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10 14:06최종 업데이트 22.08.1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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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교육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4일 서울 성북구 국민대학교 총장실 건물 앞에서 김건희 여사 논문 표절 의혹 조사 결과에 대한 규탄 성명을 발표한 뒤 총장실로 향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현재 한국 사회 주요 논쟁 중의 하나는 표절이다. 대통령 부인, 장관들, 그들의 자녀, 그리고 유명 작곡가 사례가 연이어 보도되었다. 분야와 목적도 제각각이었고 그것을 설명하는 용어도 베끼기, 모방, 도용, 대필, 자기 표절, 레퍼런스(참조), 재활용, 복사해 붙이기(copy&paste) 등 다양하다. 각기 다른 상황이지만 표절은 그것이 옳지 않다는 전제 하에 실수·고의성 여부에 따라 판단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논의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시효가 지났다" "엄격하지 않았던 표절 규제" "유권 해석" 등 법의 영역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기울어짐은 도덕의 빈곤 상태를 보여준다. 도덕의 영역에서 판단되고 그에 따른 조치와 책임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도덕이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채 소위 도덕의 최소라고 하는 법의 영역으로 도망가는  현실이다. 여기에는 저작권을 협소하게 법적 권리로만 이해하는 것도 한 몫 한다. 하지만, 18세기 영국-프랑스-독일에서 형성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는 저작권의 개념에는 도덕적 권리가 담겨 있다.
  
'복사할 권리'와 '작가의 권리'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저작권은 최소 '작가 사후 50년'이고 많은 국가가 '작가 사후 70년'을 택하고 있다. 왜 일괄적으로 100년 혹은 150년이 아니라 사후 70년이란 유동적 표현을 쓸까. 저작권의 이원적 개념, 영국 중심으로 발전된 경제적 소유권과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가의 권리'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저작권법은 1710년 영국의 앤여왕 법(Statute of Anne)이다. 이전에는 관습적으로 저자가 돈을 받고 원고를 넘기면 모든 권리가 영구적으로 출판인에게 넘어 갔다. 이에 비해 앤여왕 법은 저자에게 14년+14년, 총 28년을 보장했다. 28년이 지나면 모두가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저작권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카피라이트(copyright)'가 복사+권리의 합성어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법은 인쇄기를 가진 자들의 싸움에서 촉발되었다. 중세 출판은 왕이 허가한 런던의 몇몇 출판사 손에 있었다. 하지만 의회 민주주의로 전환한 이후 언론의 자유가 기본권으로 보장됨에 따라  출판 독점도 해체되었다.

그로 인해 나타난 부작용이 해적판의 범람이다. 인쇄기를 구입해 기존에 나와 있는 책을 마구잡이로 찍어 싸게 파는 이들은 기존 출판인들을 위협했다. 출판계는 이전 질서로의 회귀를 원했으나 그것은 독점 경제를 의미했기에 의회는 거부했다. 출판계는 논조를 바꿔 작가 보호를 주장했다.      
  

저작권 ⓒ pixabay

 
의회 앞에 세 가지 과제가 놓였다. 하나는 자유 경제를 유지할 질서 만들기, 두 번째는 직업군으로 떠오르는 작가층 보호, 마지막으로 민주주의 대의에 맞는 열린 지식 공간 창출이다. 이를 위해 철학이 동원됐다. 소유는 노동에서 발생한다는 존 로크의 사상에 기초, 의회는 작품을 작가의 노동의 산물로 해석하고 작품 소유권을 작가에게 귀속시켰다. 출판사에겐 계약에 따른 발행권만을 부여함으로써 독점 경제를 막는 동시에 합법·불법의 경계를 세웠다. 그리고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갓 떠오르는 공리주의 사상을 수용, 책(지식)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했다. 바로 공적 영역(public domain)으로, 작가의 소유권과 출판사의 발행권을 동시에 제한해 엘리트 계층의 지식 독점을 막았다.  

영국이 "복사할 권리"를 통해 경제적 소유권을 발달시켰다면, 프랑스와 독일은 "작가의 권리"에 초점을 두었다. 이들의 질문은 '작품이 건물, 가구 등의 소유물과 동일한가?'다. 두 사회는 작품은 작가의 인격이 스며든 것으로 저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양도 할 수 없는 자연권을 가진다고 결론 내렸다. 영국의 앤여왕 법이 작가의 인격을 담지 않은 14년+14년이었다면, 프랑스와 독일은 작가의 생을 담아 '작가 사후 20년' 혹은 '사후 40년'으로 저작권 유효 기간을 표현했다.
  
해적판과의 싸움

두 갈래로 발달한 저작권이 서로 가깝게 된 계기는 공동의 골칫거리인 국제 해적판이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뿐만 아니라 당시의 미국에서는 특히 심했다. 미국 출판사들은 동일 언어권인 영국 작품은 물론이고 유럽 주요국의 작품을 작가 동의 없이 인쇄해서 팔았다. 그 양이 어마어마해서 당시 한 출판인은 1820년대 미국에 유통되는 70%가 영국 작품일 것이라 말했을 정도다. 방법은 간단했다. 런던에서 신간이 나오면 그 중 한 권을 배로 미국으로 가져와 인쇄해 싼 가격에 파는 것이다. 해적판은 캐나다까지 흘러 들어갔다. 이들 입장에서 대서양 너머의 비싼 영국 책을 수입하기보다는 가까운 미국의 값싼 해적판을 읽는 게 합리적이었다.

