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 장면 ⓒ SBS

 
한평생을 오직 조국 독립에 몸 바쳤던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가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18일 방송된 SBS <꼬리의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일본을 떨게한 '전설의 타이거 헌터' 홍범도와 독립군들의 활약상이 펼쳐졌다.
 
2021년, 서울의 한 대학 장례지도학과를 맡고 있던 박채원 교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카자흐스탄의 한 공동묘지에 안치된 한 시골 극장의 수위의 시신을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박 교수는 처음에는 자문으로 시작했다가 아예 본인이 적극적으로 현지행을 자원했다며"이 일에 참여하게 된 자체가 장례전공자에게는 이거보다 더한 영광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발굴팀은 시신이 묻힌 묘지를 찾아 3일에 거친 발굴작업 끝에 유골을 찾아낸다. 비닐에 싸인 유골을 확인하고 모두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 교수는 "실제로 유골을 보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그 순간의 느낌은 지금도 남아있다. 제 주변에 있던 분들도 다같이 놀라서 '정말 나왔어요?' '이제 됐다'고 기뻐하더라. 그 순간 울컥해서 울었다"고 회고했다. 대체 이 유골의 정체는 누구였길래 모두가 이토록 감격한 것일까.

이야기는 1895년으로 되돌아간다. 그해 10월 8일 새벽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하여 잔인하게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성난 여론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그리고 국모의 시해 소식에 분개한 이들중에는 '홍대장', 조선 최고의 '타이거 헌터'로 불리우는 홍범도가 있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야생 호랑이로 인하여 민간에 큰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많았고,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포수들이 존재했다. 홍범도는 190cm가 넘는 장대한 기골에, 과녁을 잡으면 총알이 병을 통과하게 만들 정도의 명사수로 불리며 조선 팔도의 포수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홍범도는 명성황후의 시해 소식을 듣고 일제의 만행에 맞서싸우기로 결심하며 "지금부터 호랑이가 아니라 왜놈을 잡는다"고 선언한다. 홍범도의 어린 두 아들을 비롯하여 무려 68명의 포수들이 자원하여 의병을 조직한다.

홍범도가 이끄는 산포수 의병대는 백두산을 비롯한 함경도 일대에서 활동하며 60전 60승이라는 놀라운 전과를 올린다. 홍범도의 전략은 마치 호랑이 사냥을 하듯 일본군을 사냥하는 것이었다. 일본군들이 다니는 길목에 매복해있다가 몰이꾼들이 일본군을 유인하여 사정권에 들어오면 저격하여 해치우는 방식이었다.
 
당시 의병대의 주무기인 화승총은 불에 붙인 심지가 화약에 닿으면 발사하는 무기로 사거리는 50m 정도에 불과했다. 첫 발을 놓치면 바로 반격을 당하여 호랑이밥이 되기 십상이다. 그만큼 포수들은 출중한 사격술과 대범한 강심장, 지칠줄 모르는 체력까지 겸비한 존재들이었다.
 
홍범도를 잡으려는 일본군의 추적이 계속되었지만 신출귀몰한 행적으로 번번이 골탕을 먹어야했다. 당시 홍범도의 의병대에 복무했던 차도선 의병의 손녀 차옥겸 씨는 "나는 홍범도에 뛰는 차도선이라고 했다. 하루에도 천리씩 뛴다고 해서 별명이 차천리였다. 일본군이 이 산에서 할아버지를 잡으려고 하면 벌써 저 산에 가 있을 만큼 날쌨다고 한다"는 일화를 전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 장면 ⓒ SBS

 
의병군에게 연패한 일본군은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복수에 나섰다. 일본군에게 끌려온 홍범도의 아내는 볏짚을 발가락 사이사이에 끼우고 불을 붙이는 극악의 고문을 당하면서도 혀를 깨물고 끝까지 버텼고 결국 며칠후 옥사했다.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홍범도의 장남인 양순도 전투중 전사했다. 일본군과의 전투를 기록한 홍범도의 일지를 보면 "5월 18일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고 기록되어있었다. 하루아침에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은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일본군의 거센 추격과 보급 부족에 시달린 산포수 의병대는 1919년 만주로 근거지를 옮긴다. 그해 3월 1일에는 전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독립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홍범도는 만주에서 모인 의병들을 군대 조직으로 재편하며 대한독립군을 창설한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무장투쟁을 바탕으로 '1920년에는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당시 홍범도의 나이 52세였다.
 
