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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사자의 요청으로 익명처리하였습니다. [기자말]
조씨와 인터뷰 후 역 근처 식당에서 먹었던 밀면. 답답한 과거가 인터뷰로 인해 조금은 시원해지시길 바라본다.
 조씨와 인터뷰 후 역 근처 식당에서 먹었던 밀면. 답답한 과거가 인터뷰로 인해 조금은 시원해지시길 바라본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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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무개씨의 고향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으로 납북될 당시 살던 아야진보다 북쪽에 있다. 납북된 뒤 부산에 내려와 살고 있는 그는, 얼마 전 큰 개복수술을 받고 받고 재활 중이라고 했다. 재활 중인 몸으로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부산에서 만나기로 하고, 부산역 근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멀미가 심해 다른 승운호 선원에 비해 배를 늦게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승운호를 타기 시작한 것도 군에서 제대한 뒤였다고 한다. '딱 한 번' 승운호를 탔으나, 그 '한 번'의 승선으로 납북귀환어부가 되었다고 한다. 승운호를 타게 된 이유도 함께 승선했던 선원 중 자신과 처남 사이였던 선원도 있었기 때문에 배를 탔다고 했다. 조씨의 부친도 승운호 선주와 잘 아는 사이라고 했다.

납북되었다가 1972년 돌아온 후로 잠시 배를 탔지만, 1978년 목포에서 큰 풍파를 만나 배가 전복될 뻔한 경험을 한 뒤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부산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부산에 살고 있는 처남의 소개로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중 자신이 탔던 남진호라는 배가 다시 납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아찔했다고 한다.

고문 후유증인지 심장혈관에 문제가 생겨 큰 수술을 한 그는 여전히 숨 쉬는 것과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다고 했다. 온전하지 못한 몸과 건강 때문인지 몰라도 하루하루 진실규명을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하다고 한다.

다행히 최근 재심을 신청했던 춘천지방법원에서 재심 개시가 결정되어 그의 초조함이 조금은 덜 해졌다고 한다. 조씨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귀환했던 30여 명의 선원이 11월 7일 일괄 재심이 개시된 것이다. 막막했던 진실규명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순간이다.
 
지난 7일 춘천지방법원에서 재심을 개시한다는 결정문이 도착했다.
 지난 7일 춘천지방법원에서 재심을 개시한다는 결정문이 도착했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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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어부들이 납북되어 억류

승운호는 조씨가 처음 탄 오징어 배였다. 사실 그가 그날 그 배를 타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원래 멀리 오징어잡이를 하러 나갈 때는 배에 얼음을 실어야 해서 속초를 들러 얼음을 싣고 바다로 나가요. 그런데 내가 밥을 늦게 먹는 바람에 그날 아야진에서 승운호를 놓쳤어요. 배를 놓치면 안 가면 그만이었을 텐데 내가 또 버스를 타고 속초까지 가서 그 승운호를 탔지 뭐예요. 그날 그 배를 안 탔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걸 타겠다고 버스를 타고 갔으니."

울릉도까지 나아가는 시간은 열 시간도 넘게 걸렸고, 멀미가 심했던 조씨는 운항하는 내내 심한 멀미를 했다고 한다. 변덕스런 날씨 탓에 배는 더 요동치고 있었다. 첫날 밤 작업을 하던 조씨는 선실에 있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태풍주의보 방송을 들었다고 한다. 승운호의 조업 장소가 '대화퇴'라는 곳이었는데 잔잔하던 바다는 곧 성난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서둘러 조업을 끝낸 선장은 곧바로 아야진으로의 귀항을 서둘렀다.
 
"아야진으로 돌아올 때 안개가 끼고 비바람이 몰아쳐서 앞이 잘 안 보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파도에 바다로 떨어질 염려가 있어서 선원실로 들어가게 하고, 나하고 선장하고 둘이서 선실에서 서로 밧줄로 묶은 뒤 운전할 정도로 날씨가 나빴어요. 선실이라봐야 지붕 하나 있고 사방이 뚫려있는 있는 곳이었어요.

그렇게 어렵게 운전하면서 가는데 비바람으로 뿌연 바다에서 뭔가 시커먼 물체가 나타나더라고. 그러더니 큰 배 하나에 작은 보트 같은 배 세척인가 나타나더라고요. 비바람이 몰아치니 그 큰 배가 더 크게 보이더라고. 느낌이 안 좋아서 도민증부터 물속에 다 집어넣었어요. 곧바로 북한군이 총 들고 배 세웠고, 승운호로 북한군이 올라오더니 따발총 들고 선원들 다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큰 배에서 줄을 던져서 승운호에 걸고는 그대로 끌고 북한으로 들어갔어요.

