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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넷이 모여 수업을 받는다. 하루 전 덧셈에 이어 이날 뺄셈을 처음 공부하는 중. 더하기 빼기 중 어느 게 더 좋으냐는 교사의 질문에 의견이 갈린다. 셋은 더하기, 한명은 빼기를 꼽았다. 살림이나 재산이 느는 게 좋아 더하기를, 살을 빼고 빚을 줄이는 게 좋다며 빼기를 택한 것이다.

위 대화는 경기 양평에 있는 양동초교 고송분교 1학년 학생들의 수업시간 대화다. 수업내용을 교사가 기록해 둔 것이다. 여덟 살 아이들의 대화라기에는 일견 너무 세속적일 수도 있겠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여든이 넘은 네 명의 할머니 학생들 이야기다. 이제 2학년이 된 이 '학생'들은 지난 21일 기자가 방문했을 때, 교실에서 풍물을 치고 있었다.

애초 이 학교는 2백명이 넘는 학생들로 붐볐다. 당시에는 고송초등학교였다. 학생들이 하나 둘 줄며 교육청으로부터 분교 처분을 받았다. 이젠 전교생이 14명, 교사는 5명이다(담임 3명, 특수·교과전담 2명). 학생이 더 줄면 폐교 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 작은학교라도 어떻게든 지키내려는 교사들의 노력 끝에, 본교의 허가를 받아 8세 아동들이 아닌 노인 학생을 네 명 받아들인 것이다.

2백명 학생 14명 돼며 분교 처분... 늦깍이 학생들의 '학습열' 보세요
 
고송분교 어린이와 할머니 학생들이 자신들이 학교에서 기르는 누에를 살피고 있다.
 고송분교 어린이와 할머니 학생들이 자신들이 학교에서 기르는 누에를 살피고 있다.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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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평 양동초교 고송분교는 교사가 셋이니 1명이 두 학년을 담당한다. 자연스럽게 6개 학년이 3개 학년으로 통합돼 운영되는 셈이다. 예체능과 체험학습 등은 전 학년이 함께할 때가 많다. 할머니 4명과 어린이 10명 학생들은, 서로 분리됐다 뒤섞이기를 반복하며 공부에 열심이다.

이 곳에서는 특히 체험학습이 다양하게 이뤄지는데, 교사나 학생 누구든 제안하고 사람이 모이면 시행한다. 그 중 하나가 닭 기르기였다. 이 곳의 홍명희 교사(44)가 닭 네 마리를 작년에 분양해 온 뒤 벌써 9마리로 늘어났다. 양계장은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만들었다. 일과 시간에는 학교 안에 풀어놓고 저녁이면 안전한 닭장에서 재운 뒤, 달걀은 학부모 등 지역사회에 판매한다.  

누에를 키우는 것도 한 할머니 학생이 제안해서 이뤄졌다. 누에 기르는 부업을 하는 '뚱뚱'이라는 별명의 할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학생 한명이 학교에서 누에 백여 마리를 기르고 있고, 교사 한명도 집에서 따로 기른다. 아이들은 애벌레를 손등에 올려놓고 '예쁘다', '귀엽다'고 연발한다.

분교장이자 5~6학년 담임인 이문식 교사(45)가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풀을 뽑다 기자를 반긴다. 나무 그늘로 안내하며 이마의 땀을 닦고는 겸연쩍게 웃었다. 학생들이 적다보니 운동장에 풀이 잘 자란다며, 예초기 사용권고를 마다하고 자신이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뽑는다고 했다.

"두 학년을 함께 공부시키다보니 학력이 떨어질 순 있지만, 리더십을 키우는 등 인성교육에는 유리하죠. 아이들이 몇 안 돼 사회성에 대한 우려가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학생이 줄어들어 미래가 걱정이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죠. 휴·폐교 걱정에 입학령 아이들 뿐 아니라 출산 소식까지 예사로 흘리지 않습니다. 내년 4명이 입학 대기 중(현재 유치원생)이고, 올해 3명 출산 소식을 접했답니다."

