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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이희호 가족 (왼쪽부터 2남 홍업, 김대중, 이희호, 장남 홍일, 3남 홍걸).동교동 자택에서.
 김대중 이희호 가족 (왼쪽부터 2남 홍업, 김대중, 이희호, 장남 홍일, 3남 홍걸).동교동 자택에서.
ⓒ 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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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희호의 양성평등사상은 역사적·학문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현실적인 함의 역시 매우 크다. 최근 일련의 정치사회적 사건에서도 젠더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차별 없는 공존을 지향했던 김대중-이희호의 양성평등사상의 현실적 함의는 매우 크다.

필자는 두 인물의 양성평등사상이 그와 같은 의미를 갖고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와 인본주의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판단한다. 김대중-이희호의 민주주의는 차이에 대한 인정과 공존을 지향하는 통합과 평화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두 인물의 양성평등사상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9월 21일 이희호 여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김대중-이희호의 양성평등사상을 재조명하는 것은 더욱 뜻깊다. 필자는 두 인물의 양성평등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결혼 과정부터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결혼은 남녀간의 사랑 등 인간적인 요소도 영향을 줬지만 정치적 동지로서의 유대감 및 사명감 등도 큰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민주적 통합론에 기반한 양성평등사상이 나올 수 있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희호의 선택이 무모해보였던 이유

이희호는 1950년대에 미국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여성으로서 YWCA연합회 총무(1959~1962),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1961~1970), 여성문제연구회 회장(1964~1970), 대한 YWCA연합회 상임위원(1964~1982), 범태평양 동남아시아 여성연합회 한국지회 부회장(1968~1972) 등을 역임하는 등 여성지도자로서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이희호는 김대중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극심한 고통을 겪지도 않았을 것이며 여성계 경력도 단절되지 않고 승승장구하면서 한국여성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됐을 것이다. 그러면 이희호는 왜 김대중과 결혼하려고 했고 주변에서는 왜 그렇게 반대했을까? 이희호가 1962년 김대중과 결혼하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반대한 핵심적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김대중의 개인적인 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김대중은 5.16으로 인해서 정치적으로 몰락한 상황이었고 마땅한 직업도 없었다. 또한 상처한 후에 두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었으며 집에는 시어머니와 병든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희호가 결혼하면 이 집에서 같이 살아야 했다. 당시 김대중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혼반지를 이희호가 준비했을 정도였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주변에서 크게 반대한 것이다.

둘째, 이희호가 여성계 지도자로서 성장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제2공화국 장면 총리의 총애를 받은 민주당 신파의 촉망받는 소장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5.16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장면을 비롯한 민주당 신파는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또한 김대중은 군사 정권의 회유를 거부하고 민주화투쟁을 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희호가 김대중과 결혼하게 되면 그녀의 사회적 활동은 크게 제약을 받을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이희호를 여성계 지도자로 염두에 뒀던 사람들은 이 점을 크게 우려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희호는 김대중을 선택했다. 이희호가 김대중을 선택한 몇 가지 이유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희호는 김대중이 여러모로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옳은 가치를 위해서 신념을 버리지 않고 노력하는 김대중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선택했다. 이것은 정치적 동지로서의 판단이었다.

이것은 이해관계 측면에서만 본다면 매우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희호는 자신이 갖고 있었고 앞으로 가질 수 있는 각종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는 권위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여성계를 비롯해서 각종 사회단체는 주로 정부 여당을 상대로 한 청원 형식을 통해서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정책에 반영되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권력과 거리가 멀어지고 더군다나 대립하는 관계에 있게 되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희호와 김대중의 만남이 중요한 이유 

그래서 이희호는 김대중과의 결혼을 선택하게 되면서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고난이 예비된 힘든 길이었지만 이희호는 자신의 신념인 여성인권신장, 양성평등을 민주주의 원칙과 기반 위에서 추구하게 됐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권위주의 정권의 압도적인 힘에 기대는 방식이 아니라 민주주의 가치 속에서 민주적인 정부를 통해서 여성인권신장과 양성평등을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김대중의 민주화 이행론의 핵심인 자주적 민주화론과도 연결된다. 김대중은 자주적인 힘으로 민주화를 쟁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김대중의 지론이었다. 그것은 여성, 노동, 농민 등 분야별 운동, 분야별 민주화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희호는 페미니스트로서 김대중과의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여성인권신장과 양성평등을 위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과의 결혼을 통해서 김대중의 자주적 민주화론에 영향을 받았다. 또한 고난의 길을 김대중과 함께 극복하면서 이것을 체화하고 더욱 강한 신념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김대중과 이희호는 전쟁과 폭력으로 극단적인 갈등이 내재화된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차이에 대한 인정, 타자와의 공존을 지향하는 민주주의을 추구했다. 두 사람은 냉전, 분단, 독재에 의한 극단적인 고통을 겪으면서 위와 같은 신념과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여기에는 신앙의 힘도 크게 영향을 줬다.

