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30 13:30최종 업데이트 22.05.3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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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지 벌써 몇 년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예측하는 학자들이 늘어나는 한편, 신 냉전, 신 사회계약(New social contract), 뉴 노멀(New normal), 신시대(New era), 그린 뉴딜,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등 새로움을 표현하는 언어가 우후죽순 등장했다.

전환의 가시적 계기는 코로나, 기후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축적된 불평등이 사회 전역에 걸쳐 갈등으로 표출되는 상태를 두고 유엔 사무총장은 2020년 7월 "자유 시장이 모두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는 거짓말" "인종주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환상" "우리 모두가 한 배에 타고 있다는 신화"가 깨졌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전환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나. 5월 말에 이 질문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23일 바이든의 IPEF(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26일 영국의 초과이득환수세(Windfall tax), 26일 시작된 중국 외무장관의 남태평양 국가 순회 방문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주요 원칙인, 낮은 세율을 통한 성장, 상품-자본-노동의 자유로운 이동,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서서히 뒤집고 있다.   

[영국] "정체성의 위기"

1990년 11월 말 대처 영국 총리의 마지막 '총리 질의 시간'(PMQs)은 신자유주의 경제가 대세임을 알리는 상징적 자리였다. 집권 11년간 상위 10%와 하위 10%의 계층 격차가 상당히 벌어졌다는 노동당의 지적에 푸른 정장을 입은 대처 총리는 "모든 계층에서 소득이 향상되었다"고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리고 "격차만 좁으면 다 같이 못살아도 좋다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계층 격차가 확대되더라도 하위층의 소득이 늘어나 생활이 향상된다면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날 완패한 노동당은 이후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토니 블레어의 '제 3의 길'을 택했다.

32년만인 2022년 5월 25일 '총리 질의 시간'엔 정반대의 모습이 나왔다. 토론 주제는 가스 및 석유 에너지 회사에 대한 초과이득환수세다. 노동당이 연초부터 주장한 안으로, 에너지 회사의 이익을 세금으로 환수해서 가스 및 난방 고지서를 낮춰 서민의 '생활비 위기(living cost crisis)'를 완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생활비 위기의 주원인은 가스 및 난방비 상승이다. 코로나 당시 노동력 부족으로 야기된 공급망 차질에서 시작되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에너지 가격이 상승한 것에 기인한다. 이로 인해 에너지 회사가 예기치 않게 얻은 이익은 천문학적이다. 2022년 첫 3개월간 BP는 49억 파운드(한화 약 8조), Shell은 72억 파운드(한화 약 11조)의 이익을 기록했다. 반대로 인상된 가격을 고스란히 부담한 일반 가구의 에너지 고지서는 1200파운드(약 190만 원)에서 2800파운드(약 440만 원)로 두 배 이상 오른 상태다.    
 

영국 런던에 있는 BP 주유소. 2022.5.3 ⓒ 연합뉴스

 
노동당 대표 키어 스타머는 존슨 총리에게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아니면 재무장관처럼 울타리에 걸터앉아 있는가?"라고 물었다. 5월 17일 노동당 에드 밀리밴드(Ed Miliband)와 벌인 하원 토론에서 완패한 재무장관 리시 수낙(Rishi Sunak)이 노동당 안을 고려하는 쪽으로 입장을 돌린 데 이어 마지막 관문인 총리를 압박하는 발언이었다.

존슨 총리는 "세금을 좋아하는 것은 노동당"이라며 현재 에너지 가격의 위기가 "부분적으로는 코로나, 부분적으로는 전쟁"에 있고 "러시아 제재는 다 같이 찬성"했기 때문에 단기간은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 같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코로나 봉쇄 기간 중 총리가 벌인 파티에 대한 감사 보고서가 공개되었고 예산을 집행하는 재무 장관은 세금을 줄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다 구설에 올랐기 때문이다.

"현재 노동자 계급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대중과의 괴리를 지적하는 스타머에게 존슨 총리는 "우리는 일자리를 믿는다, 우리는 투자를 믿는다. 우리는 성장을 믿는다"고 했다. 에너지 회사가 이익을 투자로 전환, 더 강한 경제를 창출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 경제론이다. 스타머는 "(취약 계층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며 시장 경제가 최소한 지켜야 할 윤리성으로 맞대응했다.

다음 날, 보수당은 노동당 안을 받아들였다. 초과이득환수세의 규모는 50억 파운드(약 한화 8조원)이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닌 실용주의적" 결단이라는 재무장관의 설명과 달리, 보수당 내부에서는 "정체성 위기"에 직면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기업에 대한 세율을 올리는 대신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세금을 낮춰 신자유주의 경제 기조를 견지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반면 노동당은 초과이득환수세 관철을 "정책 노선에서의 승리"로 평가했다. 노동당은 신자유주의를 대신할 공식적 개념을 내놓지는 않았다. 2010년대 초중반 당대표였던 에드 밀리밴드가 제시한 "윤리적 자본주의(Ethical capitalism)"와 가장 비슷하다.
  
