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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셔널 갤러리가 미술관을 찾은 이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보니 관람객 중 60%가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눈물을 흘린 이들 중 70% 마크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상이 배제된 선과 색으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마크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감정이 북받쳐 올랐을까?
 
유영국의 'work'
 유영국의 "work"
ⓒ 유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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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답을 작고 20주기의 유영국 화가 전시회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관람객들의 '오열'을 상담해주는 카운셀러가 있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장 단순화된 선과 빨강, 파랑, 녹색의 삼원색을 기본으로 하여 노랑, 보라 등의 명료한 원색으로 분할된 그림 앞에 서면 묘하게도 '정화'된 감정에 빠져든다.

그저 '선과 색'일 뿐인데, 그 '단순한 정수'가 주는 '힐링'이 있다. 그래서일까 끊임없이 사람들이 드나든다. 아마도 BTS의 RM 역시 이런 선과 색으로 이루어진 강력하고 순수한 감동에 빠져든 것이 아니었을까.

오는 8월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 갤러리에서 작가의 회고전이 진행 중이다. k1, k2, k3로 명명되는 국제 갤러리의 다양한 전시 공간에 우리나라 추상화 1세대 유영국 작가의 회화 68점, 드로잉 21점, 그리고 사진 작품 및 작가의 활동을 담은 아카이브가 전시되어 있다.
 
유영국의 'mountain'
 유영국의 "mountain"
ⓒ 유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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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은 생전에는 팔리지 않을 것이다"

갤러리를 찾은 우리들은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품 옆에 붙은 '이름표'를 찾는다. 추상회화라 하더라도, 그 명명의 나침반을 따라 작품 이해의 길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국제 갤러리에 전시된 유영국 작가의 작품에는 그 '이름표'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 'work'이다. 가끔은 '봄비'이거나, '산', '고요함과 평화로움'이지만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그의 말처럼 '산'이라는 새삼스러운 명명이 무색하게 그의 빨갛고 파랗고 노란 산들이 그의 'work'에는 지천이다.

유영국의 추상을 이해하기 위해 20세기의 대표적 추상화가인 피에트 모드리안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세기 초반 당대 화가들이 그랬듯이 몬드리안도 입체파에 경도되어 있었다. 하지만 입체파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어느 순간, 더는 본래의 대상을 구분하기 힘든 차원에 이르르자 몬드리안은 식별할 수 없는 대상을 그리는 것을 넘어 절대적 진리를 현현하는 그림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여러 그림들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을 찾던 몬드리안이 찾은 건 삼원색과 흑백의 색과 선, 그 중에서도 직선이었다. 즉, 대상의 물성을 탈피해 낸 가장 순수한 선과 색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찾아가는 순수의 지점, 이것이 우리가 보는 추상이다.

1916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유영국은 3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추상 회화의 세례'를 받았다. 김환기, 이규상 등과 함께 우리나라 추상회화 1세대를 이룬다. 1960년대 이전 초기 작품에서는 '마티에르'가 강조된 투박한 느낌의 화풍이 등장한다. 이는 우리가 김환기의 작품에서도 익숙하게 보아왔던 '질감'이 강조된 표현 방식이기도 하다.

1960년대 초반 현대 미술가 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현대 미술 운동에 앞장서고, 신상회를 조직하여 젊은 화가들의 돕던 유영국은 1964년 이후 모든 대외적 활동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60이 될 때까지는 기초를 닦겠다'던 화가, 하지만 그의 그림은 60세 무렵 이병철 회장이 사줄 때까지는 팔리지 않았다. 아니, 우리가 미술 책에나 등장하던 유영국이란 화가를 알게 되었던 것도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이 세상에 알려지면서부터다.

어린 시절의 감흥이 되살아나기도
 
유영국의 '환희'
 유영국의 "환희"
ⓒ 유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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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두터운 화폭의 질감이 강조되던 유영국의 작품은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선 후 보다 명료하고 선명한 색과 선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어릴 적 처음 포스터 물감으로 '구성'을 하던 시절의 감흥이 되살아난다.

수채화 물감 밖에 없던 시절에 등장한 포스터 물감이 드러낸 그 더하고 뺄 것도 없이 명징한 색의 표현, 그걸 이용해 면 분할과 색채의 구성으로 이루어 내던 조합의 감동. 한때 중고등학교 벽면은 그림 솜씨를 뽐내던 학생들의 그 순수한 조합으로 채워져 있었다.

물론 그 '아마추어'들과 숭고한 희열조차 느끼도록 하는 작가의 경지를 비교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 '순수의 지향', 그 정신은 동일한 스펙트럼 안에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섣부르게 넘겨 짚어 본다. 선명하면서도 단순한 면 분할과 그를 채운 선명한 색감은 1970년대에 이르러 보다 구획된 '선'의 강조가 두드러진다.

짜임새 있는 선들이 규칙적으로 채워진 그의 1970년대 화풍을 보고 있노라면 전국 방방곡곡으로 고속도로가 뻗어나가던 우리의 1970년대가 오버랩된다. 묘하게 그 '추상' 속에서 우리의 근대화 정신이 읽혀진다. 물론 이건 그 시절을 살아온 기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말 그대로 '자로 잰듯' 구획을 나누어 표현되던 그의 그림들이 그의 세월과 함께 외려 조금씩 '구상'의 흔적들이 드러난다. 한 눈에 보기에도 겨울 나무인 듯 여겨지는 나무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기도하듯 손을 뻗는다.

대동아 전쟁 당시 일경을 피해 어부가 되기도 하던 화가, 전쟁통에 양조장을 하며 가솔을 거느리던 화가. 하지만 '금산도 싫고, 금논도 싫다며' 그림을 위해 서울로 떠나온 화가는 하지만 평생 자신의 그림 속에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을 담는다. 68점의 수십 년의 시간을 헤쳐 온 그의 그림들 어디에냐 표현과 색이 다를 뿐이지 굽이치는 우리의 산세가 읽혀진다. 
 
유영국의 'work'
 유영국의 "work"
ⓒ 유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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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제는 대표적 추상화가로 자리매김한 유영국이지만, 그의 그런 끈질긴 '화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팔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저렇게 혼신의 힘을 다하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라며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던 아내 김기순 여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팔리지 않는 작품임에도 매년 개인전을 꾸준히 해왔다는 성실한 작가의 일생이 수십년에 걸친 작품의 궤적에서 읽혀진다. 전철 역에서 내려 갤러리에 이르는 그 짧은 시간에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더웠던 7월의 오후가 나를 위한 뿌듯한 '선물'의 시간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s://5252-jh.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유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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