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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이 여주에 행차했을때 송시열과 효종의 이야기를 듣고는 이 자리에 송시열의 사액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대로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해진다.
▲ 송시열을 모신 대로사 강당의 전경 정조대왕이 여주에 행차했을때 송시열과 효종의 이야기를 듣고는 이 자리에 송시열의 사액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대로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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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을 주로 삼으라." 송시열 선생이 죽기 전 수제자 권상하에게 남긴 말이었다. 조선 후기 내내 송시열 선생의 그림자는 그 어떤 인물보다 짙게 남아있었다. 사후 노론이 계속 집권하면서 해동 성인 송자라고 높여졌으며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이 되었던 인물, 송시열의 자취가 여주에도 남아 있다.

여주시청에서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강변 오른편에 내력이 있어 보이는 기와집 몇 채가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곳이 송시열을 모시는 사당이자 서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대로사라고 하는 장소다.      

이곳은 다른 곳의 서원과 달리 교육을 담당하는 강당 부분과 신위를 모시는 사당 부분이 일직선으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지 않고, 사당 권역만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방향을 가리키는 곳이 효종이 묻힌 영릉이라고 한다. 생전 송시열은 여주에 머무를 때마다 영릉을 바라보면서 통곡하고 제자들에게 북벌에 대한 대의를 설파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그의 본심이 어떠했을지는 잘 모르지만 정조가 효종의 릉에 참배하러 왔다가 사연을 듣고 지금의 장소에 사액서원을 세운 것이다. 정조의 흔적은 수원 화성뿐만 아니라 경기도 전역에 걸쳐 진하게 남아있다. 왕이 직접 사액을 내린 덕분에 대로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은 굳게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는 강당 건물 하나의 존재만으로 이곳을 찾은 이유를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정조 시기의 명필인 황운조가 휘호한 대로 서원이란 현판이 크게 달려있었고, 강당에 앉아 시원한 강바람을 쐬며 강당에 걸린 현판들을 감상하는 것만 해도 역사를 따라가는 듯한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강당에서 문을 나오면 대로사의 내력을 적은 비석이 눈에 띄는데 여기서 대로는 조선시대의 존칭으로 송시열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정조가 직접 비명과 비문을 짓고 직접 쓴 글씨를 새긴 것이라고 하니 여주에 오시면 시내에서 머지않은 곳에 자리한 대로사를 방문해 보시길 추천드린다.      

달을 맞이하는 누각, 영월루 
 
달을 맞이한다는 뜻을 가진 영월루는 본래 관청의 정문으로 쓰였지만 현재 남한강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 여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영월루 달을 맞이한다는 뜻을 가진 영월루는 본래 관청의 정문으로 쓰였지만 현재 남한강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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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방향을 바꿔 여주시내에서 강변유원지 방향으로 가다 보면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웅장한 누각이 있다. 여주 8경의 하나이자 '달을 맞이하는 누각'인 영월루라고 하는 곳이다. 물론 예전에는 지금의 여주시청 자리, 즉 여주목 관아의 정문에 있었지만 1924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일대는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여주시민들에겐 산책을 즐기는 장소로 주로 쓰이지만 보물로 지정된 창리, 하리 삼층석탑 등 만만치 않은 내력을 지닌 문화재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영월루 공원 아랫편에는 여주의 다른 곳에서 욺겨온 창리, 하리 삼층석탑이 있다. 각각 신라, 고려 시대에 조성된 탑으로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영월루공원에 자리잡은 창리, 하리 삼층석탑 영월루 공원 아랫편에는 여주의 다른 곳에서 욺겨온 창리, 하리 삼층석탑이 있다. 각각 신라, 고려 시대에 조성된 탑으로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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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정상부에 위치한 영월루다. 지금 시기가 가을의 절정에 다다른 만큼 하늘은 더없이 높고 푸르다. 영월루에 올라서면 신륵사부터 흘러내려가는 남한강 줄기를 따라 들어서 있는 여주시내의 모습이 아름답게 비친다.     

