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13 12:57최종 업데이트 21.12.13 12:57
  • 본문듣기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님,

저는 싱가포르의 한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입니다. 후보님이 "주 52시간제 폐지"를 비롯해서 노동 문제와 관련해서 내놓은 일련의 발언들을 듣고 평생 검사였던 후보님이 노동 문제, 더 크게는 경제 문제에 대해 짧게라도 생각해 볼 시간이 전혀 없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드리려고 합니다.

싱가포르에선 삼성 같은 곳이 3D업종

제가 다니는 회사는 싱가포르에 있는 다국적 반도체 회사입니다. 삼성전자나 하이닉스와 비슷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싱가포르의 반도체 회사는 노동자들을 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한국은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에 취직 못해서 난리인데 그게 무슨 소린가 싶죠?
  

반도체 공장에서 노동자가 일하는 모습. 사진은 한국의 어느 반도체 공장 내부입니다. ⓒ 이봉렬

 
사실 반도체 제조 공장은 대표적인 3D(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업종입니다. 반도체 생산을 위해서 사용되는 가스와 화학약품들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노동자들의 건강에 큰 위협이 됩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들어 봤으리라 믿습니다. 공장에서 발생하는 폐수와 배출가스는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독극물이 됩니다.

반도체 공장은 내부를 먼지 하나 없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외부보다 기압을 살짝 높게 유지하고, 웨이퍼(반도체를 모아 놓은 원판)에 영향을 덜 주기 위해 주로 노란색 조명을 켜 놓는데, 그 안에서 먼지 발생을 막기 위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덮는 방진복을 입고 오랜 시간 일을 하면 밖에서 일하는 것보다 쉽게 피로감을 느낍니다.


결정적으로 24시간 공장을 계속 가동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자들도 교대 근무를 합니다. 야간근무가 암을 유발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을 정도로 교대근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기업이라는 것 하나 보고 쉽게 지원을 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일하는 과정에서 위험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근무환경에서 교대근무를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면 쉽게 그만두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싱가포르에서는 반도체 공장 생산직 노동자들을 주로 중국이나 인도에서 많이 데려옵니다. 싱가포르와 비교해 보면 소득수준이 낮다 보니 적은 임금에도 일을 하고, 거주지를 외국으로 옮기면서까지 취직을 한 이상 쉽게 그만 두지도 않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싱가포르도 주 44시간 근무제이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휴일이지만, 24시간 교대 근무를 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좀 다릅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외국에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왔고 일하지 않는 날은 주로 기숙사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일하지 않는 날에도 특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쉬는 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사에서도 노동자를 뽑을 때 특근을 기본적으로 계산에 넣고 원래 필요한 인원보다 덜 뽑습니다.

노동자들은 일을 더하고 돈을 더 벌어서 좋고, 회사 입장에서는 인원을 한 명 더 뽑는 것보다는 특근비를 주는 게 금액 측면으로도, 인원 관리 측면에서도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좋습니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가 9일 오후 한국경영자총협회를 방문, 손경식 경총회장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애플이 제시한 최소한의 노동조건

이렇게 보면 다 좋은 것 같은데 사실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무리한 장시간 노동은 안전사고의 원인이 되고 개인의 건강에도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에 문제를 제기한 회사가 나타났습니다. 애플입니다. 애플은 저희 회사의 고객사입니다. 전체 매출에서 비중이 크진 않지만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애플은 지난 2012년 중국의 아이폰 부품업체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착취가 논란이 되자 최소한의 노동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업체와는 거래를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후 애플이 정한 최소한의 노동조건을 담은 "애플 협력업체 행동 수칙"이라는 문서를 협력업체에 보냈습니다.
  

애플의 협력업체 행동 수칙 첫 페이지. 협력업체가 지켜야 할 노동조건들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 애플

 
이 문서에는 "노동 인권, 차별 금지, 가혹 행위 금지, 미성년자 노동 금지" 등 전반적인 노동 환경에 관한 내용부터 "근무 시간, 임금 및 복리후생, 결사 및 단체 교섭의 자유" 등 구체적인 노동자의 권리 등을 115페이지에 걸쳐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았습니다.