유럽 작가와 출판계는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저작권이 국내법이기 때문이다. 미국도 저작권법이 있었지만 미국 시민에게 국한시켰던지라 보호받을 수 없었다. 미국의 과도한 "문학 해적질(literary piracy)"에 1836년 영국 출판사와 작가는 미 의회에 해외 작가를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청원했다.
  

미국 해적판의 가장 큰 희생자인 스타 작가 찰스 디킨스 ⓒ 위키피디아 퍼블릭 도메인

 

미국 해적판의 가장 큰 희생자인 스타 작가 찰스 디킨스는 1842년 직접 미국을 찾아갔다. 1월부터 6월까지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국제 저작권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대체로 싸늘한 반응이었다. 이들에게 저작권은 반민주적이었다. 모든 인류의 공공 재산인 언어로 이익을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책은 사적 이익보다 대중 계몽에 기여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들에게 복사판은 엘리트의 지식 독점을 막는 수단이었다.

영국은 저작권법을 대영제국 전체로 확대 적용, 해적판의 캐나다 유입을 막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해적판에 관세를 부과하고 그걸 작가에게 지급하는 방안도 시도해봤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영국은 국제 조약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도덕적 작가권을 일부 수용, 작가 생애+7년(최대 42년을 넘지 않는 선에서)으로 표현 방식을 바꾼다. 그리고 1846년 독일에 이어 1852년 프랑스와 쌍방보호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레미제라블(1862)>의 저자 빅토르 위고(1802-1885) 등 프랑스 작가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1886년 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 10개국이 서명한 베른조약이 탄생했다. 현재 거의 180여 개국이 참가하고 있는데, 작가의 도덕적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유명 정치인 표절 사건

표절은 경제적 소유권과 도덕적 작가권(authorship) 중 특히 후자를 위반한 것이다.  해적판이 돈에 목적이 있다면 표절은 주로 부족한 자기 표현력을 메우고자 한다. 남의 것을 남의 것이라 인정하는 해적판과 달리, 표절은 남의 것을 자기 것이라 한다. 해적판의 공소 시효는 저작권 유효기간이지만 작가권을 건드린 표절은 영구적이다.

2020년 하반기 대서양 양쪽의 1942년생 동갑내기 정치인 둘이 주목을 받았다. 주인공은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조 바이든과 1983-1992년 영국 노동당 대표 닐 키넉(Neil Kinnock)이다.

때는 1987년. 영국은 총선, 미국은 민주당 대선 후보를 결정해야 했다. 키넉은 언어와 연설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고 모든 연설을 직접 쓴 정치인이다. 그 해 5월 키넉은 지금까지도 "수 천 세대(thousand generation)"란 별칭으로 회자되는 연설을 직접 쓴다.

주제는 기회였다. 밤을 새워 연설문을 썼지만 청중의 마음에 불을 붙일 요소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그는 연설도중 즉석에서 "천 세대 이상 이어진 키넉 가족 중에서 왜 내가 대학을 갈 수 있었던 첫 번째 키넉일까요?" 그리고 옆에 있던 부인 글레니스를 가리켜 "왜 천 세대의 글레니스 중 왜 그녀가 대학 교육을 받은 첫 번째 글레니스일까요?"를 덧붙였다. 개인 재능의 부족이 아닌 딛고 일어설 기반의 부재를 강조하며, 개인의 능력과 경쟁을 강조하는 마거릿 대처를 비판한 것이다.

사회 문제를 개인화시켜 접근했던 파격적 화법은 이후 많은 정치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 중 한 명이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조 바이든이었다. 키넉의 연설에 감동을 받은 바이든은 위의 두 문장을 차용, 자신의 이름으로 바꿔 사용했다. 대부분의 유세에서 출처가 키넉임을 밝혔지만, 경쟁자 마이클 듀카키스가 녹음했던 8월 23일 아이오와 주 연설에서는 키넉의 이름을 빼먹었다. 이후 표절 문제가 제기되었고 조 바이든이 법대 시절 쓴 글까지 구설수에 올랐다. 9월, 바이든은 "악의적이지는 않지만"이라면서도 표절을 인정했고 경선에서 물러났다. "키넉과 마찬가지로"란 두 단어를 빼먹은 것에 대한 책임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 폭탄테러 관련 대국민 연설을 하던 도중 발언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2021.8.26 ⓒ 연합뉴스/AP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 둘의 뒷이야기는 훈훈하다. 3개월 후 영국을 방문한 바이든은 키넉과 긴 저녁을 먹으며 '문제의' 연설문에 사인해 건넸다. 20년이 지난 2007년 키넉이 미 상원을 방문했을 때, 바이든은 주변에 있던 의원들과 보좌관들에게 "나의 가장 위대한 연설문 작성가"라고 소개했다.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바이든은 2009년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에도 그를 초대했다.

표절 사건 이후 33년 만에 바이든이 대선 후보로 선출된 2020년, 과거 스캔들을 언급하는 기자들에게 키넉은 "단순 실수임을 안다"며 그를 옹호했고 "기꺼이 (바이든을 위해) 연설문을 쓸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표절 꼬리는 평생 따라다니겠지만 바이든의 해결 방식은 적절했다. 자신 부적절한 행동을 '연설문에도 저작권이 적용되는가?'라는 법적 문제로 전환시키지 않고 경선 하차로 책임졌다. 그리고 도덕적 권리를 가진 키넉에게 사과했고 그의 연설문에 대한 존경을 오랫동안 표했다.

현재 한국에서의 표절문제도 밀려나는 도덕을 사회적으로 회복할 기회다. 가해자도, 판단을 내리는 기관도, 지켜보는 사회도 작가의 도덕적 권리를 우선해 생각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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