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는 아들 딸 차별이 없는 집안에서 부모님의 과도한 기대나 억압 없이 자유롭게 성장하였다. 수학교사였던 아버지가 아름답고 훌륭해 보여 교직을 택했고, 교육자로서의 자부심이 높았던 아버지로부터 아이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 촌지는 교사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1973년, 첫 발령 받은 충남 홍성군 금마면 배양초등학교. 긴 생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자전거로 통근하던 젊은 날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회한에 잠긴다. '시대가 어지간만 했더라면….'

부임 첫날 교무실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육성회비와 저축실적 그래프가 학급별로 그려져 있는 칠판이었다. 선배교사들은 문제집을 아이들에게 팔아 서점에서 받는 수수료를 아무런 갈등 없이 챙기고 있었고, 나는 육성회비 납부실적이 매번 꼴찌여서 학교장의 질책을 받았다(그러나 훗날의 나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육성회비를 모질게 독촉하지 못한 결과인 꼴찌를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유신독재 반대투쟁에 앞장선 이들이 정권으로부터 모진 탄압과 고초를 겪을 때, 나는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참여를 독려-실상은 찬성 유도-하는 주민계도위원에 강제 위촉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2인1조로 가가호호 방문을 했다. 학부모 앞에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찬성)를 만들어 보이던 선배교사의 어설픈 웃음, 그 옆에서 못 본 척 먼 산을 바라보던 참담함과 부끄러움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반상회 지도위원이 되다

첫 발령 학교가 괴로웠던 나는 2년 만에 홍북면 용봉초등학교로, 다시 2년 만에 모교인 홍주초등학교로 전출하였다. 유신체제는 더욱 공고해졌으나 체제비판 세력의 저항 또한 치열하여, 정권은 민심이반을 두려워하는 말기적 증상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일선 교사들에게도 대민홍보 업무가 지역별로 강제 할당되었고 나는 옆 동네 대교리의 반상회지도위원이 되었다. 주민들 앞에서 반상회보를 낭독하는 내 옆에는 담당경찰이 앉아 있었다. 상황파악이 안 된 나는 '경찰이 낭독하면 되는데 왜 내가?'라는 바보 같은 불평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경찰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 입회했으며 이 상황 자체가 정권의 교사 길들이기 전략이라는 걸 훨씬 나중에야 깨달았다. 먼저 학교에서도 가끔씩 교무실에 들러 말을 거는 경찰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무시하거나 독설을 날렸지만 다른 의심은 하지 못했었다. '경찰이 왜 대민업무는 안 하고 학교에 와서 어슬렁거리는지 모르겠다'고 나 혼자 투덜거릴 뿐 동료교사들 모두 아무 말 없었던 걸로 보아 그 자가 용봉초등학교 정보담당이었던 걸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율무기 독사 만든다'는 속담이 있다. 세상 물정모르는 숙맥인데다 이념서클 출신도 아닌 내가 전교조 해직교사가 된 건 교육계의 부패와 교육 관료들의 횡포 탓도 있었지만 정권유지를 위해 지나치게 광분하였던 정권의 자충수 때문이기도 했다. 반상회를 마치고, 추적추적 비까지 내려 진창이 된 깜깜한 시골길을 자전거 끌고 귀가하면서 느꼈던 20대 미혼여성으로서의 공포와 수치심, 교육자로서의 분노와 죄책감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북한에 대한 공포심을 부추기며 독재를 미화하고,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가짜뉴스 일색이었던 그 반상회보와 지도위원 위촉장을 잘 보관했더라면 독재정권의 민낯과 시대의 폭력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되었으련만.

학교새마을어머니회 사건

1979년 10월, 독재자 박정희의 최후와 함께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의 12.12 반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그들에 의해 자행된 1980년 5월 광주의 대학살을 어용언론은 폭동진압으로 왜곡 보도하였으며 교사들은 광주의 진실을 알면서도 아이들에게 말할 수 없었고 거짓을 가르칠 것을 강요받았다.

