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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헬스도 하고 운동도 하고, 그런 여유가 엄청 늘었어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단 사람들이 건강해졌어. …… 돈을 한 보따리 싸다 줘도 이제 다시 그때로는 안 돌아가요." - 김영선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2018) 중

1주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는 근로기준법이 시행된 이후 마침내 주야 맞교대 시절의 밤샘노동이 사라진, 어느 자동차부품 공장 노동자의 말이다. 이러한 실노동시간 단축의 긍정적 효과는 2019년 한국노총 현장면접조사 결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방문했던 대다수의 사업장에서는 '1주 최대 52시간제' 시행 이후 연장노동수당 저하 등으로 3~6개월 가량 일부 직원들의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조정기가 지난 후 대다수 직원들이 상당히 높은 만족도를 보인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어느 조합원은 '정부가 이제 우리 노동자들이 여유가 생긴 시간동안 뭘하면서 지내야할지 이런 것들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니냐'며 투정섞인 농담도 던질 정도였다. 그렇게 '1주 최대 52시간제'가 조금씩 현장에서 자리잡아 가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1주 최대 52시간제'가 시행된 지 5년도 채 안 된 지금, 그저 가족과 함께 웃음꽃피는 저녁 한끼를 원했던, 너무나도 소박하지만 그토록 절실했던 노동자들의 간절한 소망은 산산조각이 날 위기에 처했다. 정부는 최근 30인 미만 사업장을 대상으로  올해까지 인정되었던 1주 8시간 추가연장근로를 2년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 역시 인가사유를 확대한데 이어 인가기간 역시 연간 180일로 대폭 확대했다.

최소한의 구색도 못 갖춘 정부의 친(親)자본 정책추진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10월 24일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등에 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10월 24일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등에 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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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지난 6월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 발표를 통해, 주52시간제의 기본틀을 유지하며 실노동시간 단축 노력을 지속하겠노라 공언했다. 단언컨대 정부가 한시적 추가연장근로 연장과 특별연장근로 인가확대를 추진하면서 실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위 정책들은 여지껏 사용자단체에서 요구해왔던 숙원과제들이다. 정부가 친자본 정책을 노골적으로 수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감언이설로 속이며 기만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2020년 9월, 고용노동부는 종전 사용자단체의 1주 최대 52시간제 연기시행 등 요구에 대하여 실태조사 결과를 근거로 90% 이상 기업이 이미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반박했다. 2020년 12월에는 아예 고용노동부와 중소벤처기업부, 중기중앙회가 5~49인 중소영세사업장을 대상으로 공동실태조사를 실시했는데, 동 조사에서도 90% 이상이 1주 최대 52시간제 준수가 가능하다고 답변했다고 밝히면서, 1주 최대 52시간제가 국민이 뽑은 제20대 국회 좋은 입법(사회문화환경 분야) 1위에 선정된 것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1주 최대 52시간제가 전면 시행되고 5개월이 지난 2021년 12월에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77%가 동 제도시행을 잘한 일로 평가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처럼 그동안 정부가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는 한시적 추가연장근로의 연장과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정부가 이번 한시적 추가연장근로 연장 근거로 들고 있는 중기중앙회의 올해 8월 실태조사 결과도 미심쩍긴 마찬가지다. 이 실태조사로부터 불과 3개월 전 실시한 중기중앙회의 '중소제조업 주52시간제 시행실태 및 제도개선 의견조사'에 의하면 5~29인 사업장에서 1주 최대 52시간제 시행에 '전혀 문제없음'이 66.1%, '다소 어려움'이 23.9%, '매우 어려움'이 10.0%로 조사되어 한시적 추가연장근로 대상이 되는 30인 미만 사업장 90%가 제도도입에 어려움이 없다고 답변하고 있다. 어디를 둘러봐도 90% 이상이 제도시행에 문제가 없다는 결과뿐인데, 그럼에도 한시적 추가연장근로를 연장하겠다는 것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를 확대하면서 정부가 보인 태도의 변화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2018년까지만 해도 정부는 사용자단체의 특별연장근로 인가사유 확대 요구에 대해 노동시간 단축의 취지와는 안 맞는 측면이 있다며 재해 등 긴급·불가피성이 있을 때만 허용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정부입장은 불과 1년 후 급선회하여 특별연장근로 인가사유 확대를 내부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이후,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를 사실상 근기법상 유연근무제로 편입시켰다.

사업주 입장에서 당연히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 등 법률상 제약이 많은 유연근무제보다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에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특별연장근로 인가건수는 4년새 무려 400배 이상 폭증했다. 정부정책이 이렇게 일관성 없이 추진되다 보니 신뢰 역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사업주는 더 이상 1주 최대 52시간제 따위는 지키지 않아도 되고 노동시간 규제를 회피하는 방법도 많다는 정부의 신호가 이미 현장에서는 널리 퍼져있다.

기업에 장시간 노동착취 수라상을 갖다바치려는 정부
 
경기도 평택 SPL 제빵 공장
 경기도 평택 SPL 제빵 공장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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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산재사망사고가 발생한 SPL사업장은 올해만 42일간 특별연장근로 인가를 승인받은 상습적 장시간 노동 사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의 생명·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장시간 노동문제를 해소하고 입법목적을 수호하려는 정부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는 장시간 노동 문제해결에 대한 최소한의 의지조차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고 있다.

현재 산재사망사고의 70%가 50인 미만 사업장에 집중되어 있고, 이주노동자의 사망사고의 63%가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있다. 정부 계획대로 한시적 추가연장근로를 연장하고 외국인력을 11만명으로 확대한들 본질적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또 어떤 재앙이 현장에 불어닥칠지는 뻔하다. 장시간 노동 때문에 구인난에 직면한 것이지, 구인난 때문에 장시간 노동을 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말이 안되는 해법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만간 정부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 논의결과를 토대로 월(月)단위 연장노동 관리,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 확대, 근로 시간저축계좌제, 전문직·스타트업 근로시간 예외 적용 등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한다.

결국 자본을 등에 업은 정부의 속셈은 명확해진다. 노동시간에 대한 모든 법·제도상 빗장을 걷어내고 기업이 상황에 따라 노동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합법화해 주겠다는 것이 아닐까?

주 120시간 노동이 가능해야 한다거나 국가가 국민의 일할 자유를 제약하면 안 된다는 정부여당 유력 인사들의 발언만 놓고 보면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노동시간에 대한 정부정책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로의 회귀를 넘어 '1차 산업혁명시 노동착취'로의 회귀라고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심각하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2본부 부장입니다.


태그:#주52시간제, #윤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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