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때문에 힘들었던 피해자...
그 때 그 남자를 만나다

[교제살인 두 번째 이야기 - 사람이 죽었다⑤]
사고 전, 황예진은 자신을 '물 빠진 노란색'이라 표현했다
법정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투는 공간이다. 피해자가 사망하면 가해자만 그 공간에 선다. 그렇게 나오는 판결문이 사건의 전모를 다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다. 이런 상황은 목격자가 없는 경우가 대다수인 교제살인 사건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CCTV 증거 화면이 있어도 피해자는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왜'가 남는다. 고 황예진씨 사건에서 그 질문을 놓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사건번호 2021고합○○○ 상해치사, 사람이 죽었다. [편집자말]

고 황예진씨의 '2020년 소원' 고 황예진씨가 2019년 연말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찍은 '2020년 소원' 영상. 그는 영상에서 취업 성공과 함께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도 함께 드러냈다. ⓒ 고 황예진씨 친구 제공

"나 머리카락 심어야 하는 거 아냐? 너무 빠진 거 같아."

"별로 티 안나"라고 했는데도 황예진씨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물었다고 했다. 정수리가 비어 보인다고 걱정을 했다고 한다. 황씨가 취업 스트레스를 겪고 있을 당시 대학친구들의 기억이다. 황씨 외사촌 언니가 봤던 황씨의 그때 모습 역시 비슷했다.

"예진이가 살이 더 빠진 느낌인 거예요. '너 왜 갈수록 말라...' 그랬죠. 머리숱도 좀 없어 보여서 '왜 그래?' 물어봤는데, '어 그래?' 하면서 넘어갔어요."

그는 외동딸로서 책임감이 남달랐던 사람이었다. 황예진씨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 A씨는 이렇게 말했다.

"예진이가 '부모님 짐을 좀 덜어주고 싶다' 이런 말을 많이 했어요. 엄마·아빠·할머니한테 이것도 해주고 싶고 저것도 해주고 싶은데 그러려면 일단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고요. '나 혼자니까, 내가 빨리 자리 잡아야 한다, 부모님한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다'고 했었어요.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는 높은데 현실의 벽에 부딪히니까... 취업이 능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따라야 하는 거잖아요. 정말 착실하게 준비했거든요. 대외 활동하고, 인턴하고, 봉사활동 참가하고, 스터디 모임하고, 주말마다 공부하고. '그렇게 뼈빠지게 노력하니 넌 뭐라도 될 거야' 그랬던 친구였어요."


고 황예진씨가 2021년 그의 "마지막 어버이날"에 어머니에게 선물과 함께 보낸 글. 어려서부터 그는 외동딸로서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 한승호

황씨는 가슴팍에 은행원 명찰을 달고 싶어했다. 대학교 졸업을 유예하고 2019년부터 취업 준비에 몰두했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코로나 때문에 은행권이 지점도 많이 줄이고, 사람을 많이 안 뽑는 추세였어요. 은행 취업문이 갈수록 좁아지다보니 예진이는 개발자로 진로를 바꿨어요. 예진이가 잘 모르던 개발, 코딩 분야를 공부하려니 또 힘들었죠. 공부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니 취업이 안 될 거 같다는 불안감도 커졌고요." (대학 친구 B씨)

그 때 그 남자를 만났다

그때 그 남자를 만났다. 2021년 7월 25일 새벽, 황씨를 때려 정신을 잃게 한 남자, 그로부터 23일 만에 황씨를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한 전 남자친구 이아무개씨(32세)다.

두 사람은 2019년 5월 은행 인턴 동기로 처음 만났다. 인턴 동기들 사이에서 이씨가 황씨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했다고 한다. 황씨 어머니는 당시 인턴 동기의 말을 빌려 "이씨는 예진이가 모임에 나오면 나오고, 예진이가 못 온다고 하면 빠졌다고 하더라"라고 전했다. 교제를 시작하려고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이씨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2020년 12월 22일부터 연인 사이가 됐다고 한다.

"예진이가 처음에는 그 사람하고 사귀는 걸 몇 차례 거절한 걸로 알고 있어요. 둘 다 아직 취업 전이다 보니까 '연애 할 때가 아닌 거 같다' 그런 이유로요. 그 남자가 계속 만나자고 했다더라고요. 취업 준비하고 힘드니까 기댈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주변에 친구들은 하나 둘씩 취업 하니까, 아무리 가까운 친구들이었어도 완전히 솔직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 거예요. 저만 해도 남자친구한테 제일 많이 얘기하거든요.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하던 시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만나기 시작한 게 아닐까... 저희는 그렇게 추측하죠." (대학친구 C씨)

취업에 성공했다, 그러나...

고 황예진씨의 명함을 어머니가 꺼내 보여주고 있다. 명함 지갑은 2021년 어버이날 고인이 어머니에게 드린 선물이다. ⓒ 한승호

2021년 봄, 황씨는 드디어 취업에 성공했다. 수습 기간 3개월 후 정규직 전환 여부가 결정되는 조건이었다.

그 일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야구장에 가서 '두산 베어스'를 응원하며 고등학생 시절 내내 꿈꿨던 스포츠 마케터 일이 아니었다. 대학생이 된 후 그토록 바랐던 은행권도 아니었다. 취업 장벽을 실감한 황씨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길을 택했다. 그의 친구 A씨는 "취업만 하면 끝일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다고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예진이가 계속 준비해온 분야가 아니고 하니까, '내가 이 일을 잘하고 있는 건가, 혹시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는 건 아닐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힘들다'고요."

