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어떤 시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앨버트 화이트의 격언이다. 권력이 잠시 진실 위에 군림할 수는 있지만 결국 진실은 영원히 살아남는 역사가 되어 언젠가 그 권력을 심판한다.
 
5월 10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1970년대 아시아판 홀로코스트로 불리우는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사건을 조명했다. 동남아시아 전문가인 박장식 동아대학교 글로벌 비즈니스학과 교수가 강연자로 나서서, 최악의 민간인 학살로 꼽히는 킬링필드의 비극적인 진실과 독재자 폴 포트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국토 중앙에 메콩강이 흐르는 '물의 나라' 캄보디아는 쌀생산국 13위의 농업국가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앙코르와트-휴양지 시아누크빌 등을 보유하고 있는 동남아의 신흥 관광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름답고 풍요로운 겉모습과 달리 캄보디아는 비극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수난의 땅이기도 하다.

킬링필드, 또다른 비극의 서막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캄보디아는 9세기 크메르 제국 시절 동남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15세기 전후로 외세의 거듭된 침략으로 수난을 겪었다. 19세기 제국주의 열강 시대에는 베트남-라오스와 함께 동남아로 진출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제2차대전 이후 제국주의가 쇠락하면서 강대국들의 식민지가 독립하기 시작했고 캄보디아도 1953년 11월 약 90년 만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다.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1922-2012)는 독립 이후 입헌군주국 체제에서 아버지 노로돔 수라마리트에게 왕위를 넘기고 정치가로 변신하여 직접 정당을 만들고 총리로 당선되어 캄보디아의 실질적 통치자가 된다. 시아누크는 각종 부정선거로 권력을 잡고 반대파와 언론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독재자가 됐다.
 
이 무렵 이웃나라에서 베트남 전쟁이 발생한다. 시아누크는 베트남 공산당과 비밀 협악을 맺고 호찌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는 미국과의 갈등을 불러온다. 리처드 닉슨 정권은 캄보디아의 물자 지원로인 '호찌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하여 캄보디아에 대규모의 공습 폭격을 수년간 단행했다. 또한 캄보디아의 군사령관 론 놀을 후원하여 쿠데타로 시아누크 정권을 간접적으로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 당시 론 놀의 친미 정권에 대항하여 등장한 새로운 세력이 바로 폴 포트였다. 캄보디아 극단적인 공산주의 단체의 지도자였던 폴 포트는 훗날 킬링필드를 주도한 동남아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로 꼽힌다. 당시 폴 포트에 대한 만평을 보면 역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겸 학살로 꼽히는 독일의 히틀러-소련의 스탈린과 나란히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캄보디아인 위살봇은 "폴 포트라는 인물은 캄보디아에서는 '악마 그 이상의 악마'로 통한다"고 설명하며 그 악명을 짐작케했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 상류층의 후손으로 태어나 당시로는 드물게 서구식 교육까지 받은 엘리트 지식인 출신이었다. 1949년 국비 장학생으로 프랑스 유학 시절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한 폴 포트는 마오쩌둥에 스탈린을 본받아 조국 캄보디아를 공산화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부유층인 폴 포트가 어떻게 평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에 빠지게 되었을까. 당시 민주주의 유럽국가들의 식민지배를 체험한 폴 포트같은 유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극심한 빈부격차나 자본주의의 횡포보다 평등과 분배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사상이 더 유토피아처럼 느껴졌던 것.
 
1953년 캄보디아로 귀국한 폴 포트는 1960년대 공산당내 무장 게릴라 조직 크메르루주를 결성한다. 1970년대 폴 포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시아누크가 망명해있던 중국 공산당 측에서 크메르루주와의 연합을 제의한 것. 독재자였지만 왕정의 뿌리가 깊었던 캄보디아에서 여전히 적지않은 지지와 존경을 받던 시아누크의 지원은 크메르루주의 세력이 크게 불어나는 데 기여했다.
 
1973년 캄보디아 내전의 세력균형을 완전히 뒤바꾸는 사건이 발생한다.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미군이 인도차이나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 크메르루주에게 밀린 론 놀은 실각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 1975년 폴 포트는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여 정권을 장악한다.
 
내전에 지친 캄보디아 시민들은 수년간의 전쟁이 끝났다는 생각에 처음엔 크메르루주를 환영했지만 이는 킬링필드라는 또다른 비극의 서막이었다. 크메르루주는 민주 캄푸치아(1977-1979)라는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폴 포트는 최고 권력자로 등극한다.
 
극단적인 공산화 정책에 돌입한 폴 포트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폴 포트의 집권 당시 캄보디아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오랜 내전으로 인한 난민들이 대도시로 몰려들었고 황폐화된 농토로 인하여 식량문제가 최대의 현안으로 부상했다. 폴 포트는 마오쩌둥과 스탈린을 본받아 집단농장체제에서의 농공업 증산운동인 '대약진 운동'을 모방한다. 문제는 이 정책이 중국과 소련에서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며 참담하게 실패한 정책이었다는 것.
 