납북될 당시에 주변에 다른 배는 없었어요. 납북된 장소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이었어요. 산도 안 보이고 비바람 몰아치니까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지. 잡힌 곳이 남쪽 바다인지 북쪽 바다인지 모르지. 그때 승운호에는 나침반 하나만 있었지. 그때만 해도 우리 앞에 나타난 배가 북한 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나중에 따발총을 보니까 북한 군인들이라고 알았지. 그렇게 세 시간 이상 끌려간 거 같아요. 뭐 겁이 나니까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고요."

어딘지 모를 작은 항구에 도착한 일행에게 북한 사람들이 저녁밥을 내어줬다. 그러나 겁을 잔뜩 집어먹은 선원들은 누구 하나 선뜻 밥을 먹을 생각을 못 했다고 한다. 심지어 숙소에서 조차도 도청장치가 있을까봐 걱정이 되어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밤새 긴장한 탓에 한숨도 자지 못한 선원들은 다음 날 아침 대형 버스로 이동할 때 긴장이 풀린 탓에 잠깐씩 졸기도 했다. 눈을 떠보니 도착한 곳은 평양 근처였다고 한다. 네모반듯한 집들이 늘어서 있던 그곳은 노동자 휴양소라는 곳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체조를 시켰다고 한다. 체조를 하기 위해 운동장에 모인 한국 선원들을 보니 대략 200여 명은 되어 보였다. 많은 남한 어부들이 납북되어 억류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김일성이도 봤어요. 어느 날 우리가 억류되어 있을 때 무슨 축구 대회가 있어서 그 경기를 관람하러 간 적이 있어요. 축구장에 가서 경기를 보는데 저 멀리 높은 곳에  김일성이 있다고 알려주더라고. 한눈에 김일성인지 알아보겠더라고. 그리고 옥류관이라고 북한 최고라는 냉면도 먹고, 또 흥남비료공장, 김일성 생가에도 가고, 해주도 한 번 가고, 농촌이 잘 산다고 상다리 부러지게 밥을 먹으러 간 적도 있어요.

어촌에도 한 번 갔는데 거기서 술에 취해서 대한민국이 좋다고 항변했다가 거기 사람들한테 맞아 죽을 뻔 했어요. 그날 후로 반성문 쓰라고 해서 반성문을 여러 번 썼어요. 자기들 말로 자아비판이라는 걸 하라고 해서 자아비판도 여러 번 하면서 정신적인 고통을 많이 받았어요. 그 뒤로는 술을 줘도 겁이 나서 못 먹겠더라고요."

"고문이 심했어요"
 
1972년 당시 여인숙을 운영했던 여인숙 주인이 당시 수사기관의 고문 수사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72년 당시 여인숙을 운영했던 여인숙 주인이 당시 수사기관의 고문 수사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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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의 귀환은 느닷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버스에 태우더니 버스 안에서 남한으로 보내준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원산에 도착해 보니 승운호가 그곳으로 옮겨져 있었고, 도색과 수리가 모두 끝나 있어 새 배처럼 좋아졌다고 한다. 입고 간 옷도 세탁을 마치고, 옷마다 이름표를 착착 붙여놓고 정리해서 주었다고 한다. 그래도 한국으로 나올 때는 북한 사람들이 준 옷을 다 벗어서 바다에 버리고, 원래 입고 갔던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고 한다.

속초항에 들어오자마자 아무도 접촉하지 못한 채 곧바로 속초시청으로 끌려갔고, 그곳에 머물면서 건너편 여인숙을 오가며 조사를 받았다.
 
"조사받은 여인숙이 내 친구 형이 하는 여인숙이었어요. 여인숙 이름이 동해여인숙이었는가 해동여인숙인가 그랬어요. 그 여인숙 운영하던 친구의 동생이 아직 아야진에 살아요. 나이가 아마 70세 가까이 될 거예요." 

조사는 잡혀온 다음 날부터 받았다. 첫날은 중앙정보부 직원으로부터 '자신은 고문하는 사람이 아니며, 겁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며 점잖은 말투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셋째 날부터였다.
 
