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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의 노동시간 분석은 단순히 남성이 여성보다 더 길게 일한다거나, 여성이 남성에 비해 시간당 임금이 낮다는 데 그치지 않고, 장시간 노동 체제와 성별 분업에 기반한 가부장제가 어떻게 결탁해 노동자를 착취하며, 노동계급 내 성별 분할을 유지해 왔는지 규명해왔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노동자 상은 가사, 돌봄 등으로 '방해받지' 않고 전일제로 임금노동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는 남성이다. 세련되고 유연한 자기경영형 노동자를 요구한다지만, 그 역시 스위치를 껐다 켜듯 언제든 업무에 연결되었다가도 자기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고, 심지어 번아웃과 우울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까지 하는 사람이다.

대신 그의 돌봄 책임, 일상생활의 유지를 위한 갖가지 노동을 대신해 줄 '누군가'가 필요한데, 이는 십중팔구 여성이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노동계급 여성들은 가정 안과 밖에서 임금노동과 비임금노동을 오가며 일 해왔지만 이 많은 일들은 부업, 용돈 벌이, 부차적인 노동으로 취급되었고 임금격차나 직종 간 성별분리 등 다양한 일터 내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 노동자의 노동시간 구성 양상은 매우 다르고, 노동시간 정책의 결과도 매우 다르다. 노동시간 문제에서 남성과 여성을 따로 살펴야 하는 이유이다. 

초단시간 노동의 성별 배분

노동시간의 배분은 성별로 매우 불균등하다. 특히 지난 10여년간, 단시간 노동이 저출산 문제의 해결 방안 중 하나로 강조되면서, '여성노동의 시간제화'가 심각해졌다. 여성들에게 집에서 일할, 육아를 담당할, 돌봄을 책임질 시간을 돌려준다며 등장한 '여성친화형 시간제 일자리'는 초기부터 큰 비판을 받았으나 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 모두 중심축이 되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단시간 근로자'란 "1주 동안의 소정근로시간이 그 사업장에서 같은 종류의 업무에 종사하는 통상 근로자의 1주 동안의 소정근로시간에 비하여 짧은 근로자"를 의미하고, 보통 평소 1주에 36시간 미만 일하기로 정해져 있는 경우를 뜻한다. 초단시간 노동자는 1주 동안의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노동자를 칭한다. 

단시간/초단시간 노동은 노동자의 자발적 선택으로 이루어지기보다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비용절감형의 비정규직이라는데 대다수 논자들이 동의한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초단시간 노동자에게는 1주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보장하지 않아도 되고, 연간 15일의 유급휴가를 줄 필요가 없으며 2년을 초과하여도 기간제 근로자로 채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고, 별도의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이 외에도 '국민연금법', '국민건강보험법', '고용보험법'에서도 1개월간 소정근로시간이 60시간 미만인 노동자는 직장가입자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기업들은 이런 법적 사각지대를 이용하기 위해 초단시간 노동자 활용을 늘리고 있다. 시간제 근로자의 근로계약을 주당 15시간 미만으로 쪼개어 계약을 맺고자 하는 사업주도 흔하다. 2013년 83만 6천명이었던 초단시간 노동자는 2021년 151만 명을 상회하여 10년 간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초단시간노동 증가는 여성에서 두드러진다
 초단시간노동 증가는 여성에서 두드러진다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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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초단시간 노동자 증가는 여성에게서 두드러진다. 경력단절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촉진하고 여성들의 일과 가정의 양립을 돕는다며 여성 노동자의 초단시간 노동을 늘렸기 때문이다. 2021년 기준 여성 취업자의 8.1%가 주 15시간 미만의 초단시간 노동자다. 남성에서 이 비율은 3.6%다. 

여성의 시간제 일자리는 시간당 임금이 낮은 직종이 많을뿐더러, 각종 법적 불이익으로 총액임금이 전일제 노동의 절반 수준이다. 직장에서도 승진 전망 없는 낮은 지위에 주로 포진해 여성 노동자의 주변화를 고착화한다. 또, 가정 내 여성의 돌봄 부담/전담을 전제로 한 일-가정양립 정책은 여성들이 가정 내 돌봄 부담을 지는 것을 당연시한다는 것 자체로 차별적이다.

결혼 여부에 따라, 출산 여부에 따라, 본인의 연령이나 조건에 따라 여성들의 가정 내 부담의 크기는 매우 다양하다. 5차 근로환경조사에서 주당 근무시간과 희망 근무시간을 비교해봤을 때, 현재 하는 일보다 더 긴 시간 노동하기를 희망하는 노동자는 남성이 7.1%, 여성이 11.0%나 됐다. 단시간 일자리를 원하고 필요로 하는 여성들이 짧게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시간 예측 가능성과 젠더 이데올로기

장시간 노동체제에 속하는 한국 사회에서 노동시간 논의는 여전히 노동시간의 길이 자체에 집중돼 있지만, 노동시간의 예측 가능성 역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노동과 그 소득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노동시간'은 사실상 생활시간 전체를 규율하는 역할을 한다. 예측 불가능하고 불규칙한 노동시간은 삶 전체의 불안정성으로 이어진다.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이소진, 갈라파고스 2021)은 회사가 일방적으로 주 35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줄인 대형마트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노동시간이 줄어들면서, 장기적으로 임금 저하 가능성이 대두되자, 노동조합은 임금 문제를 중심으로 '일방적인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한다.