힘들었지만 노력했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11시 회사를 나서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일요일은 월요일 업무를 대비하는 시간이었다. 황씨 어머니는 그 당시 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고 전한다. 취업 즈음 서울 마포구 오피스텔을 따로 얻어 독립해 나간 딸은 주말에도 본가에 오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저녁에 전화하면 야근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끝나서 집에 가고 있다고도 했었고요. 프로그램 개발이라는 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해서 딱 끝나는 일이 아니라서 좀 어렵다고 했어요. '엄마, 나는 이게 좀 어려운가봐' 그러더라고요. 주말에도 '이번 주엔 쉴게' 이러면서 안 왔어요. '엄마가 월요일 아침에 데려다 줄게' 그랬는데도 '그냥 쉴게' 이래서 그런가보다 했었죠 그 땐."

"수습 3개월 동안, 퇴근하고서도 매일 매일 공부했고 정규직 전환 심사를 준비하며 전환 자료도 만들어야 했어요. 투입된 프로젝트도 기간 안에 뭔가를 빨리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 본인만의 시간을 전혀 즐기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대학친구 B씨)

악화

경기도 양주 부모님 집, 고 황예진씨의 방 모습. ⓒ 한승호

가해자와의 관계 역시 그러했다. 황씨 친구들은 두 사람의 충돌이 잦았다고 전했다. 연애 초기, 이씨가 황씨 몰래 성인 동영상을 시청하는 문제로 삐꺽댔다고 했다. 그러던 두 사람의 관계는, 이씨가 다른 여성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넌 특별하다'고 한 사실을 황씨가 알게 되면서 덜컹거렸다.

또 황씨는 어느 날 멈춘 생리로 인해 불안에 떨어야 했다.

"빨리 임신 테스트기 해 보라고 제가 매일 매일 재촉했어요. 예진이는 혼자 확인하는 게 무서우니까 그 남자랑 같이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그 남자는 '어려운 것도 아닌데 빨리 해라, 그래야 해결하든가 하지 않냐'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크게 싸웠다고 들었어요." (대학친구 B씨)

두 사람의 관계는 소통 문제로 더 악화됐던 것으로 보인다. 싸움의 끝은 주로 이씨의 '이별 통보'였다고 한다. 이씨가 '헤어지자'고 통보하는 싸움이 한 달에 두 세 번 꼴로 반복됐고, 황씨의 번호를 차단하거나 이씨가 자신의 휴대폰을 끄고 소통을 거부하는 상황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반면 어머니에 따르면 황씨는 고등학교 진학 문제를 두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킬 정도로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해 확실히 밝히는 쪽이었다.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책을 내놓는 쪽이었다고 했다. B씨의 말도 그랬다.

"예진이는 친구가 뭔가 방향을 잃은 것 같으면 제3자 입장에서 객관화를 해서 답을 내놓을 정도로 항상 똑 부러지는 친구였어요. 그런데... 그런 예진이 모습은 알고 지낸 5년 만에 처음 봤어요. 말다툼 하다가 남자 친구가 '그냥 헤어질래'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통보해 버리니까, 예진이는 근무하다가 화장실 가서 울고 나오고 그랬어요."

그리고, 사건이 있었던 그 날 밤 두 사람은 다시 다퉜다. 2021년 7월 25일 새벽 2시 41분, 이씨는 "다투다가 황씨를 침대 위로 밀쳐 넘어뜨리고 오피스텔을 나왔다"고 진술했다. 이씨가 나가고 5분 뒤, 황씨가 뒤늦게 쫓아 나왔다. 그는 맨 발이었다. 그리고... 죽었다.

"나... 원래 샛노란 색깔이었는데..."

고 황예진씨 방에 있는 사진들. ⓒ 한승호

친구들에게는 물음표만 남았다.

"아니 예진이가 왜, 왜... 취업 준비로 힘들었고, 직장에서도 정규직 전환 되기 전까지 스트레스 많이 받았고, 그럴 때 남자랑 만났잖아요. 잘못된 관계라고 예진이 스스로도 느꼈을 거예요. 그런데도 본인이 지금 너무 힘드니까 관계를 못 끊어낸 게 아닐까요." (대학친구 C씨)

"원래 되게 당당한 애인데, 워낙 예쁘고 밝아서 다들 부러워하고 그랬던 예진이가 왜 이렇게 연애를 하지? 그랬어요... 예진이가 상대가 미워질 때까지, 완전히 정이 떨어질 때까지는 안 헤어지는 스타일이에요. 정을 잘 못 떼는 쪽이었죠." (대학친구 D씨)

"생소한 일로 바쁘고, 직장에 적응해야 하고, 처음 독립해서 서울에 혼자 살고 있고, 연애도 제대로 안 되고. 한꺼번에 몰아 닥치니까 옆에서 보면서 '예진이가 어떻게 버티고 있지' 싶었어요. 그러다 정규직 전환 되고 이제 숨 좀 돌리려는데 사고가 터진 거예요. 폭행이 있었던 그 날이 정식 직원으로 예진이가 첫 월급 받은 날이었어요. 본인이 그렇게 고생했던 거 하나도 누리지도 못하고 갔어요. 첫 '정규직 월급' 써보지도 못하고 갔어요. 저는 그게 가장 안타까워요." (대학친구 B씨)

B씨에게 황예진씨는 사고가 있기 전, 자신을 '물 빠진 노란색'이라고 표현했다고 했다.

"예진이가 그랬어요. '나는 원래 샛노란 색깔이었는데, 점점 탁해지는 거 같아. 갈수록 물 빠진 노란색이 되어 가는 느낌이야'..."

고 황예진씨 묘소.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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