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시민기자들이 '점심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배가 고픈 느낌이 들어 시계를 보니 낮 12시가 넘었다. 벌써 점심시간이 된 것이다. 냉장고를 뒤적이는데 딱히 먹을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요리해서 먹자니 귀찮고, 그렇다고 안 먹자니 배가 고플 것 같다. 결국, 김치와 연근조림과 같은 마른반찬을 몇 개 꺼냈다. 넓은 접시에 밥과 밑반찬을 한꺼번에 담았다. 이로써 어제와 똑같은 점심이 완성되었다.

그제 점심은 샌드위치였다. 그리고 그 전날의 점심은 라면이었다. 내일의 점심은 샌드위치, 라면, 그리고 오늘 먹는 밑반찬과 밥, 이 셋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마 오후가 되면 언제나처럼 출출하다고 과자를 집어 먹게 될 터였다.

몇 달 전만 해도 내 점심시간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나는 회사에 다니던 직장인이었다. 당시 회사에서의 낙은 두 가지였다. 바로 월급날과 점심시간.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오늘 구내식당 메뉴는 뭐더라?'

종종 회사 밖에 나가 점심을 먹기로 한 날이면 동료와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뭐 먹지? 길 건너 초밥집은 어때? 아니다, 날이 쌀쌀한데 쌀국수 한 그릇 할까?'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 시계를 흘끔거리곤 했다.

휴직 이후 달라진 점심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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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면은 만만하게 먹을 수 있는 점심메뉴 중 하나다.
ⓒ 오지영	관련사진보기

 
지금은 개인적인 이유로 휴직자 신분이 된 상태다. 갑자기 점심시간에 변화가 생겼다. 점심 메뉴뿐 아니라 점심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바뀌었다. 일단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한숨부터 나온다. "와, 오늘 뭐 먹을까?↗"에서 "아, 오늘 뭐 먹지….↘"로 바뀌어버렸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고픈 배를 달래기 위해 뭔갈 꺼내먹는다.

휴직 초반엔 남부럽지 않게 알차게 차려 먹었다. 먹고 싶었던 메뉴도 마음껏 사 먹었다. 식당에서 차례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후루룩 밥을 마시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한 입 한 입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얼마나 원했던 점심시간의 여유였던가.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여유보단 불편함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일단 매 끼니를 사 먹는 건 휴직자에겐 사치였다. 빡빡한 통장 잔고가 지갑으로 향하는 내 손을 가로막았다. 식당에서 나 홀로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먹는 것도 은근 눈치가 보였다.

집에서 먹는 것 또한 편하진 않았다. 가족들이 있어 먹는 입이 많으면 어쩔 수 없이 요리를 하게 된다. 하지만 내 입 하나 챙기자고 요리하는 과정은 한없이 귀찮았다. 장보기, 재료 손질, 조리, 플레이팅…. 단계마다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했다. 게다가 그렇게 만든 음식은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먹고 쌓아 둔 설거지는 또 하나의 일이 됐다.

노선을 바꾸었다. 1인분이 가능한 메뉴, 손이 덜 가는 메뉴, 빠르게 뒷정리를 할 수 있는 메뉴를 찾게 되었다. 주로 라면, 카레, 샌드위치, 김밥, 밑반찬을 돌려가면서 먹는다. 그렇게 요즘 나의 점심시간 모토는 '대충 먹자'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편이고, '혼밥' 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간혹 출장 때문에 혼자 밥을 먹는 날이면,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맘껏 고르고, 마음 편히 먹을 수 있어서 좋아했다. 하지만 요즘엔 혼밥이 그리 즐겁지 않다. 돌이켜보면 이전엔 그 시간이 가끔이라 특별하고 소중했던 것이다.

밥 한술에 김치 하나를 입에 넣는다. 조용한 집 안에서 우적우적 씹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켜서 식탁 앞에 올려둔다. 아이들에게는 TV나 스마트폰 보면서 밥 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너무 조용해서 그렇다고, 가끔은 그래도 된다고 스스로 변명을 해본다.

문득 회사 동료들은 뭘 먹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회사 근처 맛집은 문전성시를 이룰 테지. 당시엔 내 차례를 기다리는 시간이 그렇게도 싫었는데, 지금은 재미난 추억으로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회사 다닐 땐 점심시간이 참 즐거웠는데….

직장인의 점심시간은 지금처럼 단순히 배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은 오전에 소비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었다. 동시에 오후에 소비할 에너지를 쌓아놓을 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업무에서 잠시 벗어나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이 컸다.

동료들과 요즘 하는 업무, 회사에서의 고충, 즐겨보는 드라마 속 인물들, 그리고 우리의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가족에 관해 한참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렇게 점심시간 한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리곤 했다.

휴직한 지금도 가끔 그들과 점심시간을 공유한다. 하지만 직장인과 휴직자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 거리가 생겨났다. 함께하는 점심시간 빈도는 점차 줄어들었다. 요즘엔 점심시간 대부분을 혼자 보내고 있다. 혼자 메뉴를 고르고, 혼자 밥을 차리고, 혼자 음식을 씹어가며 점심시간을 채운다.

하루의 중간... 나에게 주는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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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서 혼자 밥 먹을 때 가장 만만한 비빔밥. 혼자 먹어도 계란프라이는 반드시 넣어주기!
ⓒ 최은경	관련사진보기

 
밥을 다 먹어갈 즈음, 남편에게 연락이 온다. '점심 먹었어?' 나는 답장을 보낸다. '대충 먹었어.' 내가 쓴 문자를 들여다보다가 되뇌어본다. 대충이라. 언젠가부터 대충 먹는 게 당연한 것이 되었을까? 남편에게서 다시 답장이 온다. '혼자 먹더라도 먹고 싶은 거 잘 챙겨 먹어.'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어? 지금 생각나는 건 김치찌개다.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김치가 요즘 퍽 시어졌다. 그 김치에다가 돼지고기를 아낌없이 썰어 넣어 팔팔 끓이면 맛있는 김치찌개가 완성될 것이다. 하얀 쌀밥에 빨간 국물의 김치찌개를 함께 떠먹는 상상을 하니 입맛이 확 돈다.

더는 점심시간을 대충 먹는 시간으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 나를 대접해주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다. 누군가 옆에 없더라도, 내가 나를 챙겨주면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내일은 대충 차린 밥상 대신 나를 위해 정갈한 점심 식사를 준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왕이면 고기 팍팍 넣은 김치찌개로.

우리 모두에게는 점심시간이 소중하다. 하루의 중간에 자리하는 휴식 같은 시간이다. 열심히 오전을 살아낸 것에 대한 보상이자, 다가올 오후를 위한 응원의 시간이다. 직장인, 휴직자, 아이들, 주부 등 우리 모두에게 점심시간은 배도 채우고 행복도 채울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