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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이 여의도 국회의사당앞 광장에서 열린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낭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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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이 여의도 국회의사당앞 광장에서 열린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낭독하고 있다. (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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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3년이 지났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증기 기관차를 타고 다니던 중학생 시절이었다. 유신독재가 시작되기 직전 해인 1971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와 맞붙어 유세 중이던 때였다.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키 작은 중학생이었던 나는 광장 멀리 설치된 스피커 밑에서나마 그의 모습과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연설 내용은 기억에 없다. 그러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오른손을 힘 있게 내려치는 열정적인 모습에 매료되어 그의 연설을 끝까지 들었던 기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에 있다."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 정의경제의 구현, 복지사회 실현, 자주적 평화통일의 달성, 국민화해 등을 이념으로 1987년 창당된 당시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의 1990년 국회 대표연설문 중의 일부이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떠나, 향후 민주주의의 성공은 어떤 목적에 의해 정치적 행위가 이루어지는가에 달렸다는 확실한 명제를 제시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 행태가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국리민복(國利民福)'의 목적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민주적인 과정을 꾀해왔을 뿐 아니라 절차의 정당성마저 무시되는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현실에서 다시 새겨볼 의미 있는 명언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그의 삶은 인동초처럼 끈질긴 질곡의 시간이었다. 197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 인생에서 첫 번째 분수령을 맞는다. 그는 대통령 후보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미·소·중·일 4대국 보장, 비정치적 남북 교류 허용, 평화통일론, 예비군 폐지' 등을 제시해 선거를 뜨겁게 달궜다. 약 46%를 득표함으로써 선전했지만 낙선, 유신 선포 후에는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1987년까지 그는 시련과 저항의 나날을 보냈다. 1973년 도쿄 납치 살해 미수 사건이 일어난 후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정치 활동을 재개했지만, 1980년 내란 음모 사건으로 다시 수감됐고, 1982년 신병 치료 차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그는 군사정부에 당당히 맞서 저항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화 시대가 열리고 12월에 치러진 대선에 출마했으나 그는 낙선했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평화민주당이 1988년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하면서 재기했다. 1992년 대선에서 세 번째 고배를 들었던 그는 1997년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화해와 용서'의 상징 DJ

"마지막으로 여기 앉아 계신 피고들께 부탁드립니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 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80년 9월 13일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 1심 재판의 최후진술이다. 그는 대통령 당선인 시절인 1997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건의했다. 당선인의 건의를 받아들인 김영삼 대통령은 두 사람을 풀어줬다.

'용서'는 김대중의 종교적 신념과도 연관이 있다. 1976년 3·1 구국선언 관련 1심 최후진술에서 김대중은 "면회하러 온 제 안사람(이희호 여사)이 (신약성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제12장 제14절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긴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화해'는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그의 원대한 구상과 관련이 있었다. 한국의 지정학적, 역사적 조건에 의해서 과거사 문제는 국내 문제임과 동시에 남북관계, 국제적 성격도 갖고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와 같은 과거사 문제의 복합적 성격을 잘 알고 있었고 이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만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마침내 2000년 3월 9일 김대중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강연을 통해 대북 경제지원, 평화정착, 이산가족 문제 해결 및 당국 간 대화 등 한반도문제 전반을 포괄하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화해·협력 선언(베를린 선언)"을 발표하였다.

2000년 6월 13일 오전 10시 30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남측 대표단을 태운 비행기가 평양 순안 비행장에 내렸다.

1948년 한반도가 반으로 갈라진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정상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두 정상은 2박 3일 동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관계사의 이정표로 남을 6·15 남북공동선언문을 도출해냈다.  

이 이정표에 따라 이어진 고 노무현, 문재인 두 전직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의 긴장 완화, 남북 스포츠 교류, 북한의 비핵화 촉구 등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기여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2022년 8월 18일, 윤석열 정부가 출범 101일을 맞는 날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3년이 되는 날이다. 윤 대통령은 어제(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의 모두발언을 통해 "시작도 국민, 방향도 국민, 목표도 국민이라고 하는 것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다"며 "북한에 무리한 힘에 의한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지속 가능한 평화를 정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정 지지율은 끝없는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고 시민단체들은 "10년 같은 100일"이었다며 한숨을 내쉬는 등 총체적인 난관에 빠졌다. '공정과 상식'이 최고의 가치라던 현 정부의 캐치프레이즈는 '불공정과 비상식'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나 온 수많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생각해 본다. 과연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시작도, 방향도, 목표도 국민"이라면  '수단과 방법' 위에 '목적'이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마지막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태그:#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에게 길을묻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3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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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기록하고 찰나를 찍습니다. 사단법인 한국지역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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