만주 각지에 흩어진 독립군들은 함께 힘을 모아 국내로 진공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독립군의 전력은 당시 세계 3위의 군사력을 지닌 현대화된 일본군에 비하여 현저히 열세였다.일본군은 정예부대로 구성된 월강추격대를 조직하여 두만강을 넘어 독립군을 소탕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한다.
 
봉오동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었다. 독립군은 조롱박 형태의 지형을 활용하여 일본군을 유인해내 삼면에서 매복 공격을 펼쳤다. 전략은 좋았지만 압도적인 병력과 물자의 열세속에 독립군은 총탄이 차츰 떨어져가며 점점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악천후가 독립군에 천운으로 작용했다. 돌연 천둥번개와 비바람에 이어 사람의 살갗이 패일 정도로 거센 우박까지 쏟아지며 혼란에 빠진 일본군은 결국 전투 3시간 만에 후퇴를 결정하며 전투는 독립군의 승리로 끝났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과 일본군이 전면전으로 격돌한 최초의 전투이자 승전이라는데 의미가 크다. 당시 독립군의 값진 승전보는 두만강을 넘어 국내에도 전해졌다. 언론에서는 독립군의 승전을 자세히 보도하며 '일본군은 사망 157명, 중상자 200여명, 경상자 100여명인 반면, 아군은 장교 1인, 병사 3인, 중상자 2인이고, 아군은 안전지로 퇴각하고 일본군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국내로 패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봉오동 전투의 승전은 국민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분노한 일본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의미하는 '불령선인'을 모두 제거하겠다고 선언하며 간도 지방의 독립군을 초토화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일본은 약 2만5천의 병력을 독립군 토벌을 위하여 파견했다.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은 봉오동에서 청산리로 이동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도 합류한다.
 
독립군과 일본군은 백운평, 천보산, 만기구,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갑산촌 등 청산리 일대에서 6일간 무려 10번의 전투를 치른다. 독립군은 열악한 조건을 딛고 일본군에 또다시 큰 승리를 거뒀고 이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목숨을 건 전쟁은 일선의 독립군들만 치렀던 것이 아니다. 당시 간도에 있던 우리 동포들은 여인들이 위험한 전장까지 직접 식량을 만들어 배달하는가하면, 어렵게 농사를 지어 번 돈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한 이들도 있었다.
 
독립운동가 최운선 장군의 아들 최호석 씨는 당시 부유한 대지주였음에도 독립군을 후원하기 위하여 기꺼이 모든 재산을 기부했던 부친의 일화를 공개하며 "그래도 사람이 나서서 나라를 구해야 했다, 나라가 있어야 우리도 살 곳이 있지, 나라가 없으면 우리가 살곳이 없으니까"고 고백했다.
 
한 학자는 이를 두고 "독립군이 물고기라면 민초들은 헤엄칠 물이 되어줬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처럼 청산리 대첩은 물과 물고기가 온 힘을 합쳐서 하나가 되어 함께 만들어낸 승리였다.
 
애석하게도 승리의 영광은 짧았다. 독립군에 연패한 일본은 보복으로 간도 일대에서 대학살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살해당한 민간인들만 무려 3천 7백여명에 이르렀다. 이즈음 홍범도의 둘째 아들도 전투중 병을 얻어 사망했는데 당시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간도참변 이후 독립군들은 하나둘식 뿔뿔이 흩어지며 와해되었고, 아내와 두 아들을 모두 잃은 홍범도도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홍범도가 남긴 생전 유일한 영상은 1922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소련 군복을 입고 촬영된 모습이었다. 일본의 추격과 핍박에 시달리던 홍범도는 소련으로부터 와서 소련 혁명군을 도와주면 독립군을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홍범도가 소련에 망명하면서 작성한 입국문서에는 직업을 '의병'으로, 목적과 희망을 '고려독립'으로 기재한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소련은 독립군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않았다. 홍범도는 군복을 벗고 농부가 되어야했다. 당시 소련에는 일본의 핍박을 피하여 이주해온 다수의 조선인들이 있었고 이들은 현지에서 '고려인'으로 불리웠다. 그 고려인 1세대의 중심에는 바로 홍범도가 있었다.