후보님은 "주 120시간을 바짝 일하고 이후 쉴 수 있어야 한다", "주 52시간제가 비현실적이다"라며 노동 시간을 탄력적으로 늘릴 것을 약속했습니다. 애플은 해당 문서에 "주당 근무 시간은 초과 근무를 포함하여 60시간으로 제한되어야 하며", "모든 초과근무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정규 근무 시간은 48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해 놓았습니다.

후보님은 "최저임금보다 낮은 조건 하에서 일할 의사가 있는데 그 분들도 일을 못해서 인력 수급에 차질이 많다"며 최저임금제를 "현실을 무시한 제도"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애플은 "협력업체는 최저 임금 이상을 지급해야 하며 법률 및/또는 계약에 따라 필수로 지정된 복리후생을 제공해야 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애플이 "법정 노동시간을 늘려 달라, 최저임금을 없애 줘라"고 요구하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후보님이 "노동자들을 위해 기업들이 노동시간을 지키고 최저임금도 잘 준수하는지 확인하겠다"고 말하는 게 옳은 것 같은데,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믿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무튼 애플에 반도체를 공급하는 저희 회사도 그 문서를 받았고 그 후로 저희 회사에서는 정해진 시간 이상의 특근을 없앴습니다. 애플의 요구조건을 지키지 못하면 거래를 할 수가 없으니까요. 애플만 거래하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니라 노동 착취 기업이라는 평판이 나면 다른 회사와도 거래할 수가 없으니 애플의 요구를 계기로 회사의 규정을 노동친화적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이제 저희 회사에서는 6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은 없습니다. 특근비까지 계산하고 싱가포르까지 일하러 온 노동자들은 임금이 줄었지만, 그 때문에 회사에서는 기본급여를 높여 일정 부분 보상을 했습니다. 그럼 회사는 비용이 늘어서 어려움에 처하지 않았냐고요? 2012년 이후 지난 10년 동안 저희 회사 주가는 정확히 8배 올랐습니다. 최소한 저희 회사는 직원들 최저임금 맞춰 주는 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하는 회사의 특별한 사례라 여기면 안 됩니다. 애플에 납품하는 회사만 해당되는 것 아니냐고 묻지 말기 바랍니다. 시대가 이미 바뀌었습니다.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마저도 이제 노동자들의 권리와 노동 환경에 최소한의 기준을 자발적으로 마련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사람을 그렇게 부려 먹어서는 안 됩니다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라는 말을 들어 봤습니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줄여 부르는 건데, 쉽게 말하자면 기업이 노동자, 지역 사회 및 환경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실천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즘은 ESG(Environmental,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라고 해서 사회적 책임에 환경과 기업의 지배구조까지 포함하여 기업에 대한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무역의존도(국내 총생산에서 수출입총액이 차지하는 비율)가 60%가 넘는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CSR이든 ESG든 세계가 요구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과연 제대로 수출을 할 수 있을까요? 정부가 나서서 기업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고 끌어당겨도 모자랄 판에 최저임금 없애고, 52시간제 없애고, 주당 120시간 근무도 허용해서 기업의 이윤만 추구하겠다는 시대역행적 발언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 하는 건가요?

후보님이 이야기 한 대로 최저임금보다 낮은 금액을 받고도 일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일주일 120시간이라도 일할 수 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그렇게 부려 먹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법으로 규제를 하는 겁니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아직 법으로 규제를 하지 않은 후진국들도 있어서 다국적 대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규정을 만들어 규제를 하는 겁니다. 이윤추구가 목적인 기업이 만든 최소한의 노동규정 보다 더 형편없는 그런 법제도로 이 나라의 노동자를 대하는 분이 대통령 후보라니 믿기지 않습니다.

글을 마치면서 후보님께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노동자 입장에서 반노동자적 발언만 하는 후보님을 지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대통령으로 당선되신다면, 노동문제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후보님의 노동관으로 미뤄 봤을 때 노동자는 과로사하고 기업들은 수출길이 막히는 그런 미래가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68,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