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24 11:13최종 업데이트 22.10.24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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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야구 100년사> 표지. ⓒ 명문

 

식민지배는 스포츠에도 영향을 끼쳤다. 야구 같은 체육 활동을 굴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역전의 명수'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군산 야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교 야구가 지금의 프로야구 역할을 했던 1972년 7월 19일 황금사자기 결승전 9회말 1-4에서 5-4 대역전극을 일으킨 군산상고 신화를 갖고 있는 이 도시도 그랬다.


지난 금요일(21) 전북 군산세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린 <군산 야구 100년사>는 '역전의 명수' 군산 야구가 겪은 그 같은 질곡의 역사를 비중 있게 보여준다. 군산상고 출신의 해태 타이거즈 선수였던 조계현 전 기아 타이거즈 단장 외에, 김관영 전북도지사, 강임준 군산시장, 김영일 시의회의장의 축사를 받은 이 책은 2014년에 최초 출간됐다가 지난 7월 개정판으로 거듭났고 3개월 뒤인 지난 금요일에 출판기념회를 갖게 됐다.

저자는 군산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과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등으로 활동하는 군산 역사학자 조종안이다. 군산대학에서 시민강좌인 '군산학'을 강의하고 <군산 해어화 100년>, <금강 그 물길 따라 100년> 등을 출간해 이 지역 근현대사 발굴에 기여한 학자다. 특히 <군산 해어화 100년>은 군산 기생의 역사를 파헤쳐 이 분야 연구를 업그레이드시킨 서적이다.

 

저자 조종안. ⓒ 조종안.

 

<군산 야구 100년사>(이하 <100년사>) 개정판은 군산 최초의 야구인인 양기준(1896~1975)을 비롯한 여러 정보를 업그레이드했다. 책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개정판에는 양기준 선생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비롯해 '일본 야구계의 전설'로 통하는 장훈 선수가 군산을 세 차례 방문한 배경, 그와 이용일 KBO 총재권한대행과의 인연, 일제강점기 군산에 존재했던 10여 개 정구단과 군산농업학교, 군산공립보통학교, 군산소학교 등에서 열린 각종 정구대회 등을 관련 사진과 함께 업그레이드했다"고 소개했다.

식민지배가 야구에 미친 영향과 관련해 <100년사>가 다룬 것 중 하나는 일제강점기 막판에 야구가 '적성국 운동'으로 지정된 사건이다. 이 책은 1941년에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야구를 적성국 운동으로 규정하고 통제했으며, 전쟁이 격화된 1943년에는 모든 체육활동을 전투 훈련용으로 대체했다고 말한다. 일본 프로야구를 제외한 모든 야구 경기가 일제 패망 때까지 금지됐다.

영국·미국과 전쟁을 벌인 일본은 영국에서 기원한 야구 경기를 '적성국 운동'으로 규정했지만, 이 경기를 처음 접했을 당시의 군산 사람들은 야구를 '왜놈 운동'으로 불렀다. 저자는 <전북 체육 1백년사>를 인용해, 야구가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때였지만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전라북도에 본격 유입됐으며, 이 시기 사람들은 야구를 그렇게 불렀다고 말한다. 그랬던 것이 1940년대에는 일제에 의해 적성국 운동으로 규정됐던 것이다.

일본 학생들의 독무대
 

축사 하는 조계현 전 기아 타이거즈 단장. ⓒ 조종안 지인

 

식민지배는 야구 선수에 대한 진입 장벽을 높이는 결과도 초래했다. 한국인들이 교육환경이 좋은 학교에서 학생 선수로 활동할 기회를 제약했다. 이 점은 1928년 이리(익산) 철도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호남중등학교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군산중학교 선수들의 면면에서도 나타난다.

<100년사>는 제1회 우승 당시의 군산중학교 야구선수 9명 중에서 8명이 일본 학생이었다고 말한다. 포수는 후지타, 투수 겸 우익수는 나카니시 및 미나미무라, 1루수는 츠지모토, 2루수는 주장 요시오, 3루수는 마루이, 유격수는 마시코, 중견수는 후지타였다. 좌익수만 한국인인 김판술이었다.

 

제1회 호남중등학교 야구대회 시상식. ⓒ <군산 야구 100년사>

 

김판술은 군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유학할 때도 야구 선수로 활약했다. 그곳에서 4번 타자로 뛰었다. 교토제국대학 농학부로 진학하면서 그의 선수 생활은 끝났다.