유신 못지않게 암담하였던 5공화국 치하의 어느 날. '학교새마을어머니회' 회의에 내가 재직하는 홍동초등학교 어머니회장을 동반하여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농사지은 열무를 팔러 시장에 갔다는 그분을 찾아갔더니 남은 열무를 마저 팔기 전에는 일어설 수 없다고 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회의장에 갔더니, 학교당 2만원의 기금을 본부에 내달라는 것이 회의 요지였다. 작심하고 일어선 나는 혼자 참석하게 된 사연을 밝혔다.

농촌의 현실이 이러한데 새마을본부가 어려운 농민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기금을 내라는 게 무슨 경우이며 어머니들 회의에 왜 교사를 동원하느냐고 따졌다. (그 당시 새마을운동본부의 중앙회장은 대통령 전두환의 친동생으로, 나중에 새마을기금횡령 등 비리가 밝혀져 구속된 전경환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회의에 배석했던 장학사의 보고를 받은 교육청 관료들이 대노하여 중징계를 거론했다가 결국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징계절차가 있었더라면 나로서도 할 말이 많았을 텐데 그들도 아마 이것이 두려워서 덮고 넘어갔을 것이다.

나의 흑역사, 교육장 논문 대필

지금 생각해 보니 교육청이 나에게 약점이 있었다. 뭘 모르고 어리바리할 때 교육장의 논문을 대필한 일이 있었다. 처음부터 나에게 대필을 요구한 게 아니라 다른 교사가 쓴 초안을 수정해달라는 교육청 부탁(?)이었다. 원고를 받고 보니 내용이 주제-바람직한 학생문화-와 동떨어지고 빈약하였다. 교육청에서 가져온 자료를 참고삼아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반영하여 마무리하고 보니 초고와는 완전 다른 논문이 되었다. 대필이 찜찜하긴 했으나 교육장 이름을 빌려서 내 교육관을 피력한 것이라고 애써 합리화하였다.

얼마 후 직원회의석상에서 만면에 웃음을 띤 학교장이 나를 자랑스럽다고 극찬하였다. 내가 써준 교육장 논문이 교육관련 무슨 매체에 상세히 소개되었는데 '현직 교육장이 제시한 학생문화 혁신방안'이라고 대서특필되었다는 것. '대신 써주었다'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교장선생님, 불과 며칠 전에는 '아이들 한글도 못 가르치는 교사'라는 폭언을 나에게 퍼부었었다. 그 당시 나는 일학년 담임이었는데 교장은 도교육청 학력고사에 대비하여 주기적으로 교실에 들어와 손수 출제한 받아쓰기와 덧셈 뺄셈 시험을 보게 했다. 명백한 수업권 침해였지만 그런 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시대였다.

교육과정에 의한 정상적인 수업 대신 받아쓰기와 덧셈 뺄셈에만 치중하고, 방과 후에도 늦게까지 아이들을 남겨놓는 옆 반과 교육과정대로 관찰과 체험 학습을 챙기고 제 시간에 아이들을 하교시키는 내 반 아이들의 시험결과는 뻔했다. 옆 반 점수와 비교하며 '안 가르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폭언을 들었지만 내 정당성을 주장하려면 선배교사인 옆 반 담임을 탓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교장이 몰랐을 리 없고 옆 반처럼 나도 그렇게 학력고사에 대비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대필에 대한 입단속이 필요했던지, 교육장이 뒤늦게 나를 교육청으로 불렀다. 찻잔세트인지 뭔지를 하사받고는, '내 밑(?)에 논문 하나 제대로 써줄 수하가 없는 게 너무 한심하다느니', '나도 그 정도쯤(?)은 쓸 수 있었지만 워낙 바빴다느니', 지질하고 뻔뻔한 변명을 들었다. 그때 나는 찻잔세트 따위 거부하고 (자신도 매관매직에 의해 그 자리를 꿰찼을) 교육장에게 이렇게 쏘아주었어야 했다.

'실력으로 안 뽑고 매관매직을 하니 논문 써줄 수하가 없는 게 당연하지요!'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교육계의 매관매직을 상상조차 못했거니와 부당함에 대처하는 자세가 준비되지 않은 일개 무력한 교사였다. 그러나 부끄러운 논문대필로 칭찬 받고 정상적인 교육의 결과로 질책을 받았던 부조리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훗날, 참교육의 깃발 아래로 기꺼이 달려갈 수 있었다. 