"조사실에 들어가니 군복으로 옷을 갈아입게 해요. 고문할 때는 삼각형으로 되어 있는 참나무 장작을 오금에다 끼우고 앉게 하고 허벅지를 밟더라고. 그리고 물고문도 해요. 방안에 욕조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기에 물을 채워놓고 내 머리채를 잡고 둘이서 물에 머리를 쳐 넣더라고. 숨이 금방 넘어갈 거 같아서 이야기한다고 하면 세워주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세워주면 북한에서 들은 이야기를 다 했는데 수사관들은 '그것 말고 지령받은 걸 대라'고 하면서 또 때리는 거예요. 주먹으로 때리면 입안이 다 터져 피가 막 나오지. 밖에 나와서 침을 뱉으면 침이 아니라 핏덩이가 막 나와요. 그리고 또 말 안 한다고 주전자에 고춧가루를 타서 콧구멍이고 입이고 막 집어넣더라고. 코가 막 매워 가지고. 그 고통은 말로 표현을 못 하겠더라고요.

내가 영화에서 고문을 당하는 걸 봤는데 정작 내가 당하니 정말 무섭더라고요. 정신을 잃은 적은 없는데 거의 실신 정도까지 가더라고요. 주전자로 고문할 때는 눕혀 놓고 그렇게 고문을 하더라고요. 세 사람이 고문을 하는데 한 사람은 조서 쓰고 두 사람은 막 고문하는 거라. 아무리 힘이 좋아도 두 사람이 잡고 고문하니 꼼짝을 못 해요. 손발을 묶지는 않았는데  욕조에 얼굴을 처박을 때는 꼼짝도 못 하겠더라고요.

조사받고 시청 숙소로 이동할 때 아내를 본 적이 있는데 아내가 왜 이렇게 옷이 젖었냐고 물어보는데 경찰이 옆에 있어서 고문받았다고 말을 할 수 없잖아요. 그냥 눈물만 찔끔 흘리는 거지. 아내는 애를 업고 길에서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내가 납북될 때 임신했었는데 납북되는 동안 출산을 했더라고요. 그 아이를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서 있었던 거예요. 그 정도로 고문이 심했어요."

우리 시대의 국가폭력 피해

재판을 통해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출소한 그는 그 뒤로도 납북귀환어부를 감시하는 공안당국의 행태로 인해 여러 가지 피해를 받았다고 했다. 출소 후 '남진호'라는 배를 타고 목포 근해에서 조기잡이를 할 때가 있었다.

조기를 잡아 목포항으로 입항해 지정해 놓은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한번은 식당 주인이 찾아와 항의를 했다고 한다. 자신 때문에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며 무슨 일을 저지른 사람이냐고 묻더란 것이다. 결국 그는 납북귀환되었던 과거를 말해야 했고, 그 뒤로 목포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감시를 받는 것이 싫어서 그는 부산의 '○○제강'이라는 회사에 입사했다. 그 회사의 정비실장이 고향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소개로 입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산남부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회사로 찾아왔고, 이상하게 여긴 회사 총무과장이 자초지종을 캐물었다고 한다. 심지어 동네 반장도 찾아와 수상한 사람들이 집주변을 찾아와 맴돈다며 무슨 일이냐고 캐묻기도 했다고 한다.
 
"내가 몸이 아파서 회사에 못 나간다든가 어디 경조사가 있어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정보과에 이유를 알려줘야 해요. 그리고 한 번씩 부산시경에서 납북되었던 사람들을 모아서 안보교육을 시켜요. 그런 모임을 몇 번이나 했어요."

조씨는 월남전쟁에 참전한 국가유공자이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바닷가에 나갔다가 납북된 것이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되었다. 한편에서는 국가유공자이지만, 한 편으로는 반국가단체구성원의 혐의를 가진 사람. 그것이 납북귀환어부 조씨다.
 
"내가 살기 위해서 바다 나갔다가 잡혀간 건데 억울하죠. 결국 1990년도에 중도 유공자로 인정이 되기는 했어요. 그러다가 2002년도에 심장병이 발병했어요. 그래서 도움을 받으려고 유공자 신청을 했어요. 그래서 결국 유공자 인정을 받았어요. 한 가지 걱정은 내가 죽으면 대전 현충원으로 가야 하는데 금고형 이상을 받으면 못 간다고 하더라고요. 이것 때문에 신경이 쓰여요. 이 심장병 온 것도 고문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 것이 억울한 것이죠."
   
그는 월남참전 용사지만 납북귀환어부라는 딱지 앞에서는 무기력한 전과자일 뿐이었다. 다행히 1990년 그가 월남참전으로 인한 공훈이 인정되었다. 그는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전과로 인해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고 한다. 그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으려 하는 것 역시 현충원에 온전히 묻히기 위함이라고 했다.

생전의 고통에 이어 사후의 명예에 대한 걱정을 보며 우리 시대의 국가폭력피해는 공동체와 세대를 넘어 사후의 명예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임을 알게 한다.

태그:#평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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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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