폴 포트는 그럼에도 캄보디아에서는 대약진 운동이 성공할수 있다고 자신했다. 소련과 중국의 실패원인은, 인민들의 생활을 너무 안락하게 해줬고 반동분자들을 더 강력하게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폴 포트의 분석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확신에 빠져있던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 정권은 중국과 소련보다 더 강도 높은 초 대약진 운동을 표방하며 극단적인 공산화 정책에 돌입했다.

폴 포트 정권은 자신들이 집권한 1975년을 0년으로 선언하며 그동안의 역사를 모두 지우고 원년으로 회귀하려고 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엄격한 통제하에 모두가 평등한 조건의 생활과 노동을 감수해야 했다. 사유재산을 금지하기 위하여 화폐도 폐지해버렸다. "돈을 많이 갖고 있는 자가 그 특권으로 공산주의를 무너뜨릴 것"이라는게 폴 포트의 생각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배급제를 운영하며 국가가 쌀을 배급하고 나머지 필요한 물건들은 국민들이 물물교환으로 구입하도록 했다. 이후 쌀이 부족해지자 물물교환도 금지시켰다. 폴 포트는 '누군가 더 좋은 것을 가지면 평등하지 않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폴 포트 정권은 수도 장악 이후 프놈펜에 살고있는 도시민들을 추방하고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폴 포트는 도시민을 '자본주의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폴 포트는 모든 국민을 기본 인민(교육을 못받은 농민과 노동자)과 신인민(도시와 문명의 혜택을 받은 이들)으로 분류했고 기본인민을 이상적인 국민상으로 생각했다. 그의 눈에 신인민들은 자본주의에 물들어서 사회를 망치는 국민이었고 "너희는 살려둬도 아무 이득이 없고 죽어도 아무 손해가 없다"는 섬뜩한 막말을 내뱉기도 했다.
 
폴 포트는 프놈펜 주민들을 단기간에 추방하기 위하여 미국의 폭격이 올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크메르루주 병사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심지어 저항하는 이들을 그 자리에서 처형하기도 했다. 환자, 아이, 노인, 임산부 등 예외는 없었다. 심지어 걸어가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농부의 정신이 없다'는 이유로 군인들에게 학살당했다.
 
내전 이전 동남아의 파리로 불렸던 프놈펜은 하루아침에 유령도시가 되어 한 나라의 수도가 텅 비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1975년 4월 17일 강제 이주로 사망한 이들만 1만여명에 이른다. 그리고 프놈펜 외에 다른 도시에서도 강제 이주가 단행됐다.
 
도시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집단농장에서 하루 종일 제대로된 휴식도 없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의 쌀 생산량을 3배로 늘리겠다는 무리한 목표를 제시하며 국민들을 몰아붙였다. 자본주의자들은 노동으로 교화해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신념은 "프놈펜은 돈이 있어서 망가졌다. 도시는 개조될 수 없지만 인간은 개조될 수 있다. 인간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봐야 농사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다"는 한 크메르루주 간부의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애초에 무리한 목표였던 농업 수확량은 크게 늘지않았다. 크메르루주 관리자들은 처벌이 두려워 목표량을 달성했다는 거짓보고를 올렸고, 그 와중에 간부들은 집단 농장에서 사망자 수를 조작하여 배급품을 착복하는 비리가 만연하기도 했다. 집단농장에서는 과로-질병-영양실조-기아로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1975년 한 해 동안에만 도시 이주민의 약 1/3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망상에 빠진 폴 포트는 이번엔 기존의 학교가 자본주의 교육을 가르친다며 전국의 학교를 폐교시켰고, 부모와 아이들을 강제로 갈라놓아 이산가족이 속출했다. 폴 포트는 5~9세의 어린 아이들에게 극단적인 공산화 사상을 교육시켰고 집단농장에서 사람들을 감시하고 무기를 들게하는 소년병으로 양성했다.
 
'척살 대상' 1순위는 지식인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급기야 폴 포트는 이상적인 공산 국가 건설을 명분으로 농민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죽이겠다는 극단적인 정책을 시행한다. 폴 포트의 척살 대상 1순위는 바로 지식인들이었다. 크메르루주는 지식인을 색출하기 위하여 안경을 쓴 사람, 손이나 피부가 고운 사람들, 글을 읽을 줄 알거나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지식인으로 간주하여 처형했다. 심지어 문화예술인과 운동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칠수 있을 만한 모든 사람들이 처형 대상이었던 것.
 
