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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1묘역(71)에는 해사교장 등을 역임하고 해군 중장으로 제대한 민영구의 묘가 있다.
▲ 해군중장 민영구의 묘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1묘역(71)에는 해사교장 등을 역임하고 해군 중장으로 제대한 민영구의 묘가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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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현충원 장군 제1묘역(71)에는 '해군중장 민영구의 묘'가 있다. 민영구(1909~1976)는 해군사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해군 소장으로 제대한 인물이다. 그런데 민영구가 일제강점기에는 한국광복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행히 묘비 앞면의 묘비명에 그가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기 조국 독립 투사이며 해군 창설 및 발전에 일생을 바친 민영구 제독이 영면하고 계시다. 상해 임시정부 경리국장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등을 지내시고…"

해군중장 민영구는 독립운동가 민제호(1890~1932)의 장남이다. 그는 1919년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로 망명해 만국항해학교를 졸업한 후 선장으로 지내다 한국광복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경리와 재무 일을 맡아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해군중장 민영구의 묘' 뒷면... '배위 이국영 합장'
  
해군중장 민영구의 묘 묘비 뒷면에는 '배위 이국영 합장'이라고 새겨 있어 민영구의 부인 이국영이 합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 배위 이국영 합장 해군중장 민영구의 묘 묘비 뒷면에는 "배위 이국영 합장"이라고 새겨 있어 민영구의 부인 이국영이 합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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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자가 이 기사에서 주목하는 이는 해군중장이자 독립운동가 민영구가 아니다. '해군중장 민영구의 묘' 묘비 뒷면에 작은 글씨로 '배위 이국영 합장'이라고 새겨져 있는 글귀의 주인공 이국영이다.

이국영(1921~1956)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던 한국독립당의 당원이자 1941년에 결성된 한국혁명여성동맹의 대의원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다. 임시정부요인을 비롯한 한인(韓人) 자제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1941년 충칭에서 결성된 3.1유치원에서는 정정화·연미당 등과 함께 교사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뒷받침했다.

이국영은 해방과 함께 곧바로 귀국하지 못했다. 남편 민영구가 해방 직후 주화대표단 총무처장을 맡아 임시정부가 환국한 뒤에도 중국정부와의 연락업무와 교포 송환문제 등을 처리하는 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국영은 1947년 11월 남편 민영구와 함께 귀국한다.

이국영은 1956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는데,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은 해군 소장으로 제대한 남편 민영구가 사망한 1976년이었다. 이때 이국영의 유해는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되는 민영구의 '배위' 자격으로 합장됐다. 뒷면에 '배위 이국영 합장'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사정이다. 따라서 '해군중장 민영구의 묘'를 찾은 사람들이 민영구의 부인 이국영이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알 길은 전혀 없다.  

남편 민영구가 1963년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음에도 독립유공자 묘역이 아닌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된 탓에, 여성 독립운동가 이국영의 존재는 유족 외에는 더더욱 알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은 이국영이 1990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후속조치가 있은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지난 2021년 3월 독립유공자 묘역과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남편의 '배위'로 합장되어 있던 이은숙·양방매 등 10여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순국선열 또는 애국지사 OOO으로 묘비에 다시 새겨질 때에도, 여성 독립운동가 이국영은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국방부가 관리하는 서울현충원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이국영의 기록조차 없었고, 묘비 교체를 처음 제안한 기자도 당시엔 이국영의 존재 자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던 탓이다.

"이광씨(독립유공자, 전 충북지사) 상배(喪配)"
 
여성 독립운동가 이국영의 어머니 김수현의 서거 사실을 알리는 '부음'란에 당시 언론은 이미 19년 전에 서거한 '이광의 부인상'이라고 하여 당사자인 여성 독립운동가 김수현의 이름을 직접 알리지 않았다.
▲ 이국영의 어머니 김수현의 서거 사실을 알리는 "부음" 여성 독립운동가 이국영의 어머니 김수현의 서거 사실을 알리는 "부음"란에 당시 언론은 이미 19년 전에 서거한 "이광의 부인상"이라고 하여 당사자인 여성 독립운동가 김수현의 이름을 직접 알리지 않았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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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독립운동가 이국영의 부모인 이광-김수현도 부부 독립운동가였다.

아버지 이광(1879-1966)은 일찍이 신민회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활약했는가 하면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 중 한 명이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지낸 저명한 독립운동가였다. 이광은 해방과 함께 귀국한 이후에도 충북도지사와 체신부장관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어머니 김수현(1898~1985)은 남편 이광과 더불어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한 두 아들 윤장(1923~2018)과 윤철(1925~2017)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도, 1940년 6월 정정화·김병인·이헌경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 산하조직으로 설립된 한국혁명여성동맹에 함께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에도 직접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김수현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은 남편(1963년)과 두 아들(1977), 딸 이국영(1990)보다도 한참 늦은 2017년이었다.

어머니 김수현은 1985년 상도동에서 서거하는데, 당시 언론은 고인의 사망 소식을 알리면서 "이광씨(독립유공자, 전 충북지사) 상배(喪配)"라고 고인의 이름도 없는 부음 소식을 전한다. 부음에 등장하는 이광은 1966년에 이미 서거한 상황이었지만, 그 후 19년이 지난 부인 김수현의 서거 당시에도 주인공이 돼 '이광씨의 부인상'을 알리고 있었다. 이국영의 어머니 김수현은, 본인상임에도 '김수현'이라는 이름조차 직접 알리지 못했던 것이다.

'독립유공자 이국영의 묘' 새긴 묘비로 교체해야
 
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던 부부독립운동가의 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배위 ooo 합장'이라고 옆에 새겨 넣는 것으로 하여 남성 독립운동가 중심으로 묘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2021년 3월에 남편은 물론 부인도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새롭게 교체되었다.
▲ 순국선열 이회영-애국지사 이은숙의 묘 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던 부부독립운동가의 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배위 ooo 합장"이라고 옆에 새겨 넣는 것으로 하여 남성 독립운동가 중심으로 묘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2021년 3월에 남편은 물론 부인도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새롭게 교체되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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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묘역은 원래 한국군의 장군을 지낸 인물이 안장되는 곳이다. 장군의 부인은 '배위'로 '합장'될 수 있을 뿐이다. 형식 논리로 따진다면 '해군소장 민영구의 묘'에 '배위 이국영 합장'이 문제될 게 없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합장된 이국영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여성 독립운동가라면 경우가 다르다. 서울현충원에 있는 장군 묘역도 국립묘지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군소장 민영구의 묘'라고 새겨져 있는 묘비를, 늦었지만 이제라도 '해군소장 민영구'와 '애국지사 이국영'이 함께 안장돼 있는 묘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는 묘비로 교체해야 한다고 본다.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면서도 독립유공자 묘역이 아니라 장군 제1묘역에 안장돼 있는 분은 서울현충원에서 민영구 말고도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최용덕을 비롯해 고시복, 장흥, 전성호 장군 등 네 분이 더 있다. 이참에 이들 다섯 분의 묘에 세워진 묘비를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애국지사'이자 해방 후 한국군의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알 수 있도록 교체해, 이곳을 찾는 이들이 바로 알 수 있게 하는 게 어떨까. 이런 조치도 서울현충원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번 기사는 그동안 현충원 탐방 기사를 연재한 결과를 모아 책으로 낸 <현충원 역사산책>(2022)에도 미처 싣지 못한 내용입니다.


태그:#서울현충원, #이국영, #민영구, #여성독립운동가,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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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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