[미국] 후퇴하는 자유 무역, 경제-안보 분리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점을 찍으며 색색으로 표시해야 인도-태평양 지역의 경제 관계 및 국제정치 감을 잡을 수 있는 때가 된 듯하다. 각종 회의체, 경제 협력 조약, 방위 안보 조약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자유 무역의 확대와 정치와 경제를 구분지어 접근하는 신자유주의가 적용된 결과다. 대서양쪽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논의가 슬슬 흘러나오는 지금, 인도-태평양쪽으로 시선이 옮겨가고 있다.  

5월 23일, 한국을 거쳐 일본에 간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과 같이 쿼드(Quad)를 구성하는 호주-인도-일본 지도자들과 함께 IPEF를 발표했다. 현재 참가 의사를 밝힌 국가는 쿼드 4개국, 한국,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뉴질랜드, 피지 등이다.  

IPEF는 시장을 개방하는 자유무역(free trade)이 아니다. 대신 유기적 관계 속에서 탄력적 경제 협력을 목표로 한다. 어느 한쪽에서 공급 부족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 협력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신 정치-경제를 분리시키는 신자유주의 특징은 그대로 고수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일본 도쿄 이즈미 가든 갤러리에서 열린 번영을 위한 인도-태평양 경제 체제(IPEF) 출범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2.5.23 ⓒ 연합뉴스

 
자유 무역에서 일보 후퇴한 IPEF가 미국의 인도-태평양 지역 경제적 영향력 확장에 기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IPEF는 중국이 참여하고 가입국이 절반가량 겹치는 3가지 지역 경제 조약과 경쟁해야 한다. ASEAN 10개국과 중국이 서명한 ASEAN-China 자유무역지대(2002), 한-일-중 포함 15개국이 서명한 RCEP(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2020) 자유 무역 조약이 있다. 또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했으나 트럼프 행정부가 2017년 탈퇴, 미국 없이 2018년에 발족한 CPTPP(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Transpacific Partnership)에 중국이 가입을 신청한 상태다.

IPEF와 경쟁할 기존 조약 내에서 중국 견제의 중심축은 호주와 일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가 안보-경제 영역이 비공식적으로 중첩되는 지점이다. 미국은 프랑스와의 외교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영국을 끌어들여 호주에 핵추진 잠수함을 약속할 정도로 공을 쏟았다. (관련기사-전 세계 뒤흔든 기습발표, 미국의 노림수는?, http://omn.kr/1v9nq) 일본은 지난 2월 미국으로부터 군사력 확대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IPEF 발표 직후 호주는 외무장관을 피지로 보냈고 피지는 27일 IPEF 가입을 결정했다. 중국 외무장관 왕이가 피지를 포함해 태평양 8개국 순방을 시작한 다음 날이었다.    

[중국] 자유무역 유지, 안보 경제 융합형  

중국은 생각보다 훨씬 남쪽으로 내려갔다. 중국 왕이 외무장관은 5월 26일부터 6월 4일, 열흘간 남서태평양 8개국을 순방하고 있다. 솔로몬아일랜드, 키리바시(Kiribati,) 사모아(Samoa), 통가(Tonga), 바누아투(Vanuatu), 파푸아뉴기니, 동티모르(Timor Leste), 피지. 8개국의 정확한 위치를 표시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지역이다.

중국은 안보와 경제를 같은 테이블에 올리고 있다. 구체적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28일 중국과의 협정에 서명한 사모아 정부 발표에 따르면, "기후 변화, 팬데믹 극복, 평화, 안보" 등 네 영역에 걸쳐 있다.
 

남태평양 도서국 솔로몬제도를 방문한 왕이(왼쪽) 중국 외교부장이 26일(현지시간) 수도 호니아라에서 제러마이아 마넬레 솔로몬제도 외교·대외무역장관과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왕 부장은 남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인 솔로몬제도 방문을 시작으로 남태평양 8개 도서국 순방 일정에 돌입했다. 왕 부장의 이번 순방은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을 뚫고 남태평양 진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2022.05.26 ⓒ 연합뉴스

 
안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구체적인 내용은 비공개다.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4월초 외부로 유출된 중국-솔로몬아이랜드 간 협정 초안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중국은 경찰과 군 요원을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파견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 군함에 병참 물자 보급이 필요할 경우 항구도 사용할 수 있다. 대신 중국은 경제 투자를 약속했다. 양국은 참치 등 원양업을 같이 육성하고, 인터넷 등 인프라 발전을 위한 경제 지원, 인도적 구제 자금, 그리고 자유무역지대로의 전환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5월 말 영국, 미국, 중국은 각자 전환의 방향을 조금씩 드러냈다. 셋 모두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떠받치던 핵심 원리, 즉 시장을 보조하는 작은 정부, 자유 무역, 경제와 안보의 분리 원칙이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의 윤석열 정부와 민주당, 양쪽 모두 전환기 전략을 드러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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