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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투사 박명섭, 김장렬 동지여! 동지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국민회) 총재 이승만 특사는 조사를 낭독했다. 이어 국민회 부총재 김구 특사 역시 비슷한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충주군(현재 충북 충주시) 교현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수천 명의 군민은 울음을 참느라 자신들의 발끝만을 보고 있었다.

조사를 마친 김구 특사가 박명섭(22)·김장렬(25)의 유족을 위로하자 유족은 울음보가 터졌다. 참석자들도 곡소리가 나와 행사는 십여분간 중지됐다. 이를 사회자가 수습하고 사건 경과 보고, 남로당 규탄 결의문 낭독, 유족 감사 인사, 헌화를 끝으로 (충주)군민장은 마무리됐다. 이날 1947년 9월 3일 열린 군민장은 소위 '진천사건'으로 희생된 두 청년의 장례식이었다. 

남로당의 산중 회의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 살 수만은 없소." 홍가륵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김차복 동지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 역시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근에 이월면뿐만 아니라 진천군 내에서 수시로 우익단체에 의한 테러가 공공연했기 때문이다.

"오늘 논의된 결정을 정리해보겠소. 하나, 어제 새벽 사건으로 인해 우익의 테러공격이 예상되기 때문에 (진천군) 이월면에 조직된 자위대를 동원한다. 둘. 밤 10시 30분에 올리는 봉홧불을 신호로 진천군 내 우익진영을 총공격하라. 이 결정에 이의가 있으면 서슴없이 발언해 주시오."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 이상으로 회의를 마치겠소. 즉각 시행하시오!"

1947년 8월 30일 오전 10시 진천군 진천면(현 진천읍) 사석리 산중에서 열린 회의에서 남로당 진천군당위원장 홍가륵이 폐회를 선언했다.(1948년 7월 19일. 청주지방법원 <남신우 외 판결문>) 이날 산중 회의의 발단은 이틀 전 이월면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앞선 8월 28일 저녁 8시에 진천군 이월면 송림리에서 '우익' 신창현과 '좌익' 김차복의 말싸움이 있었다. 싸움은 커져 국민회원(우익) 수십 명이 김차복을 구타했다.

그러자 다음날 8월 29일 새벽 4시 30분에 면내 좌익 활동가 약 250명이 집결했다. 그 중 150명은 이월지서를 포위했고, 100명은 우익인사 송필만, 신학균, 방기태 등의 집을 습격했다. 송필만은 경기도 장호원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학을 나오고 연희전문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국에서 이승만을 돕기도 했다. 그는 해방 직후 한민당 발기인으로 창당에 관여했고, 신탁통치 반대의 선봉에 섰다. 또 1946년 4월 우익연합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부장으로 활동했다.(이월면지편찬위원회, 『이월면지』, 2018) 이후 이월지서는 진천경찰서 지원을 받아 29일 새벽 5시 좌익세력을 해산시켰고, 23명을 검거했다.(<공업신문> 1947.9.4.) 

거먹바위 고개에서의 혈투
 
진천 이월사건이 발생한 진천읍 송두리 거먹바위 고개
 진천 이월사건이 발생한 진천읍 송두리 거먹바위 고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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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우익청년들을 태운 트럭 4대가 증평에서 진천으로 향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남로당 진천군위원회는 긴급히 수백 명을 규합, 제1부대는 이월면 사곡리와 송두리 거먹바위 고개에 매복시켰다. 그들은 거먹바위 고개 도로 중앙에 멍석 3장을 말아 쌓아 놓았다. 제2부대는 거먹바위 고개로부터 진천 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원현고개에 배치했다.

저녁 7시, 우익 청년들이 탄 트럭 2대가 거먹바위 고개에서 '덜컹' 소리를 내며 멈췄다. 말아놓은 멍석에 걸린 것이다. 이어 "와와"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커다란 돌이 날아왔다. 매복했던 청·장년 400~500명이 투석전을 벌이자 우익청년들은 트럭에서 내려 도망가기 바빴다.

좌익 청년들은 곤봉을 들고 "저놈들 죽여라!"며 달아나던 청년들의 머리와 어깻죽지를 내리쳤다. "악" "아이고"하는 비명이 연신 터졌다. 피투성이로 트럭을 타고 도망친 청년들은 원현고개로 향했다. 하지만 이곳에도 좌익 청년이 매복해 있었고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이날 충돌로 충주읍 대수정(大水町)의 박명섭은 즉사했고, 이류면의 김장렬은 6시간 만에 사망했다.

우익도 반격에 나섰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보복 공격이 이어졌다. 이날 충주와 음성, 청주의 서북청년회, 국민회 회원들을 태운 트럭 7대가 이월면에 집결했다. 이월면 동성리 김응수의 생전 증언에 의하면 "그들에 의해 이월면 동성리는 초토화되었다"고 한다.
 
