리 있어 가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뜻이 있으면 분명 길이 있겠지. 우리에겐 영상 통화도 있으니.

아내와는 최근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간 서로의 일과 아이 양육에 치여 시간이 부족했다. 조금 멀어진 거리를 좁히고자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는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컸고, 둘만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조금 생겼다.

토요일 저녁에는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함께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한 달에 한 번은 근처 산에 오르기로 했다. 언제라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면 존중하되, 관계의 돈독함을 이어나가야겠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나갈 중년 이후의 삶도 아직 많이 남아 있기에.

아빠로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다.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보다 어른을 공경하고, 아내를 존중하며 매 삶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저절로 따라오리라 믿는다. 사춘기 구간을 맞이해서 자칫하면 멀어질 수 있는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찾아 함께 하는 시간도 보내야겠다.

지금 함께 하고 있는 가족독서모임은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도 계속 함께 하고픈 소망이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소통 창구였다. 품 안의 자식에서 벗어나 조금씩 독립하는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부모를 믿고 기댈 수 있는 커다란 산이 되어 보련다.

두 번째 직장에 관한 비전이다. 60세 정년을 기준으로, 지금까지 근무한 연도만큼 남았다. 돌이켜보면 어떤 비전이 있기보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싶고, 빨리 승진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다. 본사 근무도 두 번이나 하며 삶을 모두 갈아 넣었다. 그렇다고 일이 뜻대로 풀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스트레스로 건강만 해치고,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 멀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으려다 찢어지는 꼴이었다. 나는 일 중심보다는 관계가 중요한 사람이다. 그런데 일로서 승부를 보려 억지 노력을 하다 보니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욕심은 내려놓고 힘을 빼련다. 눈앞의 가치보다는 직장 내 중간적 위치로서 그간 체득한 노하우를 후배에게 전하는 선배가 되고 싶다. 더불어 더 하려 애쓰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직장 특성상 전국으로 근무할 기회가 있다. 지금까지는 중심부 가까이에 있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시야를 넓혀 다양한 지역에서 일하고 싶다. 낯선 환경, 그 도시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다. 그런 경험이 분명 나중에 쓰고 싶은 글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허락도 받았기에 다음 인사 때로 계획을 세웠다. 근무지도 가족과 상의해서 정했다. 고요하고 탁 트인 바다에 주말엔 언제든 집에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을 만날 생각에 기대감이 컸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나의 꿈에 관한 비전이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하고 싶은 일이다. 우연한 기회에 글쓰기를 시작했고, 운이 좋아 두 권의 에세이를 낼 수 있었다. 내년 초에 한 권이 더 나올 예정이니 이제 세 권이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내 갈증이 있었다. 언젠가는 꼭 써야지 하면서 미뤄둔 소설이다. 올 10월에 용기를 내서 소설 쓰기 초급반 강좌를 들었다. 초보자가 맞나 할 정도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수강생들에게 큰 자극을 받았었다. 한계를 깨달았고, 더욱 하고픈 열망이 생겼다.

목표를 정했다. 오십이 되기 전에 반드시 소설을 쓰는 것이다. 완성되면 각종 문예지에도 제출하고, 오십 중반 전에는 종이책으로 출간하고 싶다. 죽기 전까지 다섯 권 이상의 소설을 남기는 장기 목표도 세웠다. 이 또한 글로 남겼으니 약속을 지켜야겠지.

해야 하는 일은 퇴직 이후의 준비였다. 산림치유사라는 제2의 인생을 위해서 내년에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기로 했다. 대학에서 문과를 전공했기에, 이과로 진학해서 공부하는 것이 살짝 걱정은 되지만,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2년의 학기를 마치면 인근 대학에서 6개월간의 보수 교육을 마쳐야 비로소 국가자격증 시험에 도전할 수 있다. 아직 이르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부터 준비해야만 퇴직 후에 공백 없이 관련 일에 종사할 수 있다. 내년이 바로 그 기점이다.

크게 세 가지로 중년 이후의 삶의 비전을 기록해 보았다. 중요 키워드는 역시 '시간'이었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선택과 집중하느냐에 달려 있다. 비전을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의지도 중요하지만, 가슴속에 품고 수시로 꺼내 보며 그 의미를 잊지 않아야겠다.

삶의 세 가지 비전, 이제부터 시작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


시민기자 그룹 '꽃중년의 글쓰기'는 70년대생 중년 남성들의 사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태그:#마흔, #비전, #목표, #계획, #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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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상이 제 손을 빌어 찬란하게 변하는 순간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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