해방 뒤 농림부 농정과장을 거쳐 1954년과 1960년에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그는 장면 내각에서 보건사회부장관을 지내다가 1961년 5·16 쿠데타로 4개월 만에 물러났다. 그는 72세 때인 1981년 총선 때는 전두환 민주정의당의 2중대인 민주한국당 후보로 서울 종로에서 출마해 최고령 당선자가 됐다. 그는 6월항쟁이 있었던 1987년에는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합세해 당무지도위원장 등을 지냈다. 2009년에 노환으로 타계했다.

 

1971년 전국체전 때 군산상고를 응원하는 김판술. ⓒ <군산 야구 100년사>

 

군산중학교는 같은 장소에서 열린 1932년 제7회 대회 때도 우승했다. 1회 대회와 7회 대회가 6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은 대회가 한 해에 여러 번 열린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100년사>는 제7회 대회 당시의 선수로 포수 구아나, 투수 미즈노, 1루수 하마다, 2루수 지미, 3루수 야마자키, 유격수 야마나카, 좌익수 후지다, 중견수 야마모토, 우익수 오사카를 열거한다. 군산중학교 야구팀은 일본 학생들의 독무대였던 것이다.

목포와 더불어 군산은 구한말 시장개방 과정에서 주목을 받은 도시다. 이곳은 일본 자본주의를 위한 대표적인 원료 공급지로 변모했다. 일본의 면화 착취가 목포를 통해 이뤄졌다면, 쌀 착취는 군산을 통해 이뤄졌다.

일본제국주의의 이 같은 군산 침략을 반영하는 것 중 하나가 군산중학교 학생 구성이다. <100년사>는 1923년에 개교한 군산중학교의 학생 선발 기준이 불리해 한국인은 극소수만 입학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한국인 학생들은 입학 후에도 질시와 차별을 받았다. 이런 속에서 김판술 같은 우수 야구선수가 배출됐던 것이다.

일제의 학교정책이 불공평했기 때문에, 학생 야구선수들의 성장도 당연히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환경이 좋은 학교에 진학해 학업과 야구를 병행할 기회가 한국인에게는 훨씬 적게 주어졌다. 제2, 제3의 김판술이 묻힐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일제 식민지배는 초창기 야구인이 독립운동 혐의로 투옥되는 일도 낳았다. 위에 소개된 양기준의 사례가 그러하다.

양기준은 지금의 군산시에 편입된 전북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에서 출생했다. <100년사>에 소개된 양기준 손자 양재강(치과 원장)의 진술에 따르면, 양기준이 지금의 군산제일고등학교인 영명학교에 재학할 당시에 야구를 했다는 사실이 양기준 아들의 자서전 원고에 적혀 있다고 한다. 양기준이 사용한 야구 방망이가 그 뒤 한동안 이 집안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선교사가 세운 영명학교에서 의술을 배운 양기준은 구암병원에 근무하던 중에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국가보훈처가 발행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양기준의 3·1운동 참여는 모교 교직원들과의 협력하에 이뤄졌다.

영명학교 교사 고석주와 부속 여학교 교사 김병수가 학교 등사판을 이용해 선언서 7천 매를 등사했다. 두 사람은 거사 전에 발각돼 연행됐지만, 양기준 등은 1919년 3월 5일 구암리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된 양기준은 징역 6월형을 받았다.

식민지배, 한국인의 일상에 광범위한 영향
 

1930년대의 양기준 부부. ⓒ <군산 야구 100년사>

 

<100년사>는 영명학교가 군산 지역 학생 야구의 효시이며 이 학교에서 야구를 한 양기준이 군산 최초의 야구인이라고 말한다. 양기준 홀로 야구를 한 것은 아니므로,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군산 최초의 야구인이 양기준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그런 양기준이 독립운동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됐다. 일제 식민지배는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군산 최초의 야구인을 독립운동 혐의로 감옥에 넣는 결과도 낳았던 것이다.

일본 식민지배는 한국인의 정부를 해산하고 한국인의 군대를 금지하는 정치·군사적 악영향만 남긴 것이 아니다. 한국 경제를 제국주의의 하부 구조에 편입시키는 경제적 악역향만 남긴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한국인의 일상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투는 야구 같은 스포츠 분야에도 파고들어 교육환경이 좋은 학교에서 한국인 선수가 양성될 기회를 제약하거나 초창기 야구인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감옥에 넣는 결과도 초래했다. 일제강점 막판에는 적성국 운동이라는 이유로 야구 경기를 금지하는 일까지 있었다. 조종안의 <군산 야구 100년사>는 식민지배가 체육 분야에 미친 그런 영향들을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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