각성의 희열과 고통, 그리고 해직
 
1993년 5월 30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경희대 노천극장에서 `교육대개혁 촉구 전국 교사대회'를 갖고 전교조 합법화와 해직교사 원상복직등을 요구했다.
 1993년 5월 30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경희대 노천극장에서 `교육대개혁 촉구 전국 교사대회"를 갖고 전교조 합법화와 해직교사 원상복직등을 요구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꽃과 책, 여행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던 나는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아이들과 함께 아름답고 싶었다. 그러나 시대의 폭력 앞에 내 꿈은 무너졌고 나의 책읽기는 문학보다는 사회과학으로 기울었다. 교육자가 정권의 하수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의 정치적, 역사적 맥락을 비로소 짚을 수 있었고 교과서를 통해서 알았던 것과는 다른 세계와의 만남은 나에게 각성의 희열과 고통을 함께 안겨주었다. 실현할 수 없는 관념과 의식이 괴로웠고 문제의식을 공유할 동료교사가 주변에 없어서 답답하고 외로웠다. 

그때쯤, 민주화운동단체로부터 받아보던 우편물이 정보기관에 포착되었다는 귀띔을 받았다.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찾아간 노동운동단체를 통해 민중교육 사건 해직선생님을 만났고 충남에도 교육운동 교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내가 사는 집 가까운 홍성YMCA 사무실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그들의 모임이 있었다. 다른 교사들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올곧고 순수한 교육관과 사명감,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나보다 젊은 그들에게서 보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기혼의 여교사였으며 살림과 육아를 시모님께 맡겨놓은 죄책감에 전전긍긍하는 옛 시대의 며느리이기도 했다. 내 집과 YMCA 사이에 지금은 복개된 홍성천과 매일시장이 있었다. 모임에 참석할 수 없는 나는 목요일 저녁이면 시장 본다는 핑계로 아이를 들쳐 업고 나와 천변에 우두커니 서서 건너편 YMCA 건물 2층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다 돌아오곤 했다. 그곳에서 싹트고 있을 아름다운 역사에 대한 기대와 설렘,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나에게 그 불빛은 희망이면서 슬픔이었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교육대학살'이라고도 일컬어지는 1989년의 해직전후를 되돌아보는 일은 지금도 힘들고 아프다. 전교조 교사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해직이야말로 정권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며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쫓겨나서 독재를 증거하고 몰락을 앞당겨야한다는 마음이 나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해직이후가 문제였다. 교직경력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충남에서는 유일한 초등 해직교사였기 때문에 주어진 직책과 조직의 요구가 있었으나 제대로 감당하기엔 가정사정이 녹록지 않았다. 

어쨌거나 현장교사들의 지지와 후원으로 4년 6개월의 해직생활을 버틸 수 있었고 나 때문에 후원금을 낸다는 동문과 제자도 있었으니 고맙고 아름다운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생활고가 덜했을 뿐 아니라, 어린 자녀와 가정을 가진 여성이라는 핑계로 중책에서 비켜있었던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 있었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과 후원금으로 해직기간을 버텨야 했던 선생님들의 생활고, 현장에 있을 때보다 더 과중한 업무와 출퇴근 시간도 없는 활동으로 무너져 내린 그분들의 건강 등이 문제였다.  

특별채용 형식으로 돌아간 학교현장은 달라진 것도 있었으나 정작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부분의 변화는 없었다. 교육 관료들의 비교육적, 비민주적 행태는 여전했고, 교육운동을 모질게 핍박하고 매도하던 자들이 여전히 교육계의 갑으로 버티고 앉아 복직교사들을 감시하고 탄압하였다. 1989년의 대량해직이후 교육운동이 현장교사에게 파급되는 것을 막으려는 정권의 당근책에 의해 교사들의 근무환경과 급여는 많이 개선되어 있었다.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피땀으로 이룩한 연구 성과물들이 교육현장에 스며들어 수업과 생활지도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직기간만큼 깎인 호봉경력으로 인해 정작 복직교사들은 박봉을 감수해야 했다. 해직기간의 생활고로 인해 빚을 떠안고 복직한 선생님들의 경우 퇴직에 대비한 연금합산은 언감생심이었다. 연금수급자라 하여 퇴직교사들이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된 이 시대에 전교조 해직출신 퇴직교사들은 대부분 연금액이 턱없이 적거나 아예 없는 가혹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꿈만 같았던 복직, 예산 동신초등학교의 추억

