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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2기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정근식 2기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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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학살·고문·간첩조작의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국가에 어떤 책임도 묻지 못하는 피해자만 남았다.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5~2010, 진화위)가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피해자로 인정한 희생자는 총 2만620명, 이 중 국가로부터 피해 보상을 받은 이는 5600여명에 불과하다. 이마저 손해배상 소송을 직접 청구해 이긴 경우다. 

최초 소송부터 억울하게 끝났다. 법원의 '소멸시효' 해석 때문이다. 1950년 경찰이 주민 97명을 총살한 '나주 경찰부대 사건'을 시작으로 2007년부터 소송이 시작됐으나 줄줄이 패소했다. '불법행위가 있은 날로부터 5년이 지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이유다. 9년 후에야 이런 법리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으나 구제 수단은 없다. 현행법상 소급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수 정부 집권 10년 동안의 역주행도 한몫했다. '사법농단'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2011~2017) 특히 두드러졌다. 양승태 대법원은 '진화위 진실규명 결정일로부터 3년 안에 제기하지 못하면 청구권이 없다'거나, '재심에서 무죄를 받아 형사보상이 확정된 피해자는 이로부터 6개월 안에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며 편의대로 법리를 적용했다. 3년과 6개월을 지키지 못한 피해자들의 패소 확정도 늘어났다. 

그 사이 고령의 피해자들은 계속 세상을 등졌다. 정근식 2기 진화위 위원장이 기회있을 때마다 '포괄적인 배·보상 법제화'를 말하고 있는 이유다.

"2013년 이미 대법원에서 배·보상 관련 특별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9년 간 국회에 발의된 법률개정안만 열 개 정도지만 국회 문턱을 넘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마침 국회 논의가 시작됐고, 2기 진화위는 입법 필요성을 촉구하고 있다. 국회가 긴밀히 추진하면 성사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020년 12월 출범한 2기 진화위는 2010년 급히 활동을 종료했던 1기 진화위의 연장선에 있다. 1기 진화위는 2005년 정부 차원의 과거사 청산이 비로소 본격화되면서 군사정권 시기 인권 침해, 한국전쟁 시기 학살 사건 등을 조사하는 기구로 꾸려졌으나 이후 이명박 정부가 과거사 청산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서 4년 2개월이란 짧은 기간을 끝으로 종료됐다.

지난 12월 기준 2기 진화위에 접수된 진실규명 신청은 1만2526건(1만4345명)으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 사건만 9000건을 넘는다. 짧은 조사 기간 때문에 1기 진화위에서 규명하지 못했던 과제도 산적했고, 지난 10여년 간 정부가 사과, 명예 및 피해 회복,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을 외면한 탓에 다시 2기 진화위에 접수된 사건도 상당수다. 

2기 진화위는 20일 국회에서 관련 토론회를 개최한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6명, 국민의힘 의원 3명 등 여야가 공동 주최한다. 지난 14일 <오마이뉴스>와 만난 정 위원장은 "국가 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통합적인 피해 보상 조치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정 위원장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소송을 통한 구제, 피해자에게 책임 전가하는 일" 
 
정근식 2기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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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지금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법제화를 얘기하나?

"피해자에 대한 포괄적인 배·보상은 이미 2010년 1기 진화위가 정부에 권고했지만 정부가 10년 넘게 지키지 않았다. 특히 민간인 학살의 경우 2012년 울산보도연맹 피해자들이 '유족에게 진상을 은폐한 국가가 이제 와서 소멸시효를 이유로 배상을 거절하는 건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은 이후 국가의 피해 보상 책임이 제대로 인정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땐 이미 사건발생으로부터 60년, 진화위 진실 규명 결정으로부터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사법부는 소멸시효를 이유로 패소 판결을 계속 선고해왔다. 진실규명을 받았음에도 권리 구제를 받지 못했다. 현재 전체 민간인 희생 사건의 28% 정도만 피해 보상을 받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 못한 사례가 72%다."

-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소송에 나서지 않고, 입법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개별 소송은 한계가 명확하다. 재판부에 따라, '가해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판단 기준이 들쭉날쭉하다. 소송을 제기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피해 입증에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한국 공권력에 피해를 입은 사람과 미군 등에 피해를 입은 사람 등 피해 구제에도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다. 추후 어떤 판결이 위헌 결정을 받아도 소급적용 되지 않아 구제받지 못하는 사각지대도 넓다.

무엇보다 책임 부담이 피해자에게 전가된다. 피해자 중엔 지식이 짧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고령도 많다. 변호사 선임 자체가 어렵다. 피해자에게 또 다시 피해 구제를 받기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게 하는 건 또 다른 고통을 가하는 일이다. 1기 진화위 규명 사건 중 피해자 배·보상 소송 비용만 800억 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유족·피해자의 고통을 줄이면서 불균형, 소멸시효 등을 해결하려면 입법적 해결이 불가피하다."

- 이런 불균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어떤 게 있나. 