어렵게 소련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홍범도와 고려인들에게 또다른 시련이 찾아온다. 스탈린 정권은 17만 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을 그들이 거주하던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크 지역에서, 강제로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일본과 대립하던 소련은 ,한국인의 외양이 일본인이과 매우 닮았고 이중에서 일본의 첩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어이없는 명분으로 강제이주를 정당화했다. 나라가 없는 민족의 설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초같은 생명력의 한국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처음에 강제이주할 때만 해도 황무지밖에 없었던 터전을 고생 끝에 농지로 개척해냈다. 어느덧 칠순이 된 홍범도는 고려인을 위한 극장에서 수위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홍범도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고 얼마후에는 본인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올려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홍범도는 자신의 인생사를 구술로 풀어내고, 그를 취재한 부부가 내용을 옮겨적은 기록이 '홍범도 일지'다. 이 일지를 토대로 '의병들'이라는 연극이 탄생했다. 연극은 큰 성공을 거뒀고 홍범도 역시 뒤늦은 유명세를 누렸다.
 
홍범도는 1943년 10월 25일, 현지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5세였다. 그가 평생을 꿈꾸려 기다려온 조국의 독립을 불과 2년 남겨둔 시점이었고, 안타깝게도 그는 살아생전에 끝내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당시 언론은 '홍범도 동무를 곡하노라'라는 기사에서 홍범도의 일생과 업적을 회고하며 "일찍부터 착취에 대척하여 분투하였으며 조선 독립운동의 거두가 되어 고군분투하였다. 홍범도 동무에 대한 기억은 그를 아는 친우들에게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며 애도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 장면 ⓒ SBS

 
홍범도는 생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고 우리 나라가 해방된다면 꼭 나를 조국에 데려가 달라. 광복 이후 많은 이들이 그의 유언을 받들기 위하여 노력했지만 송환은 번번이 무산됐다. 소련의 공산화와 냉전, 한국 전쟁을 겪은 우리 사회의 반공주의의 여파 등으로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고 현지에서 일생을 마감한 홍범도의 행적에 대한 선입견도 국내의 관심이 시들해지는데 영향을 미쳤다. 이념 대립과 분단국가의 현실이 낳은 또 하나의 씁쓸한 장면이었다.

2021년, 홍범도는 무려 78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도입부에서 발굴해낸 유골의 주인공이 바로 홍범도였다. 다행히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유골의 보존상태는 상당히 양호했다고. 어쩌면 언젠가는 고국으로 꼭 돌아가겠다는 홍범도의 간절한 바램이 낳은 기적은 아니었을까.
 
8월 15일, 카자흐스탄에서 운구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대한민국 공군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 공항에 도착했다. 공군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평생을 헌신하신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라며 내내 최상의 예우를 다했다. 정부는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에게 최고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홍범도 장군은 늦게나마 고국으로 돌아오며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지만, 이름도 남기지못하고 사라진 더 많은 의병들이 존재한다. 교과서에도 '의병들의 사진'으로 기재되며 유명한 사진이 있다. 당시 의병들은 사진을 찍은 기자에게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값진 일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전해진다.
 
단재 신채호는 "영토는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어록을 남겼다. 누군가는 희생을 무릅쓰고 어려운 일을 해냈기에 지금의 우리가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름모를 선조들의 희생으로 지켜낸 땅 위에 숨쉴 수 있음을 가슴에 새기고, 오늘, 그리고 내일을 더 열심히 살아가야할 이유일지도.
홍범도 꼬꼬무 독립운동 봉오동전투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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