여든 벌 할머니 학생 넷의 '유쾌한 수다'

양평군 작은학교는 원래 정배와 고송 분교, 이렇게 둘이었다. 전원마을로 유명세를 띄며 서울서 아이들이 많이 내려온 정배는 다시 초등학교로 승격했다. 이제 하나 남은 분교 고송. 사람과 생명을 존중하며 세대간 소통을 잘하는 인성교육으로 교사와 학생 그리고 지역사회가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일등이나 부자, 또는 최고가 아닌 사람들의 소박한 삶과 꿈을 실현할 교육. 대량 생산소비 대중사회에 치여 빛을 잃어가는 작은 것들. 지속가능한 사회를 떠받칠 소중한 인성을 길러줄 작은학교. 파괴되고 멍들어가는 현대사회의 희망으로 에른스트 슈마허(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꼽은 것이다.

할머니 학생들의 한글수업에 잠시 참여해봤다. 여든을 넘겨 초등생으로 입학한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강동에서 독서실(2백석)을 운영하다 IMF 때 문 닫고 고송리로 왔다는 '뚱뚱'(학교에서 부르는 별명)과 언니 '소나무'. 강원 산골에 살다 화전민 이주정책으로 내몰려 이곳으로 왔다는 '장미'. 홍천에 살다 전쟁 때 피난(금전구뎅이, 금광에 숨어 지냄) 왔다는 '황소'. 이들은 홍석종 교사(52세, 1~2학년 담임)와 이장의 권유로 작년 입학했다.
 
방과후교실에서 ‘깜깜한 밤’ 주제의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
 방과후교실에서 ‘깜깜한 밤’ 주제의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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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홍석종 교사는 "학생이 적어 분교 폐교 위기였는데, 학력이 없는 할머니들이 있다는 소릴 듣고서 동네 산책 중에 우연히 할머니들을 만나 즉석에서 권유해 성사됐다"며 "교사, 학생(아이), 그리고 할머니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어서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다들 잘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전 수업 내내 아이들을 데리고 닭장으로 밭으로 바쁘게 오가던 홍명희 교사(44)를 점심을 조금 넘겨서야 잠시 만날 수 있었다. 광명의 한 학교에 다니다 시민사회운동과 토종농업에 관심을 갖고 10년 전 전근해 왔다. '웬 시골이냐'는 부모의 핀잔과 반대를 무릅썼다. 생태환경이 좋아서,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보고 싶어서다.

"ㅅ초교로 발령 받았는데, 잘 사는 분들이 많은 학교였어요. 이것 저것 평균치를 따지는 게 싫어 작은학교를 찾아왔던 건데 저와는 잘 안 맞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로망인 분교로 자원했죠. 서로 품어주고 다름을 포용하는 따뜻한 학교, 정이 많이 들었어요. 제가 치유 받고 있을 정도죠."

방과후교실도 보고 싶었지만 교육을 방해하는 것 같아 담당 교사를 통해 내용만 전해 들었다. 김태현(6학년)이 책상정리를 하고, 신혜인(2학년)이 '캄캄한 밤'을 그리자고 제안해 미술수업이 진행됐단다. 덥다고 짜증을 내는 김건우(4학년)에게 혜인이가 다시한번 그림주제를 또박또박 설명해준다. 아웅다웅 하면서도 아이들은 서로의 차이를 이해해가며 별과 초승달, 그리고 반딧불이 등을 곱게 그렸다.

"자기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라"

학령이 다른 10명의 아이들과 4명의 할머니가 어우러져 교육을 받는 고송분교의 모습. 3명의 교사들이 작은학교를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곳.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 '아까운 시간이 지나가오. 오늘을 잡으시오(카르페 디엠). 내일의 희망은 접으시고'가 떠오른다.

카르페 디엠을 톰 슐만(시나리오 작가, 죽은 시인의 사회)은 이렇게 말했다.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 없다. 자기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부모와 사회의 강요로 닭장에 갇혀 공부만 해야 하는 사회를 조롱한 것이다. 미국에 거주할 때 둘러봤던 세인트앤드류학교(델라웨어, 죽은 시인의 사회 촬영)와 고송분교가 닮은 게 많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저널 게재 예정


태그:#양평양동초교, #고송분교, #작은학교, #방과후교실, #닭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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