황당하게도 이 모든 처형 기준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이 바로 폴 포트 본인이었다는 것. 본인의 이름은 폴 포트는 스스로 지은 영어식 이름으로 '정치적 잠재력을 지닌 사람(Poltics Potential)'의 준말이었다.
 
한 마디로 본인을 제외한 모든 지식인들은 모두 나라를 망치는 주범이라는 게 폴 포트의 망상이었다. 그리고 이는 크메르루주의 고위층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중 다수는 부유한 집안에 유학파 출신이었고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녔다. 그야말로 위선과 모순의 끝판왕이었다.
 
폴 포트는 색출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일가까지 3대를 절멸시켰다. 아기를 공중에 내던져 사격연습에 이용하는 잔혹한 범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줘서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민들은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살해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또한 폴 포트는 가장 악명높은 투올 슬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수많은 강제수용소는 건설하고 캄보디아를 감옥국가로 만들었다. 수용자들은 가혹한 통제와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캄보디아의 화가 겸 인권운동가이며 투올 슬랭의 생존자였던 반 나스는 손톱과 발톱을 뽑으며 채찍질을 가하는 투올 슬랭의 잔혹한 실상을 고발하는 내용을 그림으로 남겼다.
 
폴 포트는 미국에서 언젠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피해망상에 시달렸고,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소에서 잔혹하게 고문하여 스파이라는 거짓자백을 받아냈다. 수감자들은 자백을 안 하면 고문으로 죽고, 자백을 하면 처형 당하기 일쑤였다. 투올 슬랭의 소장조차도 훗날 "자백이 진실이라고 믿은 적이 없다. 오직 사람들을 제거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은 프놈펜 외곽의 쯩아익에 매장됐다. 이러한 희생자 집단 매장지는 캄보디아 전국에 약 2만여 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예일대 조사결과에 다르면 폴 포트 집권 약 3년 9개월 동안 캄보디아 인구의 1/4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캄보디아 내국인만이 아니라 중국, 태국, 베트남인 등 외국인들도 대량 학살당했다. 수백년전 캄보디아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을 침공하기도 했으며 바척마을 학살사건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에 분노한 베트남은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미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베트남은 한 달 만에 프놈펜을 점령하고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했다.
 
전두환과 폴 포트의 공통점

폴 포트는 전쟁에 패한 이후에도 정치적 목적으로 베트남을 견제해야 했던 중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군을 운용하며 베트남과 맞섰고 캄보디아는 또다시 내전에 휩싸였다. 미국은 초기만 해도 크메르루주 정권만을 캄보디아의 정통정권으로 인정하고 친베트남 정권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며 비난했다.
 
베트남은 불리한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하여 크메르루주가 자행한 학살 현장 사진을 국제사회에 공개한다. 외국 기자들은 베트남의 지원 하에 캄보디아 전역을 취재했고 이를 통하여 크메르루주의 천인공노할 만행이 세상에 알려진다. 이는 당시 한국에도 보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크메르루주의 만행이 알려지고도 베트남을 향한 여론이 호전된 것은 아니라서 베트남군은 결국 침공 10년 만인 1989년 9월 캄보디아에서 철수한다. UN의 개입으로 무장해제를 거부한 크메르루주를 배제하고 평화적 선거가 치러졌고, 캄보디아는 입헌군주제로 부활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크메르루주를 키우는 데 기여한 시아누크가 국왕으로 복귀하게 된다.
 
폴 포트는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내전은 계속되었지만 크메르루주의 세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결국 1997년 폴 포트는 수하들에게 체포되어 인민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던 폴 포트는 1년후인 1998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사망을 두고 여러 가지 음모론이 난무했다.
 
폴 포트의 시신은 쓰레기와 함께 화장됐다. 한 시대를 악명으로 뒤덮인 독재자의 초라한 최후였다. 그의 사망 이후 남아있던 크메르루주의 잔존 세력은 완전히 해체됐다.
 
폴 포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생전 폴 포트가 남긴 인터뷰를 보면 "나는 잔혹한 사람이 아니다. 양심적으로 거리낄 게 없다"며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여 캄보디아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죄의 무게에 걸맞는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 폴 포트의 갑작스러운 최후는 캄보디아인들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남겼다. 불과 4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최악의 지도자 한 명이 일으킨 재앙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한 국가를 백 년 가까이 후퇴시키는 비극을 낳았다.
 
한국의 전두환과 캄보디아의 폴 포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고 자국민을 대량살상한 잔혹한 독재자이지만 지은 죄에 비하여 편하게 천수를 누리다 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후에도 이들이 남긴 죄악은 부끄러운 오명으로 남아 영원히 두고두고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됐다. 권력도 막을 수 없는 진실의 힘이다. 우리가 이 가슴 아픈 비극을 굳이 언급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벌거벗은세계사 폴포트 킬링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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