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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장소에서 일어난다

윤석열, 이재명, 오세훈, 정세균, 안철수를 비롯한 많은 정치인들과 거대 정당이 당과 정파를 초월해 일치하는 이해관계가 있다. 바로 지상 철도의 지하화다. 사사건건 충돌해온 국민의힘과 민주당도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는 한 목소리로 전국 주요 도시를 달리는 철도를 지하로 묻겠다고 공약했다. 행태로만 보면 철도 지하화는 거대 양당이 발 벋고 나설 정도로 중요한 민생 의제인 듯하다. 그들은 모두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하는 데 정말 그럴까? 공약을 덮고 있는 화려한 포장지를 살짝 들어 올려보자.

환경과 건축을 연구하는 데이비드 시먼David seamon 캔자스 주립대 교수는 "삶은 장소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평일 대도시의 이른 아침 지하철역에 서 있으면 경이로운 일이 벌어진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승강장을 메우고 열차가 도착할 때마다 안으로 쇄도한다.

러시아워 때 서울 지하철에는 모든 역에서 열차들이 앞 열차를 밀어내듯 움직이고 있다. 2~3분에 한 번씩 천 명 넘는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가 해체된다. 이동–정주–이동이라는 패턴이 짧은 주기로 반복되는 현대인의 삶은 '아침 출근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잘 드러난다. 장소와 모빌리티를 통합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시먼 교수는 장소나 모빌리티 중 한 쪽이 다른 쪽에 둘러싸이거나 우회되거나 대체되는 세계에서는 좋은 삶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주거와 이동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계급 문제가 되었다. 어떤 장소에서는 거액의 시세차익과 편리한 이동이 보장되지만 다른 장소에서는 오! 세상에! 폭우로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진다. 사회가 더 나빠지면 좋은 장소를 울타리로 둘러싸는 것을 넘어 나쁜 장소로 규정된 곳을 해체하려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상 철도다. 도심을 가르고, 발전을 저해하고, 온갖 공해를 유발한다며 지상 철도를 안 보이게 장판 밑으로, 아니 지하로 넣겠다는 것이다.

지상철도 지하화는 20년 넘게 선거철마다 나오는 레퍼토리다. 오래된 만큼 갈수록 세련된 약속으로 치장된다. 철도 주변 주민들의 불편 해소, 공원화, 도시재생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고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거대한 토건개발의 욕망이 숨어있다. 주민들의 불편을 강조하며 지하화 필요성을 보도하는 뉴스 인터뷰에 나선 주민들은 어쩌면 개발 이후 정든 정착지를 떠나야 할지 모른다. 높아진 집값으로 소수의 땅 소유자들을 빼고는 개발이 완료된 곳에서 삶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이 젠트리피케이션의 희생양이 되는 사례가 대규모 개발의 역사였다.
 
지난 3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2040 서울도시기본계획’을 통해 지하철 2호선 지상 구간을 지하화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지난 3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2040 서울도시기본계획’을 통해 지하철 2호선 지상 구간을 지하화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 서울시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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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가 기업을 자유케 하리라

서울로 한정해 말하자면 지상 철도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서울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진공 모터 역할을 할 GTX는 처음부터 지하 40m 밑 대심도 철도로 구상됐다. 정치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 그나마 남아 있는 지상 철도들마저 땅에 묻히게 된다. SF소설에 등장하는 거대 지하세계가 구상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상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정치인들이 제시한 담대한 구상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소요 비용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이 질문에 정치인들은 이미 '모범답안'을 마련했다. 민자도입!

민간투자로 사업을 진행하면 정부의 재정 부담이 줄고 세금을 그만큼 아낄 수 있다는 논리다. 선한 프로젝트 파이낸싱이 이루어진다는 것일까?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기업들이 아낌없이 돈을 내놓기라도 한다는 것일까? 민자 사업은 공짜가 아니다. 이미 진행된 수많은 민자 사업의 폐해가 그 증거다.

때마다 돌아오는 철도 지하화의 유령?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3월 '2040 서울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해 지하철 2호선 지상 구간을 지하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역시 대선 후보 시절 서울과 부산의 경부선 철도를 비롯해 많은 구간을 지하로 넣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교통 대책도 아니고 주거 대책도 아니다. 교통 여건이 개선되지도 않는다. 개발을 통한 치적 쌓기에 불과하다. 멀쩡히 다니는 철도를 지하로 밀어 넣는 데에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다. 철도와 결합된 부동산 욕망이 꿈틀대고 토건 이해관계에 얽힌 이들에게는 축복이 내려진다.

지난 몇 년간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 잡기의 대안으로 서울·수도권에 대규모 아파트 공급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미 고밀도 개발로 주택 부지가 부족한 서울에서 지상철도 부지는 매력적인 대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있는 지금 과도한 개발 드라이브를 거는 것은 서민을 위한 민생 대책이 아니다. 토건족의 뒤를 봐주는 거대한 도박이다.

교통 문제에 한정하더라도 서울과 수도권 안에 더 시급한 곳들이 줄을 섰다. '질식철'로 불리는 김포 골드라인이나 이미 한계에 다다른 2·4·5·7·9호선 교통량 분산 대책도 필요하다. 경의중앙선과 강릉선 등이 중복되는 서울과 경기 동부의 철도 병목현상도 해결해야 한다.

전국으로 시각을 넓히면 도로에서 철도로 수단을 전환하기 위한 철도망과 궤도 중심 운영 환경 조성을 서둘러야 한다. 도로 교통 우선과 개발 지상주의의 망토를 둘러싼 기후 악당이 미래 대한민국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정치는 전국적인 광역망 구성과 이 광역망을 이어주는 철도망의 구상을 통해 지역소멸에 대비하고 기후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에 기여해야 한다.
 
독일 베를린 시내를 질주하는 지상 전철
 독일 베를린 시내를 질주하는 지상 전철
ⓒ 박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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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이를 가로질러 달리는 일본 오사카 지역의 지상 전철
 마을 사이를 가로질러 달리는 일본 오사카 지역의 지상 전철
ⓒ 박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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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 공공성 위에 지속가능을 말하는 정치인은 없는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철도 지하화 논란과 관련해 몇 가지 생각할 문제를 던져보고 싶다.

첫째, 지구 전체 탄소배출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교통 부문에서의 온실가스 감축 계획이 필요하다. 도로 교통을 철도나 자전거 등 대안 교통수단으로 대체하는 기획 없는 도시 계획은 반 지구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철도망 확장을 꾀할 수 없는 무분별한 지하화는 문제다.

둘째, 정치는 사회경제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치열하게 작동해야 한다. 소수가 개발이익을 독점하고 일부가 그 떡고물을 나누는 사이 서민들의 공동체가 붕괴되는 일이 벌어져선 안 된다.

셋째, 지상 철도가 발생시키는 문제들은 지하화 아니면 해결 불가능한가? 선진국의 많은 도시들에서 지상 철도는 시민들의 좋은 친구가 되고 있다.

넷째, 공공의 역할을 줄이고 민간 참여를 확대하겠다는 말은 약육강식의 시장 논리로 사회를 재구성하겠다는 무서운 말이다. 좋은 민영화는 뜨거운 얼음처럼 구현 불가능한 이상이다.

화려함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사람들의 영혼은 더 황폐화되고 있다. 하늘 높이 빌딩들이 솟아오르고 개발된 서울이 빛날수록 가난한 이들에게는 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 연구위원. 이 글은 참여연대 소식지 <월간참여사회> 2022년 10월호에 실립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


태그:#철도, #지하, #서울시,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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