그러나 저자가 만난 여성 노동자들에게 더 큰 문제는, 한 시간 짧아진 일과표를 가지고 테트리스처럼 짜여 나오는 불규칙한 근무 스케줄이다. 노동시간은 감소했지만 인력은 늘리지 않으니 노동력이 부족하고, 이는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더 잘게 쪼개고 무작위로 배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출퇴근 시간이 10분, 20분 단위로 정해지고 노동자들은 이를 알아서 숙지해야 한다. 근무일은 2~3일 전, 늦으면 하루 전에야 '무작위'로 사내 어플리케이션에 공지된다.

저자는 여성들의 시간을 가족 돌봄을 중심으로 상상하는 사회에서, 돌봄 부담이 줄어들었을 것으로 상상되는 중장년 여성의 노동시간 이외의 시간은 '무'로 상정되며, 따라서 이런 막무가내 식의 업무 시간 배분이 가능하다고 본다. 반대로 이런 불규칙한 업무 시간은 '돌봄 책임이 큰 여성 노동자'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 된다. 

성별분업과 젠더 이데올로기가 '불규칙한 노동시간'과 결탁하여 이윤 상승과 성차별 공고화에 이바지하는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경제학회장을 역임한 클라우디아 골딘은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100여년에 걸쳐 '커리어와 가정'을 둘 다 성취하기 위해 분투한 미국 대졸 여성의 노동을 추적했다.

그는 직종 분리나, 동일 노동에서 여성이 더 낮은 임금을 받는 것 외에 커리어 차이가 성별임금격차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가 말하는 커리어는 단순히 일자리를 가지는 것을 넘어 "생애에서 장기적으로 지속되며 당사자가 열망하고 추구하는 종류의 일에 고용된 상태로, 그 직업이 무엇인지가 그 사람의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많은 커리어에서 일은 너무나 탐욕스럽게 '가차 없는 밀도로, 불규칙한 일정에 대응해가며, 장시간 일할 것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이전보다 훨씬 높은 보수를 지급한다. 대기업에서 일정 직급 이상으로 승진하는 과정, 전문의가 되는 과정, 대학에서 정년 보장받는 교수가 되는 과정 등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런 일은 직장을 위해 항상 대기 상태로 엔진을 켜둘 수 있는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의 시간을 언제든, 극악스럽게 빼앗아간다. 

가정에 대한 책임이 여성에게 훨씬 크(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이런 '탐욕스러운 일자리'를 여성이 기피하게 된다. 커리어를 위해 시간 압박이 가장 큰 30대 중후반은 가정(출산이나 입양을 통해 자녀를 갖게 되는 가정을 의미한다)을 꾸리는 데에도 가장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따라서 많은 여성들이 커리어를 중도에 포기하거나 뒤로 미룬다. 그 결과가 성별임금격차와 부부 내 불평등이다.

성평등한 민주주의 사회의 과제

골딘의 분석은 미국 내에서 저학력/유색인종 여성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커리어가 아닌 그냥 '일'을 하는 여성들은 어떤가에 대한 답으로는 불충분하다. '가정' 자체에 대한 매력이 극도로 낮아진 한국 사회에서도 상당히 다른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생활 시간 전체를 '탐욕스럽게' 요구하는 노동구조가 어떻게 성차별 이데올로기와 긴밀하게 엮여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림대 사회학과 신경아 교수는 "노동시간 단축은 불평등하게 배분된 성별 격차를 해소하고, 자신의 생계를 위한 기회와 자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성평등한 민주주의 사회 구축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장시간 노동, 고용 안정성, 노동시간 통제권 문제가 어떻게 젠더화돼 있는지 살피고, 이를 함께 제기할 때 노동시간을 둘러싼 싸움이 민주주의 사회 구축에 디딤돌이 될 것이다. 

취업자 중 초단시간 노동자의 비중은 여성이 더 높지만, 최근에는 남성 노동자들의 초단시간 일자리 상승세가 여성 못지않다. 여성을 '가정의 책임자'로 다루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초단시간 노동이라는 값싸고 취약한 일자리를 양산하고, 사실상 남성과 여성 모두를 더 쉽게 착취한다.

여성의 커리어 축적을 막는 '탐욕스러운 일'은 남성들을 가까운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과로사하게 만든다. 성별 불평등한 노동시간에 맞서는 싸움은 우리 모두를 위한 싸움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노보연 상임활동가이자 직업환경의학전문의인 최민님이 작성하였습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일터' 3월호에도 게재됩니다.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 상상되지도, 계산되지도 않는 여성의 일과 시간에 대하여

이소진 (지은이), 갈라파고스(2021)


태그:#노동시간, #성별_격차, #젠더_노동, #초단시간_여성, #여성_노동_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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