우익에 의해 이월면 동성리 가옥이 파괴된 상황을 증언하는 김응수
 우익에 의해 이월면 동성리 가옥이 파괴된 상황을 증언하는 김응수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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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들은 이월면과 진천군 일대를 다니며, 소위 '진천사건'에 연루된 청·장년들을 무차별적으로 검거했다. 경무부장 조병옥의 발표에 의하면 8월 31일 현재 사망자 2명, 중경상자 59명이 발생했으며, 192명이 검거되었다.(<공업신문> 1947.9.4.)

보복은 또다시 보복을 불렀다. 8월 31일 새벽 2시 30분 진천군 덕산면 한천리 좌익 2천 명이 한천지서를 포위했다. 이에 경찰이 발포해 중경상자 18명이 발생했다. 좌익세력은 국민회 간부의 주택과 우편국, 금융조합 등을 습격했다. 같은 날 새벽 진천면 사곡리에서도 좌익 100명이 봉기했다.

좌절된 통일국가 수립의 꿈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한반도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일제강점기에 더욱 강화된 지주-소작 관계는 농민의 삶을 옥죄었다. 또 조선의 실정을 무시한 미군정의 식량정책으로 쌀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로 인해 대구의 10월 항쟁이 일어났고 그 여파는 전국으로 퍼졌다. 충북 진천군 이월면과 덕산면, 사석면도 그 영향을 받았다. 

이 와중에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영·중·소 4개국의 외무상이 한반도의 임시정부 건설 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민주주의 원칙 아래 독립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 정부가 공동으로 조선을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를 결정했다. 회의에서 미국은 최대 30년간의 신탁통치를, 소련은 5년을 주장했다.

하지만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동아일보>의 보도로 해방 정국은 격랑에 휩싸인다. 남조선 좌·우익은 일제히 신탁통치 반대를 표명했다. 하지만 며칠 후 조선공산당과 좌익은 한반도에 단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우익은 즉각적인 반탁투쟁을 전개했는데, 친일파와 임시정부 봉대론을 주장했던 김구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우익단체는 반탁 투쟁을 기점으로 '반탁=반소=반공=애국'의 등식을 만들어냈고, '찬탁=친소=친공=매국'의 논리를 개발했다. 미군정은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에 임하면서도 좌익세력을 탄압했다. 조선공산당에 이어 남로당이 불법화되었고, 농민들의 합법적인 시위도 탄압했다. 미군정은 좌익 탄압에 경찰뿐만 아니라 국민회,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을 동원했다. 

좌우 격돌 전쟁터에 핀 평화의 꽃

충북 진천군은 일제강점기부터 농민운동이 활성화돼 좌익운동이 강했다. 해방 후에도 좌·우익은 사사건건 부딪혔고, 이 와중에 진천사건이 발생했다. 진천사건 관계자들은 190명이 넘는데 이 중 징역을 살던 이들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예비검속되거나 불법학살당했다. 

진천사건과 관련해 진천면 상계리 남신우와 읍내리 정창환이 징역 4년을, 읍내리 송천석이 3년을, 읍내리 이두복·이종문이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12명은 2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김〇응은 집행유예 3년, 남철우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중 2년 6개월 이상을 받은 남신우 등 5명은 6.25 발발 후 형무소재소자 사건으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불법적으로 학살되었다. 또 남로당 진천군당 위원장 홍가륵도 1948년에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전쟁 발발 후 청원군 낭성면 호정리에서 총살당했다.

실제 1950년 7월 10~11일 진천군 사석면과 문백면에서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인접한 청원군(현 청주시) 오창면 양곡창고로 이송되었고 국군 6사단 헌병대의 총격으로 세상을 달리했다. 천만다행으로 살아난 이도 100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같은 진천군 내에서도 이월면 사람들은 큰 희생을 치르지 않았다. 이월면 진천사건 관련자들은 이미 1950년 1월경 강제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을 터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비밀은 이월지서장 최민호(가명)에 있다. 최민호는 진천경찰서의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명령이 떨어지자, 이월면 보도연맹원들을 지서에 전부 소집했다. 그런데 이들을 그냥 두면 모두 저세상으로 갈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최민호 지서장은 "모두 집에 가시오"라고 했다.

무심코 집에 돌아간 이들이 이월지서장이 생명의 은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수복 후에서였다. 좌우 격돌 전쟁터에서 핀 평화의 꽃이었다. 1952년 지방선거에서 이월면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전 이월지서장의 실명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태그:#진천 이월사건, #한국전쟁, #보도연맹, #예비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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