하지만 그곳에 걸터앉아 음주가무를 즐기는 사람들 때문에 오래지 않아 그 감흥이 깨져버렸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인 만큼 그 품격을 유지시켜주었음 하는 바람이 있다. 누각 아래로 내려오면 남한강변을 따라 기암절벽이 쭉 이어져 있다. 길도 험하고 쉽게 눈에 띄는 위치가 아니라 사람들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는 장소지만 이곳에 여주의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마암(馬巖)이 있다.

거대한 바위에 마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의 틈에서 황마, 여마가 승천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 지명이 황려로 바뀌었고, 이것이 나중에 여주가 된 것이다. 또한 여흥 민씨의 시조가 여기서 태어났다 하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여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여흥 민씨 
 
영월루 아래 절벽에는 여주의 지명이 유래된 마암 절벽이 남아있다. 이 바위의 틈에서 황마, 려마가 나왔다고 전해지며, 여흥 민씨와도 큰 관계가 있다.
▲ 여주의 지명이 유래된 마암 절벽 영월루 아래 절벽에는 여주의 지명이 유래된 마암 절벽이 남아있다. 이 바위의 틈에서 황마, 려마가 나왔다고 전해지며, 여흥 민씨와도 큰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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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를 이야기 함에 있어서 여흥 민씨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을 본관으로 하는 여흥 민씨는 시조인 민칭도가 북송에서 외교를 목적으로 고려로 건너왔다가 고려가 마음에 들어 왕으로부터 황려(여주)를 식읍으로 부여받고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고려말 민제가 무인 집안이었던 이성계의 셋째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그 아들이 조선 3대 왕 태종이었고, 그 딸은 당대 여장부로 알려졌던 원경왕후 민씨다. 이후 여흥 민씨는 여러 차례 임금의 장인에 올랐는데 숙종의 왕후이자 장희빈의 라이벌인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순명효황후 민씨와 가장 유명한 명성황후 민씨를 포함해 총 4명을 배출했다.
     
명성황후는 근대기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이다. 그녀의 생가가 현재 여주에 남아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 명성황후 생가 앞에 자리잡은 명성황후 탄강구리비 명성황후는 근대기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이다. 그녀의 생가가 현재 여주에 남아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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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명성황후의 생가가 여주에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명성황후는 우리 근대 역사의 다사다난했던 현장 한복판에 서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이화학당 등 여성교육기관 설립에 역할을 했고, 일본의 견제를 위해 러시아와 적극 접촉을 했다는 점, 그리고 일본 낭인들에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 했다는 점이 부각이 되면서 한동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사치를 심하게 했다는 점, 그녀를 포함한 민씨 일가의 부정부패로 인해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암튼 넓은 부지에 생가를 비롯해 기념관, 민가마을, 감고당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 명성황후 생가는 그 시절 역사를 더듬어 갈 수 있는 장소로 더할 나위 없다.      

원래 명성황후 생가는 민유중의 묘막으로 지어진 작은 초가집이었는데 민치록이 묘를 지키며 살다가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태어났다. 현재의 생가는 1990년에 새롭게 기와집으로 다시 복원된 것이고, 그 옆엔 고종의 친필로 새겨진 비석 탄강 구리 비가 자리해 그 흔적을 전해주고 있다.

생가 너머로 99칸의 거대한 위엄의 감고당이 눈길을 끈다. 서울에 있던 한옥을 이건 해 온 것으로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강등되던 당시 머물렀고, 명성황후가 결혼 전 한양으로 올라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사랑채는 예절학교 등으로 쓰이고 있는 듯했다. 다음화에선 여주에 남아있는 불교의 흔적을 쫓아가는 답사를 떠나보도록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1권 (경기별곡 1편)이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 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낟. 경기도는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와 함께 합니다.


태그:#경기도, #경기도여행, #여주, #여주여행,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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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 : 경기별곡2편>, 경기별곡 3편 저자. kbs, mbc, ebs 등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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