이제 그만, 1994년 3월에 복직했던 예산 동신초등학교의 행복했던 기억으로 넘어가고 싶다. 1989년 여름에 이별한 그 아이들(홍성 홍남초등학교 3학년)과 닮은 아이들을 사과 꽃 피는 마을의 작은 학교에서 만났다. 이슬에 젖은 풀꽃 향기가 싱그러운 들길을 걸어 출근하면 꽃보다 더 싱그러운 아이들의 웃음이 새벽 통근버스에 찌든 피로를 씻어주었고 들길에서 만났던 어여쁜 풀꽃이 꽃병에 꽂혀 있기도 했다. 현장교사의 업무는 여전히 과중하여 아이들의 숙제나 일기장을 싸들고 퇴근하는 날이 잦았으나 아이들 글에 조곤조곤 댓글 달며 나누는 마음 속 대화가 행복했다. 열린 교실 창으로 들어오는 사과 꽃 향기를 맡으며 교단일기를 썼고 아이들의 글과 내가 쓴 동화를 엮어 학급문집을 만들었다. 멀리서부터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달려와 안기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선~생~니~이~임~~~'

동신초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도 그립고, 안부가 궁금하다. 호탕하고  명쾌하였던 이혜정 선생님, 천안에서 함께 버스통근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장홍순 선생님, 충남교사문학회 활동을 함께 했던 전교조 후배 염윤숙 선생님, 나와 세계관이 비슷하여 대화가 잘 통하던 맑고 서늘한 분위기의 송이남 선생님, 늘 일찍 출근하여 따뜻한 미소와 커피 한 잔으로 나를 반겨주던 병설유치원 최지숙 선생님. 그날이 내 생일이라서 퇴근길에 여교사들과 함께 칼국수 먹으러 갔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신례원 버스터미널 일대를 샅샅이 뒤져 찾아와 칼국수 값을 내주며 축하해주었던 김정호 선생님.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인 나를 위험인물이라며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말라고 사전작업을 했던 교장을 머쓱하게 했던 고마운 선생님들이다. 그리고 또 있다. 폭설이 심하여 통근버스가 운행을 멈춘 그 해 겨울. 신례원 기차역으로 낡은 소형차를 가지고 나와 그 위험한 눈길을 헤쳐 출근시켜주었던 학교 아저씨 이병갑 주사님.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책무
 
 지난 2015년 11월 20일 오후 서울 중구 파이낸셜센터 앞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와 노동개악 저지를 주장하며 연가투쟁 집회를 열고 있다.
  지난 2015년 11월 20일 오후 서울 중구 파이낸셜센터 앞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와 노동개악 저지를 주장하며 연가투쟁 집회를 열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아름다운 세상을 꿈꿨던 젊은 날이 있었고, 함께 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다. 그런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평범한 교사로 살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아름다운 사람들과의 인연이 무척 소중하고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퇴직교사가 된 나는 생각한다. 시대가 변해도 세상은 여전히 문제가 많고 완벽한 세상은 결코 없으니, 좋은 세상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투쟁과 희생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이 땅의 교육운동도 투쟁과정에서 숱한 희생자가 있었고 가족들의 삶까지 함께 엮어 역사에 바쳐야 했던 해직교사들의 희생과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과로와 국가폭력으로 심신이 무너져버린 많은 선생님들이 가족들에게 가난과 아픔만을 남긴 채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지금도 한 분 두 분 떠나가고 있다. 평균수명이 해마다 늘어 백세시대라고들 하는데 정작 깨끗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몸 바친 분들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나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세상 떠난 동지들을 나는 전사자라고 여긴다. 살아남았으나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동지들을 중상자, 나 자신을 경상자라고 생각하며 살아남은 자의 책무를 곰곰이 되새겨본다.

태그:#해직교사 원상회복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6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책이나 읽으면서 평범하게 살고싶어 교사가 되었으나 평범하지 못한 시대를 만나 교직생활이 평탄하지 못하였다. 퇴직 후 충남 아산의 산자락 아래 깃들어 야생의 풀과 열매를 줍거나 채취하며 살고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