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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라는 영화를 봤다. 북한에서 내려온 천재 수학자 리학성과 한 청소년의 우정, 그리고 수학 이야기, 주기율표로 만든 아름다운 연주. 여러 부분이 회자되며 영화는 꽤 유명해졌고 나는 그중에서도 유난히 마음에 남는 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주인공인 리학성은 북한에서 내려온 천재 수학자지만 신분을 감추고 명문 고등학교의 경비노동자로 살아간다. 근무가 끝나면 좁지만 혼자 고요하게 있을 수 있는 경비실에서 수학 문제를 풀고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잠든다. 그런 리학성을 학생들은 인민군이라고 부른다. 탈북자를 조롱하는 호칭이다.

(*다음 이어지는 문단에 약간의 스포가 있습니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스틸컷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스틸컷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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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미에 리학성은 사람들 앞에서 정체를 드러낸다. 처음엔 "인민군이 왜 왔어?"라는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은 유명대학교의 교수가 그를 알아보고 소개하자 태도가 달라진다. 나는 그 장면이 오래오래 생각났다. 사람들의 태도는 왜 달라졌을까? 사람들은 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직업'에 따라 태도를 달리 하는 걸까.

"이렇게 와주시는 건 좋은데..."

작년에 우리 동네에서 '필수노동자 응원사업'을 한 적이 있다. 코로나 시기를 힘겹게 지나온 노동자분들에게 작은 선물을 마련해서 직접 전달하고 응원을 전하는 캠페인 활동이었다. 지역 활동가들과 주민들이 함께 준비한 물품을 들고 배달노동자, 요양보호사, 어린이집 선생님, 지역아동센터, 지하철역 청소노동자 등 다양한 분들을 만났다.

하루는 아파트 경비노동자와 청소노동자를 만나러 갔다. 대단지 아파트의 경비 초소를 일일이 방문하며 인사를 드리고 물품을 전달하다가 저 멀리 청소노동자 한 분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안녕하세요!"라고 크게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분은 멀리서 봐도 화들짝 놀라면서 "저요?"라고 되물었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는데 가까이 갈수록 그분의 몸에 긴장이 서리고 표정도 좋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그 표정에는 놀라움, 걱정, 두려움 비슷한 것들이 섞여 있었다.
 
경비노동자가 "우리의 일상을 지켜주는 아파트 노동자를 존중해주세요"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
 경비노동자가 "우리의 일상을 지켜주는 아파트 노동자를 존중해주세요"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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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희가 이번에 필수노동자분들을 응원하는 캠페인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뭘 하려고 불렀는지를 설명하자 그제서야 그분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휴. 나는 또 누가 뭐라고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그 말을 들은 우리가 놀랄 차례였다. 그는 평소에 어떤 경험들을 하길래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이렇게 놀라고 걱정을 하게 되는 걸까. 경비실을 차례차례 돌면서 경비노동자들이 해주는 얘기를 들으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잠깐 앉아있으면 관리사무소에 바로 신고 들어가요. 이렇게 와주시는 건 좋은데 누가 보면 또 분명 일 안 하고 노닥거린다고 뭐라고 할 거예요."

"밤에 갑자기 문을 발로 쾅쾅 차고 그래요. 술 먹고 와서 뭔가 맘에 안 든다 이거죠. 경비초소 비워놓고 어디 갔냐고. 저희야 순찰 돌러 다녀야 하니까 비웠죠."


마침 우리가 갔던 날은 가을의 중간,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는 날이었다. 누군가는 낙엽을 밟으며 가을의 정취를 즐겼겠지만 경비노동자들에게 낙엽은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는 노동을 불러올 뿐이었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는 커다란 포댓자루 가득 낙엽과 쓰레기가 담겨 있었다.

어떤 직업이든, 차별받지 않으려면 
 
아파트의 쓰레기 포대자루 사진.
 아파트의 쓰레기 포대자루 사진.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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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가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인 것처럼 청소 노동자나 경비 노동자 역시 이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 두 직업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경비노동자는 대부분 용역업체에 속해있고 매년 계약을 갱신하는 비정규직이다. 2020년 5월 아파트 입주민의 갑질에 시달리다 못해 세상을 떠난 경비노동자 최희석님 사건이 있은 후에 경비노동자 인권조례가 일부 지자체에서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두 번 졸았다고 해고", "강아지 찾아달라며 폭행"과 같은 뉴스가 끊이질 않는다.

2021년 6월 21일 국회에 따르면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평등에 관한 법률안'과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차별금지법안'에는 기업에서 채용이나 처우 등의 기준이 되는 학력, 고용 형태 등으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는 규정이 포함됐다.

차별금지법이 생긴다고 해서 경비노동자나 청소노동자에 대한 차별이나 괴롭힘이 한순간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통해 사회 전반에 '차별'에 대한 고민이 시작될 거라고 믿는다.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5인 미만 사업장에만 적용되지 않는 근로기준법 문제라든가 비정규직에 대한 임금-처우 불평등, 장애인 고용 문제,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하는 플랫폼 노동자나 특수고용노동자 문제가 하나하나 풀려나간다면. 그렇게 된다면 어느 날엔가는 수학자든 경비노동자든 똑같은 대우를 받는 리학성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태그:#차별금지법, #경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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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차별의 예방과 시정에 관한 내용을 담은 법입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 행동하는 연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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