"공권력이 아니라 미군과 적대세력(인민군 등)의 피해자들은 1기 진화위가 진실규명을 했음에도 '한국 정부 책임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피해 구제를 못 받는다. 현재까지 적대 세력 관련 소송 총 12건, 미군 관련 사건 소송 총 23건 모두 피해자가 패소했다. 전남 완도군은 625명의 피해 진실이 규명됐지만 배상 소송을 넣은 206명 외 419명은 소멸시효 등을 이유로 피해 구제를 받지 못했다. 1기 진화위 진실규명 결정 후 자연스레 배상이 따를 것으로 기대하고 소송을 하지 않은 유족이 많다. 군 단위 진실규명 사례를 분석해보면 30% 정도만 피해 구제를 받았더라." 

- 국민의힘 등 야당에서 재정 부담을 이유로 반대 목소리를 낸 적이 있다.

"정부 일각에선 관련 배상 예산을 총 4조 5000억원으로 추산한 바 있다. 지난 1월 4일 통과된 4·3 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은 최대 9000만원까지 5년에 걸쳐 보상토록 정했다. 이처럼 몇 년의 기간 동안 진행된다면 대한민국이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정부는 재정 부담을 얘기하지만 이미 926건의 민간인 학살 관련 국가배상청구 소송이 제기돼 7500억원 가량 배상이 이뤄졌다. 이 문제는 끝까지 안고 가기보다는 빨리 해결해서 털고 가는 게 우리 미래를 위해서도 낫다. 배·보상 특별법을 새로 제정할지, 기존 진화위법을 개정해 관련 조항을 신설할지, 구체적인 내용은 국회가 논의할 내용이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국가기관의 사과와 진정한 추모가 중요한 이유 
 
정근식 2기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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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의 과거사 청산엔 가해자 처벌이 빠져있다는 비판이 높다.

"70년이 지난 사건과 막 발생한 인권 침해 문제는 처리가 다를 수밖에 없다. 국가의 책임 면에선 공식 사과와 진정성 있는 추모가 필요하다. 재발방지 측면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도 필요하다. 그래서 진화위는 국가기관에 사과와 추모를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10여년 간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에 전국 지자체를 돌아다니면서, 국가와 지자체 차원의 책임 있는 사과와 진정어린 위령·추모가 함께 할 때 피해자들이 고통을 경감할 수 있다는 걸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 정의로운 피해 구제란 무엇인가. 

"고통을 겪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피해 구제 책임을 100% 전가시키는 건 정의롭지 못하다. 공동체 구성원이 적어도 그런 고통을 나누어 져야 한다. 국가는 직접적인 책임과 간접적인 책임을 모두 져야한다. 국가가 이 책임을 성실하게 인정하고 공동체가 그 고통을 분담하는 게 작동할 때 정의로운 피해 구제 조건이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 1기 진화위와 2기 진화위 사이 10년의 공백이 있었다. 과거사 화해 작업에 있어 연속성이 떨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아쉬운 부분이다. 1기 진화위는 과거사 정리 작업을 충분히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급하게 종료됐다. 생존자들에 대한 증언 채록을 남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부분은 정말 아쉽다. 한국전쟁 관련 생존자는 정말 몇 남지 않았다. 진실규명에도 대단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12년 전 진화위가 과제로 권고했으나 정부는 지금까지 이행하지 않았다. 또 다른 권고 사항인 상설기구 과거사 연구재단 설립도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 국회에 예산을 계속 요청하고 있지만, 올해 아쉽게 삭감됐다. '진실화해재단'이란 이름으로 설립 준비를 진행할 계획이다." 

- 현재 조사 인력은 충분한가?

"1기 때보다 많은 사건이 접수되고 있다. 조사관 확충이 시급하다. 가령 9000여건이 한국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등 사건인데 이를 담당하는 1국의 조사관은 60명이 안 된다. 9000을 60으로 나누면 150인데, 한 조사관이 1년에 담당할 수 있는 사건은 30건 정도다. 3년을 해도 90건이다. 국회에 인력·예산 요청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올해 상반기엔 조사관이 확충돼 향후 조사의 윤곽을 잡아야 업무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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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수된 사건 처리를 넘어 과거사 청산에 대한 의제와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크게 보면 국가인권위와 진화위가 한국을 '민주·인권 국가'로 만들어가는 제도적 장치다. 인권위는 상설기구이지만, 진화위는 한시적 기구라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사 업무는 현재의 일이자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특히 국민의 인권 감수성 눈높이가 달라지면서 인권침해 의미와 범위가 넓어져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등 1기 때 다뤄지지 않은 사안도 새롭게 재발견됐다. 2기 진화위는 화해, 통합의 관점으로 분열된 공동체를 회복할 책무를 가지고 있다.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고 극복하는 지름길에 중요한 제도적 장치로 기능할 수 있도록 더 고민을 모아낼 계획이다." 

태그:#진실화해위원회, #정근식 위원장,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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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영 기자입니다. 제보 young@ohmynews.com / 카카오톡 rockyrkd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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