그래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옥중서신에서도 명확히 확인되는대로 두 사람은 혐오, 배제, 폭력을 철저히 배제했다. 자주적 민주화론에 보듯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끈질기고 처절한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상대를 포용하는 관용의 큰 정치를 통해서 기득권과 가해자들의 자생적 변화를 추구하면서 공존의 폭을 넓히려고 했다.

권위주의적 통합은 차이를 없애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민주적 통합은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호 간의 소통을 통해서 공존의 영역을 넓히는 방식으로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적 통합론은 평화적이고 인본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김대중-이희호의 양성평등사상이 위와 같은 성격을 갖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김대중, 이희호를 통해서 더 큰 인물이 되다
 
1963년 김대중 대통령은 전세였던 동교동 작은 주택을 구입하면서 배우자 이희호 여사의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함께 달았다(윗 사진). 아래 사진은 1984년 보도된 두 사람의 모습.
 1963년 김대중 대통령은 전세였던 동교동 작은 주택을 구입하면서 배우자 이희호 여사의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함께 달았다(윗 사진). 아래 사진은 1984년 보도된 두 사람의 모습.
ⓒ (사)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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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이희호가 평가한 대로 원래부터 민주적이고 양성평등의식을 갖고 있었다. 1964년에 김대중이 자신의 집 대문에 김대중-이희호 문패를 함께 걸어놓자고 먼저 제안한 것은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다. 가부장적인 남성우월주의적 문화가 뿌리 박혀 있던 1960년대 중반에 부부의 문패를 함께 걸어놓은 집이 과연 얼마나 됐을까? 다른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김대중-이희호 문패의 의미는 매우 크다.

그런 김대중조차도 이희호로부터 여성인권신장과 남녀평등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쳤다고 말했다. 그렇게 보면 김대중은 이희호를 선택하고, 이희호부터 선택을 받아 결혼하게 되면서 그의 민주주의 이론과 정책에 여성문제에 관한 내용이 풍부해지고 깊이 있게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김대중은 여성인권신장의 획기적인 계기가 된 1989년 가족법개정을 혼신을 다해서 이뤄냈다. 이때 가족법개정이 이뤄지면서 여성에 대한 사회경제적 차별이 대부분 없어질 수 있었다. 실질적인 남녀평등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여성인권신장 양성평등에 있어 1989년 가족법 개정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특히 이것을 야당 총재 시절에 정부 여당을 설득하면서 이뤄냈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회적 공감대를 그만큼 넓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제정했다. 또한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고용보험법' 등 모성 보호 관련 법을 개정해 모성 보호 비용의 사회 분담 근거 규정을 마련하는 등 모성의 사회성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모든 것을 김대중 대통령 특유의 설득의 리더십을 통해서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이뤄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민주적 통합론에 근거한 양성평등사상과 관련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이희호의 양성평등사상이 오늘날 필요한 이유

이제까지 살펴본 김대중-이희호의 양성평등사상은 요즘 시대에 주는 함의가 매우 크다. 김대중이 추구한 화해, 소통, 공존의 철학은 지역, 계급, 분단, 냉전 등 다양한 영역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 가치다. 이는 이희호와 함께 내세운 양성평등에서도 나타난다. 김대중-이희호는 양성평등에 있어서 타자를 혐오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리를 획득하고 정체성을 과시하는 것을 경계했다. 두 인물은 젠더 문제에 있어서도 민주적 통합론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김대중과 이희호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엄혹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두 인물은 화해, 소통, 공존의 철학에 기반한 민주적 통합론을 내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이희호의 삶과 두 인물의 양성평등사상이 위대한 것이며 현재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태그:#이희호,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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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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